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외 1편 / 손미

[신작시]     퇴근     손미           봉지 속에서 귤이 상하고 있다     옆으로 옆으로 옮아 가고 있다       누가     귤이 담긴 봉지를 가리키며     사과를 가져오라 했다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머리를 뎅강 자르고     거기에 귤을 심었다     귤은 주렁주렁 피를 빨고 자란다       봉지 속에 비가 내리고 있다     마음이 상한 사람이     머리가 담긴 봉지를 흔들며       버스를 탄다     죽은 머리들이 부딪친다     옆으로 옆으로 옮아 간다       사과해 사과해 사과해       이건 사과가[…]

퇴근 외 1편
손미 / 2021-05-01
가장 오래된 포털 / 윤해서

[단편소설]     가장 오래된 포털     윤해서           화성의 바람소리를 들었어. 먼지바람이 이는 화성 표면이 보였고 바람소리가 들렸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이. 미국에 사는 어떤 새들 얘기인데. 회오리가 오기 몇 달 전에 그들은 멀리 날아간대. 몇 달 뒤에 회오리가 올 것을 알아차리고. 사람들이 그들의 움직임을 통해 회오리가 올 것을 예측한다고. 당신은 말하고 있어. 새들은 무리 지어 날아가지. 인간도 다시 무리 지어 살게 될 거래. 누구였더라. 당신은 듣고 있어. 모른 척하고 싶다. 그럴 때 있잖아. 그게 뭐든. 넌 꼭 그러더라. 나니까 너를.[…]

가장 오래된 포털
윤해서 / 2021-05-01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외 1편 / 신준영

[창작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신준영           옆구리를 스쳐간 두 개의 칼자국이 좋아       우리 중에 나만 아는 폐허       나만 만질 수 있는 어둠이 좋아       두 자루의 손목이 지나간 피의 길을 따라가       밤의 허리를 관통한 침묵의 총성이 좋아       우리 중에 나만 아는 골짜기       나만 통과할 수 있는 응달의 미래가 좋아       두 그루의 연필이 자라는 벼랑의 잠을 좇아가       우리들의 뾰족함이 밤의 귓불을 찢고       진주처럼 박히면 어쩌나      […]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외 1편
신준영 / 2021-04-01
우리가 지나온 길 외 1편 / 김유림

[창작시]     우리가 지나온 길     김유림           우리가 지나온 길에 대해 묘사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할 수 있다. 물소리가 들렸다고. 그것은 내게만 들렸다고. 물소리는 아니야 아니야 말할 것이다. 말을 할 수 있다면. 흰 저수조를 내가 이미 안다면. 놀라울 일이 아니다. 그러나       햇빛은 그대로였고     나무도 그대로였다       우리가 지나온 길은       대리석 난간과 면하고 있었고 대리석 난간은 나무들을 가두고 있었다.     나무들은 나무들이 만드는 빈 공간을 에워싸고 있다. 그래서 연인이라면 그곳에서 키스를 한다.       내[…]

우리가 지나온 길 외 1편
김유림 / 2021-04-01
폴란드는 뽈스까. 거꾸로 하면 외 1편 / 권창섭

[창작시]     폴란드는 뽈스까, 거꾸로 하면     권창섭           까스뽈, 가스불, 아무래도 가스불을 끄지 않고 나온 것 같아, 가스불, 그런 것만 같아, 뽈쓰까, 우째야쓰까,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계속 불붙어 있을 것만 같아, 가스불, 크루프니크★가 졸아붙고 있을 것만 같아, 크라이시스, 냄비가 달아오르고 있을 것만 같아, 위기를 기회로, 기회를 회기로, 회기를 회귀로, 돌아가야만 하는데, 달려가야만 하는데, 설마 끄고 나온 것이면 어떡하지, 가스불, 억울할 것만 같은데, 울컥할 텐데, 후회할 텐데, 끝도 없이 뒤바뀌는 생각, 한결도 같이 달라붙어 있는 두 발, 앞뒤를 자꾸 거스르는 시간, 돌아갈 수도, 돌아가지 않을[…]

폴란드는 뽈스까. 거꾸로 하면 외 1편
권창섭 / 2021-04-01
꽃병이라는 곳에 꽃을 한 무덤 꽂고 외 1편 / 성미정

[창작시]     꽃병이라는 곳에 꽃을 한 무덤 꽂고     성미정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를     기다리며 꽃을 꽂았다     어떻게 꽂아야     질서가 있는지     어디를 잘라야     꽃들의 리듬을 볼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꽂았다     물컹하거나 풋내가 나거나     비린내가     나는 꽃들을     이름은 모르지만     꽃인 것들을 꽂았다       꽃병이라는 곳에     꽃을 한 무덤 꽂고     죽어버린 날들보다 슬펐다       얼마나 자주 목도했던가     나의 죽음을     그렇다고[…]

꽃병이라는 곳에 꽃을 한 무덤 꽂고 외 1편
성미정 / 2021-04-01
Ω, 징글 올더웨이 외 1편 / 허은실

[창작시]     Ω, 징글 올더웨이     허은실           깔끔하죠, 육십 촉 전구가 갑자기 퍽, 죽어버린 거예요. 존재하는 일은 피곤해요. 열이 빛을 내는 온도까지 징글 징글 올더웨이. 일반 백열전구는 필라멘트의 저항에 의해 빛을 냅니다. 온도가 올라갈수록 금속 필라멘트의 저항은 증가합니다. 징글벨 징글벨 징글 선생님 핫식스 좀 드실래요, 몬스터 에너지 천하장사 소시지. 저항이 증가하면 전류가 감소되고, 전류가 감소하면 필라멘트의 온도가 내려가므로 저항은 다시 감소합니다. 이러한 피드백 작용의 반복으로 안정된 저항값에 도달합니다. 멀쩡하게 멀쩡한 사람들은 어떻게 안정된 저항값을 찾아냅니까. 전구의 죽음은 잘못 산출된 불안정한 저항값인지 몰라. 어떤 퍽,은[…]

Ω, 징글 올더웨이 외 1편
허은실 / 2021-04-01
386번지 / 이광재

[단편소설]     386번지     이광재           엄마 생일에 맞춰 고향에 내려간 날 서울에서 딸이 온다고 엄마는 맛있는 음식을 장만했다.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엄마표 동태찌개 같은 것. 아마도 엄마는 나를 자랑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엄마의 지인들은 자신의 딸에게 관심을 갖듯 걸핏하면 나에 관해 물었다고 한다. 늬 딸은 사학년이 되었겠구나, 벌써 대기업에 취직한 건 아닌지 몰라, 외국유학을 보낼 생각인가……. 그때마다 엄마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올라가고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고 했다. 군 단위 소읍도 아닌 도청소재지에서 그해에 내가 간 대학교에 합격한 학생은 세 명에 불과했다. 우리가 적을 둔 동사무소와[…]

386번지
이광재 / 2021-04-01
동쪽 외 1편 / 송찬호

[창작시]     동쪽     송찬호           우산이 날아간 곳     최초의 점모시나비협동조합 설립 흔적이 남아 있는 곳     하얗게 피부병을 앓는 자작나무들이 치유를 위해 군락을 이뤄 사는 곳     길가에 슴슴한 보리빵집이 있고 그 너머     종달새 고공 활강장이 있는 곳     옛날에서 더 먼 옛날로 가는 기차역이 있는 곳     의자의 발톱을 깎아 죄다 모아 버리는 곳     아코디언 주자가 안경을 잃어버린 곳     무지개가 연애하다 자러 가는 곳     노을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던 곳                […]

동쪽 외 1편
송찬호 / 2021-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