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인 P 외 1편 / 이원복

[창작시]     간병인 P     이원복            P에게 맡겨진 것은 한 가족의 과거사다    이미 몇 세대의 가족사를 꿰뚫고 있는 P는    오늘도 노파의 가슴 속 끓는 가래를 제거하며    침착하게 노파의 갈퀴 같은 두 손을 억세게 붙잡아 놓는다    병풍처럼 둘러친 병실 커튼 사이 늙은 기침소리가    노파의 처진 맥박과 같이 침대에 누워 있다    명절 때 노파를 찾아올 가족과 찾아오지 않을 가족들의 속내를    이미 알고 있을 P는 노파가 삶에 대한 마지막 의지를 놓치지 않도록    노파의 희미한 기억 속 잊혀 가는 가족들의 비화와    채무 관계 하나하나를 노파 옆에서 천천히 나열한다[…]

간병인 P 외 1편
이원복 / 2022-05-01
삭망 외 1편 / 강기원

[창작시]     삭망     강기원            달이 삭~    사라지는    삭에 만나    달의 괄호를 열고    너랑 나랑    상현과 하현처럼 마주 보면    망!    빈틈없는 만월이 될 거야    둥둥 울리는    두 개의 심장으로    삭의 어둠을 밝히면    사람들은 말할 거야    벌써 보름이 됐나?    달의 괄호를 닫아야겠네    굶주린 삵처럼 삭을 기다릴게                       열쇠            난주는 왜 등지느러미가 사라졌을까?    어항 속 흑난주    눈물을 물리도록 마신 눈을 하고 있다    도무지 감는 법도    눈 맞출 줄도 모르는    애완도 애인도 아닌[…]

삭망 외 1편
강기원 / 2022-05-01
임상소설 / 김갑용

[단편소설]     임상소설*)     김갑용         *       체호프를 읽고 있었다. 어느 관리가 장관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관리는 장관에게 설명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다음 장을 넘기자 벌써 소설의 마지막이었다……. 갑자기 장관이 소리쳤다. 당장 나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당장 나가!     그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모두 여전히 제자리였다. 밖에서 오토바이들이 요란하게 달려오는 소음뿐이었다. 오토바이들은 그가 사는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터널을 지나 한적한 교외를 마음껏 내달릴 것이다. 문밖은 온통 컴컴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안방은 문이 닫혀있다. 아까 그가 닫았다. 문에 귀를 대보면 아마, 희미한[…]

임상소설
김갑용 / 2022-05-01
호호 불며 먹기 외 1편 / 하재연

[창작시]     호호 불며 먹기     하재연            구워진 알을 테이블에 굴리면서    뜨거운 돌 위에서 흙빛으로 굳어 가는    투명한 액체를 떠올리는 한 사람과    새의 잘린 부리가 쌓여 만드는    황금빛 산의 모양을 생각하는 한 사람이    마주 앉아 껍질을 알에서 분리해 낸다.    소금을 찍지 않으면 비린 맛이 가시지 않아    한 사람의 말에    그런 건 그냥 관념일 뿐이야    한 사람이 말한다.    낮에는    열한 살에 왕위에 올랐다는 사람의 무덤이 있는 숲을 걸었다.    갓 태어난 아기 손가락 같은 새 잎을 펼쳐 올리는    단풍잎의 그림자에    한 사람과 한 사람은 같이 손을[…]

호호 불며 먹기 외 1편
하재연 / 2022-05-01
양파 캐기 외 1편 / 피재현

[창작시]     양파 캐기     피재현            경북 안동시 남선면 원림리 양지마을 앞 들판에서 양파를 캐던 그 남자는 아프리카 말리에서 왔다고 했다    스물두 살이라고 손가락으로 말했다    ‘한국말 몰라요’라고 했다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양파를 키운 검은 비닐을 벗기고 또 벗겼다    이 동네 청년인 양 갈라산을 향해 돌아서서 오줌을 눴다    잠시 말리공화국의 노을이 지는 저녁으로 날아가 밥 짓는 아내를 보고 온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기 집이 있다            저기 집이 있다    내가 스물아홉 살[…]

양파 캐기 외 1편
피재현 / 2022-05-01
등대가 보이는 밤 / 유시연

[단편소설]     등대가 보이는 밤     유시연           개 짖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창밖은 어둠이 가득 에워싸고 어둠 속에서 개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남자의 달래는 소리가 났지만 개는 계속 짖어댔다. 목청이 큰 것으로 보아 어린 강아지는 아닐 것이었다. 산책길에서 개를 끌고 가는 남자를 본 적이 있다. 덩치가 큰 진돗개였는데 새벽을 깨우는 저 개가 그 개일까. 다시 잠이 오지 않아 누워서 뒤척였다.     동이 터 올 무렵 겉옷을 걸쳐 입고 산의 초입으로 갔다. 몇몇 사람이 마스크를[…]

등대가 보이는 밤
유시연 / 2022-05-01
양자역학적인, 인어 외 1편 / 변윤제

[창작시]     양자역학적인, 인어     변윤제            인어의 머리를 자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숙련된 기술자들은 인어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르고, 버리고를 반복했다    머리와 몸통을 빨리 던지는 사람일수록 직급이 높았다    태어나 한 번도 마주 본 적 없던 자신의 속이 드러나는 찰나    제 몸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려는 머리통도 있었다    번개가 마르고    통 안에 자신의 상체가 떨어지는 청아한 소리    양자역학에 따르면    누군가 들여다보는 순간 물질은 하나의 상태로 고정되어 버린다고    그 말은 회칼로 인어를 자르기 전    몸통 안쪽엔 유선형의 빛, 가시 사이 퍼져 나가는 잔향    태초에 탄생한 부모에게서 온 파동이나, 먼바다를 회전하던[…]

양자역학적인, 인어 외 1편
변윤제 / 2022-05-01
우리들 사이에 흐르는 강 / 황시운

[단편소설]     우리들 사이에 흐르는 강     황시운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늘어놓는 사람도 없는데 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청소를 한다. 잠시 후, 청소기 소리가 멈췄다. 이제 엄마는 걸레를 빨아 좁은 거실과 부엌, 그리고 제희와 내가 함께 쓰던 작은방을 걸레질할 것이다. 이십여 분쯤 흘렀을까.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낡은 소파에 무너지듯 앉아서 종일 가쁘게 차올랐을 숨을 돌리는 엄마의 모습이 연상됐다.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엄마의 움직임과 표정을 상상하곤 한다. 내가 보지 못할 때 엄마는 어떤 얼굴일까. 나와 함께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러하듯 미간에[…]

우리들 사이에 흐르는 강
황시운 / 2022-05-01
미래의 윤리 / 박민정

[단편소설]     미래의 윤리     박민정           황지우의 근황을 이렇게 오랫동안이나 듣지 못하게 될지는 몰랐다. 모두가 아주 오래 전부터 황지우를 알았다. 황지우의 개인 SNS 같은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녀의 소식은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이들은 가끔 황지우가 죽었나? 하고 말했다. 어떤 아이는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 황지우의 이름이 뜨는 꿈을 꿨다고 말했다. 그런 사람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뜬다면 그녀가 죽었다는 이야기밖에 더 되겠느냐며, 잠에서 깬 채로 포털에 접속했다가 모든 것이 꿈이라는 걸 알아채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고도 했다. 서아는 황지우와 마지막으로[…]

미래의 윤리
박민정 / 2022-05-01
[문학생활탐구] 3화 : 독서모임을 하는 친구들!(2) / 설하한, 최아현

[문학생활탐구] 문학생활탐구 설하한, 최아현   -3화-독서모임을 하는 친구들!(2)     Q. 다른 독서모임과 교류한 적이 있니? 앎 독서모임으로 교류한 적은 없어. 우리 모임 자체가 구성원들이 똘똘 뭉쳐서 누군가와 교류할 수 있을 정도의 결집력이 없어. 간신히 모임을 운영하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 내가 개인적으로 여러 독서모임에 기웃거린 적은 있어도 모임 대 모임으로 교류한 적은 없어. 진숙집사 다른 모임과 교류한 적은 없지만 행사를 기획한 적은 있어. 전주의 선미촌이라는 구역에 성평등 전주라는 공간이 있어. 여성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성평등 관련 활동을 하는 공간이야. 그곳에서 우리 모임 사람들과 함께 SF 페미니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문학생활탐구] 3화 : 독서모임을 하는 친구들!(2)
설하한, 최아현 / 2022-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