[창작시] 일요일 최백규 책상에 죽은 화초가 있다 여전히 곧고 조금 붉다 이 진료실은 환기가 잘 되지 않는다 숨으로 가득 찬 방에서 의사는 늑골 아래를 누르며 아픈지 묻고 처방전을 쓰고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말한다 약봉지를 들고 거리에 서면 생경한 기분이 든다 먼지마저 움직이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혼자서 잠을 설치고 식사를 거르고 그 여름을 뒤돌아보다가 웃을 수 있을지 버스 창을 열어 두고 바람을 맞는다 턱을 괴고 무언가 적거나 긴 전화를 한다 몇 마디 안부를 나누고 한참 고개를 끄덕인다 광화문 광장이 우는 사람들로 가득해 멀리[…]
2022년 6월
[창작시] 땅의 달 최재원 오래된 달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걷는데 꺼졌다 전자가 발길을 끊은 후에도 달은 주황빛으로 익어 가고 있었다 필라멘트에 남겨진 입자가 식어 가고 있었다 멍하니 입 벌리고 바라보며 가는데 배수로에 덮어 놓은 그물망에 발이 빠졌다 넘어지진 않았지만 발 바깥쪽을 삐고 말아서 다리를 절며 돌아가는데 켜졌다 철쭉 잎 익은 제 살을 뒤집어 오므라드는 가운데 철모르는 몇몇의 낙엽을 밟고 절뚝절뚝 가는 겨울을 재촉하는 봄의 성급한 발 발 밤 봄바닥 위 떨어진 달 봄 내내 깜빡이더라 강동구의 오래된 가로등을 LED로 교체한다고 했다 […]
[창작시] 모래시계 김현서 딱 10분 지렁이의 긴 운구 행렬이 이어진다 메마른 영혼이 서성거리는 이 도시를 떠나기 위해 이팝나무 가로수 길을 달린다 목이 떨어진 채, 나는 새 제한 속도를 무시한 채 눈을 감고 딱 10분 닳고 단 이생의 흉터를 모아 핏기 없는 또 다른 생을 향해 딱 10분 나는 구석 자리에 안치될 218번째 반가운 인사 나는 부서지고 부서져서 조금만 건드려도 홀연히 사라질 볍씨 한 알 두려움과 공포가 무르익는 계절 유리에 비쳤던 새파란 하늘을 지나 셔터를 올리려 안간힘을 쓰는 상점을 지나 무릎을 꿇고 오열하는[…]
[창작시] 손 성은주 대학병원 화장실 입구에서 휠체어를 탄 사내가 방향 잃은 채 손을 놓고 있다 트럭에서 굴러 떨어진 상자처럼, 버스를 눈앞에서 놓친 사람처럼, 폭우에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외진 그늘에 앉아 쉬다가 일행을 놓친 여행객처럼, 오래된 간판 속 지워진 글자처럼, 나는 손을 닦는다 공중화장실에서 문득 따뜻한 물이 나올 때 물이 베푸는 친절이 흐르는 방향에 대해 생각한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만지는 동안 다정한 젊은 여자 목소리가 사내에게 다가간다 어디 찾으세요 제가 밀어드릴까요 방향을 바꾸는 바퀴처럼 그녀가 힘주어 말할 때 감추고 싶지만 불쑥 들켜버리는 얼룩 같은 부끄러움[…]
[단편소설] 봄방학 도수영 무슨 여름이 이래. 미옥은 스탠드를 켜고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새벽 세 시였다.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낯선 방. 얇은 이불을 두 개나 덮었는데도 움직일 때마다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호주는 여름이라는 말에 패딩을 맡기고 반팔 위주로 짐을 챙겼는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영이 씨에게 말해 볼까 생각했지만 새벽 세 시였다. 영이 씨는 이층에 있고 미옥은 거실에서 한 층 내려가는 지하층에 묵었다. 지하는 작은 거실에 침실, 부엌, 안마당이 딸린 하나의 독채였다. 영이 씨의 아들인 앤드류가 쓰던 곳인데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편소설] 내 이름 묻지 마세요 이지영 최초의 말막힘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네, 어머니. 입학 테스트는 매주……, 매주 ……, ……, ……, ……?” 그것은 희진으로서는 태어나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토요일’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토요일을 발음하는 데 필요한 모든 신체 기관이 일순간 작동을 멈춘 것이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통화 상대인 학부모가 몇 번이나 전화가 끊어진 것인지 확인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희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십 초 아니면 일 분 남짓의 시간이 흘렀을까. “…… 토요일에 있어요, 어머니. 토요일에 입학[…]
[창작시] 독작(獨酌) 장석남 돌 하나 주워다가 앉혀 놓고 나이를 묻는다 오래되어 잘못 알고 있는 답을 여러 번 되풀이한다 한 번은 쉰 살이 넘은 지 여덟 해가 지났다고 했다 꽃 피고 새 우는 이야기를 물었다 올봄 들어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고…… 저녁 하늘 별 불러 앉히는 영롱한 새소리 쪽을 향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러진 자리를 유심히 보며 권하듯 한 잔 삼키니 돌부처가 거기 있었다 석불역(石佛驛)* 쪽으로 떠나는 밤 기차 소리 들릴 때 길게 삼킨다 꼬부랑길 지나 산 뒤로 숨는 지 몇 달 오래 묵은[…]
[창작시] 월파 문태준 오늘 파도는 제방을 넘어서 온다 그러나 집채만 한 파도가 언제 넘어올지 알 수가 없다 해변에 사는 우리가 아는 것은 월파(越波)가 있다는 것 우리에게 때때로 슬픔이 치런치런 찬다는 것 그리고 머리에 이고 가던 그 물항아리를 떨어뜨리기도 한다는 것 흐르는 해무 해무가 밀려오는 해변을 걸어가노니 파도소리만 올 뿐 너도 나도 해무 속으로 들어가 흐르는 해무가 되었으니 우리는 하나의 의문이요 하나의 작은 물방울이요 여기에 저기에 또 저기에[…]
[커버스토리] ※ 기획의 말 2022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성다영, 「루프이미지」를 읽고(《문장 웹진》 2022년 5월호) 죽은 나무와 흔들리는 소리가 이미지가 되어 얽혀든다. 작가소개 / 임지혜 휴식과 공간을 주제로 판화 작업과 캔버스 작업을 병행하며 진행하고 있습니다. 휴식을 취할[…]
[문학생활탐구] 문학생활탐구 설하한, 최아현 -4화-글을 쓰는 친구들!(1) 부추를 태우고 날아가던 삑이 바닷가를 발견하고 말했어요. 삑 부추야 우리 저기 바닷가에서 물놀이 하다가 가지 않을래? 부추 글쎄. 나는 물놀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걸. 삑 아니야, 분명 너도 재미있어 할 거야. 부추 잠깐만……! 부추가 급하게 삑을 불렀지만 삑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바닷가를 향해 내려앉았어요. 부추가 등에서 내리자마자 삑은 물에 뛰어 들어가 푸드덕거렸답니다. 삑 부추야, 너도 얼른 들어와 물이 아주 시원해. 부추 그게……. 삑 물이 무서운 거야? 부추 그건 아닌데……. 바다는 처음이고…… 이렇게 많은 물은 처음 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