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디올로스 외 1편 / 정화진

[창작시]     글라디올러스     정화진           빵에 버터를 바르고 밤을 응시하다 저 어둠의 강을 건너왔을 때     누군가 빈 들판, 황무지 드문드문 풀숲에 꽃을 꽂아 두고 갔었지 미셸 세르가 글라디올러스를 발음할 때 그것은 물의 식물*이라 했었어       사람들에게 다치거나 아플 때면 꽃잎 말아 넣듯, 자책하고 움츠러들던 네 모습처럼,     뾰족한 잎 속에 너라는 존재를 꼬깃꼬깃 구겨 넣는 오래된 습관이 있었지 핏물이 배어 나오거나 상처가 덧나면 가까운 이들에게 유독 가혹하게 굴었지       오래된 습관, 알 수 없는 마음       물소리가 들려오면 그제야 눈을[…]

글라디올로스 외 1편
정화진 / 2021-01-01
지나가는 것 / 박다은

[제38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 시 부문 장원🏆]     지나가는 것     박다은       🔊 수상자의 목소리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요.         흰 양말을 신고     기차에 탄다       신발을 벗지 않을 예정이기에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것을 안다       사람들은 어디에도 꺼내놓지 않을 흰 마음과 흰 계란을 준비하여 의자에 앉는다       저 안에 노른자가 있을까     저 마음에도 노란 꽃 한 송이 있을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의자는 달음박질치는 풍경만 바라보는데       오랜 시간이 지났다 어떤 아이가 한쪽[…]

지나가는 것
박다은 / 2021-01-01
미완의 영화 / 오유경

[제38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 산문 부문 장원🏆]     미완의 영화     오유경       🔊 수상자의 목소리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요.     나는 동전 교환원이었다. 대학을 그만두고 한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내게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몸이 겨우 들어가게 만들어진 부스. 허리까지 내려오는 투명 아크릴판. 얼굴 높이로 송송 뚫려 있는 구멍. 그 위에 손님들이 오가며 만들던 침 자국. 작은 책상 위 똑같이 쌓여 있던 일렬종대의 동전들. 지폐와 동전이 오고 갔던 반달모양의 창구. 혀를 내밀 듯이 미끄러져 들어오던 꾸깃한 지폐. 재빨리 밀어낸 동전의 탑. 속도를[…]

미완의 영화
오유경 / 2021-01-01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외 1편 / 김준현

[창작시]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김준현           일본식 가옥을 보존해 만든 까페였다     죽은 사람의 일본어는 갈 데가 없어서 방황하는 개가 되었다     2층에 앉아서 보았다       그 개가 돌아다니는 모양을 보며 빨대의 내부에 대해 빨대의 허기에 대해 호흡이 많이 필요한 외국어에 대해 적었다 ‘창밖에는 밤비가 속살거려’로 시작하는 메모였다       윤동주의 귀를 천 원에 산 적이 있지     작은 종이에 사인펜으로 그려져 있었다 네 번 접었다     이 어지러운 굴곡을 수평선처럼 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몇 년이었을까?     문학을 많이 해서[…]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외 1편
김준현 / 2021-01-01
부드러운 마음 외 1편 / 임유영

[창작시]     부드러운 마음     임유영           어데 그리 바삐 가십니까, 동자여. 바지가 다 젖고 신도 추졌소. 뜀뛴다고 나무라는 게 아니라 급한 일이 무엇이오.       이보, 여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 지금 아랫마을 개가 땅을 판다기에 바삐 가오. 개가 주인도 안 보고 밥도 아니 먹고. 빼빼 말라 거죽밖에 남지 않은 암캐가 땅만 판다 하오.       그 개 물 주어 봤소?       그 물 주러 가는 길이요, 그래 내가 이래 다 쏟아 온데 사방이 추졌소.       동자승아, 동자여, 뚜껑 단단히 닫고 가소. 여기[…]

부드러운 마음 외 1편
임유영 / 2021-01-01
친구까지 삼십 센티 / 안보라

[제38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 아동문학 부문 장원🏆 〈동화〉]     친구까지 삼십 센티     안보라       🔊 수상자의 목소리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요.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교실 문을 열어젖히자 맞은편 창으로 바람이 가득 들어왔다. 나는 친구들과 교실을 나가다 멈칫했다.     ‘문어왕!’     뒤를 돌아보니 창가 책장 위에 놓인 문어왕이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뛰어가 문어왕을 바람이 덜 닿는 자리로 옮겨 놓았다. 친구들 가운데 선 주리가 핀잔했다.     “김희진, 뭐 해? 그깟 플라스틱 쪼가리가 뭐 중요하다고. 빨리 가자. 선착순[…]

친구까지 삼십 센티
안보라 / 2021-01-01
샐리와 케이와 그런 여자들 / 조남주

[단편소설]     샐리와 케이와 그런 여자들     조남주           학부모 총회라니. 유난이라고 생각했다. 유치원 가서 잘 먹고 잘 놀다 오면 되는 거 아닌가. 대체 뭘 상의하고 건의하겠다고 학부모 총회씩이나. 은주는 그런 마음으로 새봄을 영어유치원에 보낸 게 아니었다. 퇴근한 용근에게 메시지를 보여주며 물었다.     “나가지 말까?”     “왜? 가서 엄마들도 사귀고 정보도 얻고 그러면 좋지 않아? 궁금한 거 많았잖아.”     “새봄아빠 이런 거 기겁할 줄 알았더니.”     “그냥, 다들 모이는 자리잖아.”       새봄은 세 살 가을부터 인근 교회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다녔다. 어린이집은 교회와 같은 건물이고[…]

샐리와 케이와 그런 여자들
조남주 / 2021-01-01
파리공원 외 1편 / 조해주

[창작시]     파리공원     조해주           공원 한쪽에는 작은 코트가 있다       같이 해도 되나요?     농구 골대를 중심으로     하나 둘 모여드는 사람들       서로 밀어내거나     서로의 뒤에 있거나     몸을 낮춘다       인기척이 가까워지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는다       드리블하는 동안에 공은     아주 잠깐씩만     바닥에 붙어 있다       점점 가늘어지는 공       사람들과의 거리가 좁혀질 때쯤     패스하려고 팔을 뻗는다       공이 벗어난 순간     이미 알고 있다       잠시[…]

파리공원 외 1편
조해주 / 2021-01-01
얼굴을 비울 때까지 / 최윤

[단편소설]     얼굴을 비울 때까지     최윤           어찌 보면 특수하다고 할 수 있는 내 직업으로 인해서 나는 인생의 매 단계에서 예외적인 사람들을 만났다. 예외적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상식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예외적이니 말이다. 그들은 나와의 관계에서 예외적이 된다는 뜻이다. 나는 초상화를 그려 주는 화가다. 초상화가의 관점으로는 매우 그렇다는 얘기다. 초상화만 그리지는 않지만 나의 생활원은 주로 내게 초상화를 주문하는 사람들이 지불하는 작품 값에서 나오므로 사람들이 나를 초상화가라고 부른다 해서 서운해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내가 초상화 이외의 그림들, 일테면 풍경화나 추상화 같은 여느 그림을 싫어한다고[…]

얼굴을 비울 때까지
최윤 / 2021-01-01
백발의 기수 / 최영희

[제38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 아동문학 부문 장원🏆 〈동화〉]     백발의 기수     최영희       🔊 수상자의 목소리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요.         가을 끼 발표회가 시작됐다. 강당 무대 단상 위로 붉은 색 막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다음 차례인 우리는 강당 뒤 대기실에서 마지막으로 동선을 확인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앞 무대가 끝났는지 박수소리와 함께 함성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자, 하던 대로. 알았지? 긴장하지 말고. 파이팅!”     댄스부 선생님이 주먹을 꽉 쥐며 응원해주었다. 우리는 무대 위로 올라가 자기 자리에 섰다. 막이 쳐 있는[…]

백발의 기수
최영희 / 202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