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데이 오브 준 외 1편 / 선혜경

[신작시]     라스트 데이 오브 준     선혜경       노을을 따라 앉은 네가 있던 곳에서 내가 자라나고 있었다 내가 기어코 살아나고 살아 있어서 우스꽝스러워       누군가 노을을 유화로 그리고 있거든     짓물러진 사과를 주렴       우리는 때때로     불확실한 날씨를 질투하기도 하니까       부엌에 서서     누군가의 저주를 들을 때마다 유리컵에 찬물을 넘치도록 따라 붓는다     타인에 대한 다정하고 적나라한 버릇       아홉 시에 옆집 아이가 공을 들고 너의 선잠을 깨우고 있었어 준, 너는 사랑스럽게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지 그때 나는 가시가[…]

라스트 데이 오브 준 외 1편
선혜경 / 2020-08-01
궤도 밖 고라니 / 이한솔

[단편소설]     궤도 밖 고라니     이한솔           원장은 추석이 다 지난 뒤에야 추석 선물을 줬다. 지금이 11월이고, 올해 추석은 9월 중순이었으니 두 달 조금 넘는 시간이 흐르고 준 셈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안 주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은 원장에게 검정 쇼핑백을 건네받던 순간부터, 집에 돌아온 뒤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았다. 쇼핑백에 상표라도 쓰여 있으면 기대라도 해보겠는데 아무 무늬도 없이 그저 까맣기만 했다. 심지어 투명 테이프로 입구가 꼼꼼히 여며져 있어 안에 든 내용물을 열어 볼 수도 없었다. 집으로 오는 길엔 뭐가 들어[…]

궤도 밖 고라니
이한솔 / 2020-08-01
유실 외 1편 / 김건홍

[신작시]     유실     김건홍           버스가 다시 움직인다. 턴을 하여 이 구간을 빠져나간다. 유연하다. 오늘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린다. 빠뜨린 물건이 없는지 살펴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환한 불빛 아래 그가 서 있다. 밤중에 그를 만나 기분이 좋다. 그에게 하려던 말이 있었는데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와 함께 케이크를 퍼먹는다. 케이크 위의 하얀 장미를 깨트려 먹는다.                               초목으로부터             초목으로부터 고양이가 나타난다.[…]

유실 외 1편
김건홍 / 2020-08-01
기르던 개와 천도재를 외 1편 / 고명재

[신작시]     기르던 개와 천도재를     고명재             네가 땅을 디디며 신나게 달려나가자 내 눈은 황톳길처럼 붉어진다 산에 오니 너는 꽤 즐거워 보인다 여기 살래? 나비는 죄다 여기 모였네 슬플 때 승들은 저걸 그린대 단청이 눈에 푸르게 박히고 나는 단청을 그리는 승의 등을 상상해 본다 능선이 멀리서 뒤척거린다 나의 개가 순간 조용해진다     기르던 개가 화장火葬을 이해 못할 때 아직 불 속에 네가 있는 줄 알 때     너를 태우고 녀석이 불을 핥으려 한다 아직 칼을 핥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리움이 심한 날엔 강변에 간다[…]

기르던 개와 천도재를 외 1편
고명재 / 2020-08-01
태풍을 기다리는 저녁 / 서장원

[단편소설]     태풍을 기다리는 저녁     서장원           태풍이 북상한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유준과 도경이 휴게소에 도착할 때까지 날은 화창하기만 했다. 유준은 태풍의 경로에 대해 이야기 중인 라디오 방송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기상캐스터는 태풍의 진입이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는데, 결국 태풍이 오는지 마는지는 확언하지 못했다. 하기는 저치들은 어제도 틀렸지, 유준은 차에서 내려 탁 소리 나게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어제의 예측대로라면 유준과 도경은 지금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하늘은 맑았고 바람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햇살이 따갑게 느껴질 만큼 화창한 날이었다.     “나 오래 걸려.”[…]

태풍을 기다리는 저녁
서장원 / 2020-08-01
풍경을 다시 크롭하기 2 / 민경환

[본격! 비평] 지난 몇 년간 비평의 영역은 리뷰나 서평 등 '쪽글'의 형태로 축소되어 왔다. 폭넓은 담론을 펼칠 장이 부족하고 비평적 공론화, 활발한 논쟁 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비평의 형태는 무척 다변화되고 있기도 하다.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분석을 하는 행위를 넘어 비평적 기획, 조직 등 새로운 시도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문장웹진》은 웹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공적 지면이라는 점을 활용해 '본격비평'의 장을 열어 보려 한다. 분량의 제한 없이 정액의 원고료로 자유롭게 투고를 받아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     풍경을 다시 크롭하기 2     민경환       “그런[…]

풍경을 다시 크롭하기 2
민경환 / 2020-08-01
잭슨 폭포에서 온 영수증 / 박세회

[단편소설]     잭슨 폭포에서 온 영수증     박세회           시월의 교정엔 맑은 햇살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흘렀다. 확실하진 않지만, 출근할 때 보니 딱 그런 날씨일 것 같았다. 이런 날씨에 산책을 하면 피부가 참 기분 좋게 마를 텐데. 이런 날씨에 학교 뒤 숲을 거닌다면 참 좋을 텐데. 그러나 그런 건 다 현재 사실에 반대되는 일을 상상해 보는 가정법 과거의 공염불일 뿐이다. 내가 만약 날씬했다면 다이어트를 할 필요가 없겠지. 내 지도교수가 우리 엄마 친구였다면 학위를 따기가 좀 더 쉬웠겠지. 프로젝트를 맡지 않았다면 학교 뒤 숲을 거닐 수[…]

잭슨 폭포에서 온 영수증
박세회 / 2020-08-01
서로의 것 외 1편 / 이원석

[신작시]     서로의 것     이원석           우리는       맞잡은 손을 바이트로 조이고     구리관들이 촘촘히 자란 B1숲을 걷는다     텅빈 관은 저음으로 운다 1구역에서 44구역까지     푸른 녹이 자욱하다 이 길을 산책하고 싶다고     넌 몇 번이나 그러고 싶다고 말했지       우리가 서로를 떼어 놓고 싶을 땐     자기 손목을 자르기로 하자 그러자     난 쇠톱으로 천천히 자를 거야 과정을 모두 감각할 수 있게     넌 도끼로 단번에 결별한다고 했지 하지만 그전에     몇 번 더 조이면 우리 손목이 견디지 못하고 끊어지지[…]

서로의 것 외 1편
이원석 / 2020-08-01
램프 이야기 외 1편 / 임효빈

[신작시]     램프 이야기     임효빈           그린란드 이누이트족은 성자처럼 산다지 삼백예순다섯 날 물개 기름 램프를 켜놓은 이글루는 성전이 된다지 그을음 없는 어깨와 어깨를 비벼 체온을 지핀다지 성전의 눈꺼풀을 열고 입김을 뱉어내면 난기류도 기침을 멈춘다지 스스로 날것이라 여겨 어느 것도 익히지 않는다지 천천히 혹한의 뿔을 살피고 두 손을 모아 기다릴 뿐 벗겨질 가죽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지 물개 기름 램프는 꺼지지 않을 침묵만 피운다지 그림자를 태워 불꽃의 심장을 만든다지 한 사람의 그림자가 다 탈 때까지 생각의 재를 쓸 방법에 대해서 고민한다지 고민의 시간이 쌓여 이글루 안은[…]

램프 이야기 외 1편
임효빈 / 2020-08-01
불가능한 문법 / 전미경

[단편소설]     불가능한 문법     전미경           조가 얇은 겉옷을 챙겨 들었을 때 그는 막연히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여름의 해는 길었다. 어느 날은 저녁 여덟 시에도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다. 조는 그 햇빛을 직접 만끽하기보다는 창틀에 기대어 보는 것을 선택하곤 했다. 얼굴은 커튼 뒤에 숨기고 팔이나 종아리, 허벅지를 뜨겁게 데우거나 산만한 날벌레들이 몸 위에 앉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도 했다.     그가 창밖을 보며 마지막 자두를 씹어 삼키는 동안, 날벌레 몇 마리는 재밌는 파티를 벌인 듯했다. 조가 뱉은 자두씨에 과육이 충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끈적한[…]

불가능한 문법
전미경 / 2020-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