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풀 외 1편 / 원양희

[신작시]     잠풀*     원양희       드리워진 나뭇가지의 각도 때문에 달빛이 서러워 보이는 걸까 몸을 오그리는 꽃잎은 언제부터 달빛에 민감하였을까 새가 떠난 잔가지가 가늘게 떨린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를 울리는 일도 있을 수 있겠다 검은 덤불 속을 바라보면 그 속에 끔찍한 것이 감춰져 있을 것 같은 무섬증이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덤불 속에는 어떤 따스한 빛깔이 어떤 순한 짐승이 살고 있을지 모르는데, 내게로 다가서던 그 사람도 나는 저 덤불 속처럼 두려워 쉬이 마음 주지 못하였을까 잠들지 못하는 시간 어둠 속으로 가만 가만 부려놓으며 밤의 산책은 길어진다 물소리[…]

잠풀 외 1편
원양희 / 2020-10-01
내 피부를 찾아주세요 / 이은선

[단편소설]     내 피부를 찾아주세요     이은선           코드: A-20020505     내용: 가족 내 이식의 건, 한국, S병원 피부과 임상연구센터       선뜻 입을 떼지 못하는 규진에게 친구 부부는 단호한 눈매로 말을 이어 갔다. 네가 안 해주면 우리가 해. 부부가 들고 온 밀봉 식염수 비커 안에는 막 죽은 아이에게서 떼어낸 피부 편 두 장이 들어 있었다. 각각 분리해서 넣어 와야 했을 텐데,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을 보면 확실히 어디 한쪽이 마비되거나 망가져 버린 모양이라고 규진은 미루어 짐작했다. 세 살짜리 자식을 잃은[…]

내 피부를 찾아주세요
이은선 / 2020-10-01
레드벨벳 / 김혜나

[단편소설]     레드벨벳     김혜나           탁자 위에는 차와 케이크가 놓여 있다. 피처럼 새빨간 시트 위로 미색의 치즈 크림을 살포시 얹은 레드벨벳케이크. 나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포크를 집었다. 케이크를 조금 덜어 입속으로 넣자 폭신한 질감이 입 안 가득 차올랐다.     레드벨벳케이크는 원어민 영어 강사 해럴드가 사준 것이다. 오늘 오전 나는 그의 수업을 듣고 학원 1층에 자리한 북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있었다. 미국 작가 에밀리 프리들런드가 쓴 『늑대의 역사History of Wolves』라는 소설책이었다. 이 책을 영문 원서로 매일 한 챕터씩 읽어야 해럴드의 도서 토론[…]

레드벨벳
김혜나 / 2020-10-01
불쾌한 골짜기 외 1편 / 신정민

[신작시]     불쾌한 골짜기*     신정민           살아있다, 는 영화에 출연한다고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배역은 좀비였다       밑도 끝도 없는 연극판에서 얻은 기회라고 했다       초기 자본 2천이면     연 매출 2억이란 말에 솔깃해서     있는 돈 없는 돈 털어 꽃뱅이를 키워 볼까 생각하던 참이었다고       꿈틀거린다는 것     징그럽기로 치자면 살아있다, 는 것이 으뜸이라고       쫄쫄 굶긴 굼뱅이로 먹기 좋은 환 만들어     부자가 되어 볼까 생각하던 참이었노라고 했다       생각만 잔뜩 하고     초기 자본도 배짱도[…]

불쾌한 골짜기 외 1편
신정민 / 2020-10-01
체호프의 시선으로 지금, 여기를 다시 본다면 / 김나볏

[리뷰 – 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체호프의 시선으로 지금, 여기를 다시 본다면 윤성호 희곡집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김나볏       고전 명작은 계속 길어 올려도 끝없이 차오르는 샘과 같은 매력을 지닌다. 시대를 뛰어넘어 인생의 희로애락, 삶의 정수를 빠르게 간접 경험하게 해주는 데 고전만 한 것이 없다. 밀도 있게 파헤친 인간의 심연, 캐릭터 간 긴밀한 관계 설정, 짜임새 있는 이야기 등을 바탕으로 한 미학적 완성도는 오늘의 독자들을[…]

체호프의 시선으로 지금, 여기를 다시 본다면
김나볏 / 2020-10-01
어느 아침의 문장들 외 1편 / 홍경희

[신작시]     어느 아침의 문장들     홍경희           쉰 넷 생일 아침에     안면 없는 당신의 유고시를 만난다       하루치의 알약을 삼키고     하늘에 매달리려는 기대와     사람에 기대려는 문장의 실밥들을     한 올 씩 풀어 헤치며 남겨 놓은 시편들       나와는 울음을 해명하는 방식이 다른     당신의 유언을 읽으며     매듭짓지 못한 문장을 많이 가진 나는     조금 무서워진다       씁쓸한 독백을 선물로 받는 생일이     한번쯤 있어도 상관없겠지       문득, 고쳐 쓰고 싶은     그러나 끝내 바뀔 수 없을[…]

어느 아침의 문장들 외 1편
홍경희 / 2020-10-01
흘러내리는 얼굴 / 김유진

[단편소설]     흘러내리는 얼굴     김유진           나는 물이 된 사람을 알고 있다.       성호를 만난 것은 작년 이맘때였다. 그는 4층짜리 건물의 불법 증축한 옥탑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그곳을 일관되게 작업실이라고 불렀기에 나도 그렇게 부르곤 했지만 그에게 다른 주거지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먹고 잤다. 아침은 주로 레토르트 낙지죽 따위로 해결했고 기분이 나면 후식으로 참외나 사과를 껍질째 먹었다. 나는 종종 개수대 한편에 버려진 과심을 발견하곤 했는데, 씨와 꼭지만 남은 앙상한 모양새를 볼 때면 그가 조금 궁상맞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그의 생활은 대체로[…]

흘러내리는 얼굴
김유진 / 2020-10-01
안녕, V씨? V씨! 외 1편 / 이은주

[신작시]     안녕, V씨? V씨!     이은주       V씨가 오래된 잠에서 깨어났어 뜨거워진 오렌지가 동면을 방해했어 오렌지가 건넨 열쇠는 자물쇠의 암호를 해독하기에 충분했어   누구나 V씨를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V씨를 보지 못했어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힘에 가려져 쉽게 무시되어 버렸어   V씨는 까망, V 씨는 빨강, V씨는 파랑… V씨는 N1, N2, N4… 치명적인 N씨, 무한히 생식 무한히 증식 속수무책으로 폭주, 은밀한 독은 이기의 동굴에서 발아했어   초록을 갉아먹는 날카로운 톱니가 쑥쑥 자라고 있어 초록을 먹어치우는 거대한 입이 몸을 잠식하고 있어 초록을 전소시키는 잘[…]

안녕, V씨? V씨! 외 1편
이은주 / 2020-10-01
두 개의 방 / 문진영

[단편소설]     두 개의 방     문진영           여행에서 돌아온 그를 산타 바바라에서 만났다. 그와 내가 같은 이름을 가진 동네의 1동과 2동에 각각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러니까 저자와 편집자가 아닌 동네 친구로서 처음 만나기로 했을 때, 그는 중간쯤에서 보죠, 하고 말했다. 중간이 어디냐고 내가 되묻자 그는 한번 알아봅시다, 라고 했다. 주말에 전화를 걸어온 그는 내게 준비가 됐느냐고 물었다. 준비 땅, 하듯 그와 나는 동시에 출발했고 나는 2동을 향해, 그는 1동을 향해 걸었다. 걸으면서 수화기 너머로 서로의 위치를 보고했다. 내가 월드 부동산을 지날[…]

두 개의 방
문진영 / 2020-10-01
서로의 곁을 넓혀 가는 이들의 이야기 / 강수환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서로의 곁을 넓혀 가는 이들의 이야기 진형민, 『곰의 부탁』(문학동네, 2020)   강수환       1.     『곰의 부탁』은 진형민 작가의 첫 청소년소설집이다. 사실 우리에게 그는 동화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진형민은 현실 사회에서 쟁점이 되는 사안들을 동화로 녹여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작가로 정치, 경제, 윤리 등등, 어린이의 세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 키워드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과 직결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 왔다. 그러한 이유로 누군가는[…]

서로의 곁을 넓혀 가는 이들의 이야기
강수환 / 2020-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