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행 외 1편 / 김희업

[창작시]     초행     김희업            시간이 빨래를 말린다    빨래가 빨리 말라 갈수록 밤은 더디 마른다    하늘은 구름을 말끔히 걷어내고 새 단장을 했다    천둥도 한 가닥 걷어내자 멍 자국이 보였다    난청의 밤이 와    소란스럽던 소리조차 침묵에 덮이고 만다    침묵은 얼마나 무서운가, 할 말을 못 하고 세상이 끝나버릴 것만 같은    밤은 서식지가 불분명한 달이 출몰하는 장소인가    밤은    이런저런 생각이 밖으로 삐져나오는 송곳의 시간인가    빼뚠 글자를 수선해 가면서    밤새 밤도 모르는 줄거리를 찾아 밤을 이어 붙인다    어둠을 덮고 자는 밤에는 서로의 얼굴을 분간할 수 없게 되어    우리의[…]

초행 외 1편
김희업 / 2021-11-01
S가 돌아왔다 외 1편 / 윤지양

[창작시]     S가 돌아왔다     윤지양            스페인어 선생이 나에게 말했다    H는 묵음입니다    발음하며    뒤뜰에 묻은 것을 떠올렸다                       소설            P가 언성을 높이는 것을 듣는다. P는 유튜브를 통해 정치와 관련된 동영상을 보고 이것저것을 말했다. 나는 그가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다만 그는 자주 빨갱이 소리를 했고 독재 국가 하에서는 국방력이라도 강했다는 말을 했다. 나는 독재를 모른다. 그 시기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방력 또한 모른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기어 다니지 않았기[…]

S가 돌아왔다 외 1편
윤지양 / 2021-11-01
봄아, 너만 믿는다 외 1편 / 김승희

[창작시]     봄아, 너만 믿는다 *     김승희            거주자 우선 주차, 골목에 세워진 작은 자동차를 보았다    자동차 후면 유리창 왼편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고    몇 겹의 투명 스카치테이프를 둘러 정성껏 고정해 놓았다,    ‘요 주의’ (빨간 글씨)    ‘위급 시 아기 먼저 구해 주세요/ RH-B형’ (검은 글씨)    글자가 빗발처럼 요동친다    누군지 모르지만 RH-B형 아기의 모습이 자꾸 어른거린다    내가 RH-B형이 아니어서인가, 자꾸 마음이 가는 것은    공기 속에는 모자 쓴 해골이 늘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연고와 무연고 사이    위독은 두서없이 오고    몸이 금방 무덤이 되는    시간을 넘는 시간이 파도를 넘어[…]

봄아, 너만 믿는다 외 1편
김승희 / 2021-11-01
아무도 없는 우리 외 1편 / 서윤후

[창작시]     아무도 없는 우리     “겨울의 연인에겐 간단한 언어가 있다.” ― 베이다오, 「겨우 한 순간」             그렇다고 빈 괄호는 아닙니다     우리는 겨울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다     침묵은 빈손이면서 언제나 즐거워     폭설입니다     흰 광목천을 두른 울창한 숲속에서     우리는 빛이 다 청산하지 못한 어둠     아마도 밤새 다 태우지 못해 젖은 장작들    다시 태어나는 꿈을 반으로 접고    적설량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실컷 서로에게 쏟아지다가    기꺼이 무너져 버리다가    더는 우리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를 봅니다    나른하고 편안한 갈등 속에서    다친 적도 없이 아프게 되었으니[…]

아무도 없는 우리 외 1편
서윤후 / 2021-11-01
아담 / 김강

[단편소설]     아담     김강           그가 나에게 말했다. 언젠가 내가 다시 자기를 찾아왔을 때 부재의 형태가 어떠하든,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한 줄 문장으로 부고를 남겨 달라 했다. 산을 내려오며 언제쯤 그를 만나러 와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삶이 그의 몫이기는 하지만 그를 알아버린 내게도 그의 삶에 대한 책임 중 일부가 주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주 잠깐 이상의 고민은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병원이나 요양시설에 수용되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아니면 여전하거나.     이후 삼 년이 지났다. 나는[…]

아담
김강 / 2021-11-01
비대칭 인간 / 이은정

[단편소설]     비대칭 인간     이은정           선글라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습관이라고 하기엔 인식한 기간이 길지 않고 만성이라고 하기에도 교정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무의식에 광대뼈 부근을 추켜올리는 움직임은 몸에 배고 있었다. 올리고자 하는 부위가 콧등인지 볼인지 명확하게 모르겠다. 그 어디쯤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려야 선글라스가 콧대에 맞춤하게 내려앉았고 그것은 포화 상태인 나의 예민함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어 결국 선글라스에 집착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습관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를 유지하려는 탄력에 관한 강박 같은 것. 선글라스를 써서 그런 것인지 선글라스를 쓰기 위해 그런 것인지 이제는 그 원인을 찾는[…]

비대칭 인간
이은정 / 2021-11-01
입도 벌리지 않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외 1편 / 김기형

[창작시]     입도 벌리지 않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김기형            우리는 다르게 앉아 있으므로    꺾이는 무릎이 다르므로    아침이 다르다고 하네요    아침 이후 가지가 뻗어 나가는 것을    자기 팔과 같다고    바람이 붙잡는 것을 해방시킬 줄 안다고    빨간 눈으로 말합니다 나는 곧잘 울지만요    나처럼 올린 온도    같이 기대면 이렇게 평온하고요    넘치도록 물을 계속 부어 줍니다    갈증을 아시나요    나는 규칙적으로 물을 마시므로    모두의 비밀을 매일 삼켜냅니다    알려줍니다    내가 눕는 법을    내가 내다보는 법을요 말하는 세계를    쓰러지기 전까지 기울이는 법을요    이 예지를 밝히는 밤의 불, 만지고 싶다고 해요[…]

입도 벌리지 않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외 1편
김기형 / 2021-11-01
빗살문 토기 눈사람에게 시 읽어주기 / 곽재구

[창작시]     빗살문 토기     곽재구            빗살문 속으로    사람이 걸어간다    슬픈 사람도    외로운 사람도    기쁜 사람도 걸어간다    꽃이 피면 빗살 하나 긋고    초승달이 뜨면 또 하나 긋고    아기 만들던 새벽 하나 긋고    흙속의 영혼이 부르는 노래    최초의 시가 태어났다                         눈사람에게 시 읽어주기            아세안 식료품점을 지나 카페 1mm 앞을 지나 불로만 치킨구이를 지나 매곡동 성당을 지나 북한 여자 결혼 중계소를 지나 오토미션 전문이라 적힌 카센터의 붉은 네온사인을 지나 삼인[…]

빗살문 토기 눈사람에게 시 읽어주기
곽재구 / 2021-11-01
어떤 경기 / 배시현

[창작 – 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어떤 경기     배시현           등장인물       이보현, 강승주     두 인물 모두 30대 초반 이상의 연령으로, 구체적인 나이와 성별은 무관하다.       시간은 달이 갓 뜨기 시작해 아직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은 초저녁, 장소는 잡초가 곳곳으로 우거져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곳이라는 게 바로 눈에 들어오는 근린공원이다.   어슴푸레한 조명 속에서, 작은 크로스백을 메고 있는 승주 들어와 공원 주변을 둘러본다. 태도는[…]

어떤 경기
배시현 / 2021-11-01
검은 입 흰 귀 / 유응오

[단편소설]     검은 입 흰 귀     유응오       아담과 하와의 낙원 추방을 묘사한 16세기 목판, 보들레르의 『악의 꽃』 재판 표지.             1.        검은 입과 흰 귀는 악명을 떨친 도둑이었어요. 물론 둘의 이름은 실명이 아니고 별명인데요. 검은 입은 벙어리인데 들을 수 있었고, 흰 귀는 귀머거리인데 말을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흰 귀는 검은 입의 입이, 검은 입은 흰 귀의 귀가 되어 주었죠.     그럼, 먼저 둘이 만난 얘기부터 해볼까요.     검은 입은 보육원에서 자랐는데요. 벙어리라는 이유로 보육원 형들한테 곧잘 얻어터졌죠.[…]

검은 입 흰 귀
유응오 / 2021-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