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콜리들의 숲 외 1편 / 이연희

[신작시]     브로콜리들의 숲     이연희           브로콜리 상자를 안고 너는 돌아온다       상자 속은 작은 숲이다       우리는 서로를 숲이라고 믿는다     바람과 홍수를 막고 짐승들이 새끼를 기르는     자연스러운 밤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따뜻한 오해가     거위 털을 넣은 이불처럼 우리를 재운다       다리에 다리를 얹고 손바닥에 손바닥을 포갠 채로     뜨거운 물속으로 아니 미지근한 잠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눈을 뜨면 사라질       벌목꾼들의 고함소리     나무를 자르는 전기톱 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아득하게 자란[…]

브로콜리들의 숲 외 1편
이연희 / 2019-12-01
무서운 입 외 1편 / 고선주

[신작시]     무서운 입     고선주           혓바닥도 없는 놈이     입을 벌렸다     출렁거리는 호수의     밑바닥 드러날 때까지     마셔버리겠지만     아껴서     나눠서     쪼개서     들이부었다       캔에 호수를 담았다     어찌나 마셔 보고 싶던지     냉동창고에서 꺼내     뚜껑을 따는 순간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호수가 넘쳤다       평생 홍수에 맞닥뜨린 삶,     BTS(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처럼     쩔었다.                             마감시간  […]

무서운 입 외 1편
고선주 / 2019-12-01
휴거 / 박송아

[2019 청년예술가 생애 첫 지원/중편소설]     휴거     박송아       *       소녀는 집 안의 전기가 나가고 나서야 비가 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시야를 덮친 새까만 광경 속에서 빗줄기가 지면을 때리는 소리만이 선명했다. 예고가 없었던 비 소식에 소녀는 무심코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전화와 인터넷 모두 연결이 끊겨 있었다. 정전이 되면서 통신망에 장애가 생긴 것 같았다.     그때 오른편에서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깜깜해졌어?     소녀는 고개를 돌렸다. 파랗게 빛나는 수조 앞에 꼬맹이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집 거실 한구석에 비치된 수조에는 보조배터리가 연결되어 있어서 정전의 영향을[…]

휴거
박송아 / 2019-12-01
금속성(제1화) / 민병훈

[2019 청년예술가 생애 첫 지원/중편소설]     금속성(제1화)     민병훈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조수와 상의했다. 조수는 홍보를 하자고 말했다. 조수는 언제부턴가 자신을 조수라고 부르라 했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일을 배우지도, 돕지도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서만 분명한 기준으로 행동한다. 혹시 이름이 조수냐고 물어보려다가 관뒀다. 나는 조수의 눈치를 많이 본다. 대부분 그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조수는 웃음이 없고 장난이나 농담도 통하지 않는다.       홍보는 간단하게, 폐지 뒤에 위치와 번호를 적어서, 여기저기 붙이면 된다고 했다.[…]

금속성(제1화)
민병훈 / 2019-12-01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외 1편 / 김언

[신작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언           아침부터 그녀는 무언가에 골똘하다.     무언가 좋지 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한데,     말을 하지는 않는다. 무언가 좋지 않은 표정만 보일 뿐     표정 뒤에서 무슨 일을 떠올리고 있는 것인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물어보지도 않았다.     식탁에 앉아서 내내 골몰하던 그녀가     갑자기 방으로 가더니 훌러덩 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서 샤워기 물소리를 내고 있다.     샤워를 하면서도 무슨 생각을 할 것이다.     무슨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외출하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외 1편
김언 / 2019-12-01
백년의 책 / 김인숙

[단편소설]     백년의 책     김인숙       🔊 KBS 라디오 문학관에서 오디오북을 만나볼 수 있어요             지금도 가끔 기억이 난다. 쥐들이 살던 지하실. 바닥을 뛰어다니고 벽을 기어오르는, 밤마다 그토록 부지런해지던 쥐들, 갉아대는 소리들, 속삭이는 소리들, 의논하는 소리들······. 그리고 스며드는 비를 바라보던 까만 눈동자들······. 자,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갈까. 엄마와 아버지와 내가 그 지하실의 방으로 들어가던 날, 쥐들은 어쩌면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디로 가기보다는 차라리 이 인간들을 내쫓아버리기로.       그해에 나는 열다섯 살이었다. 두 번째 열다섯 살이 되는 해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백년의 책
김인숙 / 2019-12-01
파도가 온다 외 1편 / 박순호

[신작시]     파도가 온다     박순호           절벽에 가로막혀 되돌아오는 파도는 길을 잃었다     해풍은 해송을 뒤틀리게 만들며     손이 닿지 않는 등뼈 안으로 전이된다     나는 파도 채찍에 얼굴을 묻은 모래밭에도     건강한 날씨와 기쁨의 얼룩이 있다고 여겼지만        껴안고 있는 것들을 버리지 못한 내내     작은 창문이 달린 쪽방에서 사나운 꿈을 가져야만 했다     피곤함은 귓속에 죽은 귀뚜라미를 불러들이고     잇몸에선 하얀 돌조각이 끝없이 기어나온다     어정쩡 머뭇대기만 하는 행복처럼     쌓고 또 쌓아 둔 비밀처럼     이비인후과를 나와 치과에 들러 처방전을 받아[…]

파도가 온다 외 1편
박순호 / 2019-12-01
대물림 외 1편 / 박영민

[신작시]     대물림     박영민           물려받은 난간을 예상할 수 있다면     내 잘못은 아니지요       불만 많은 계단이 삐걱거리고     발목에 옮겨 붙은 긴 울음이     베란다 난간 밖으로 탯줄을 엮고 있어요       시멘트가 응고되지 않은 밤하늘,     적도를 지나온 사막에는     삐뚤삐뚤 빼닮은 통증들이     야생부추만큼 무성해요       베어내도 뿌리 뽑을 수 없는 모래바람이     쉼 없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요       뻥 뚫린 비탈을 떠맡은     새 허공이 옮겨 심어지고 있어요       돋아나는 빈손을 흔들며     부푼 수식어를[…]

대물림 외 1편
박영민 / 2019-12-01
이남동 터미널 / 김혜진

[단편소설]     이남동 터미널     김혜진           그녀는 터미널 앞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그 전화를 받았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고 주변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팔차선 도로는 고속버스와 시내버스, 택시와 자가용이 뿜어내는 불빛과 소음으로 빼곡했다. 눈을 찌르는 듯한 환한 전조등 탓에 그녀는 자주 눈을 비볐고 그때마다 눈앞의 풍경이 울긋불긋하게 뭉개졌다.     사거리 한가운데 서 있던 경찰이 수신호를 했다. 한꺼번에 길을 건너려는 사람들 틈에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향을 가늠하고 걷기 시작했다. 호루라기 소리와 말소리, 발소리 같은 것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초겨울의 차고 날선 공기가 주변의 아주 가느다란 소음들까지[…]

이남동 터미널
김혜진 / 2019-12-01
12월호 / 박연미

[커버스토리] ※ 기획의 말 2019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후5     박연미           최진영, 「후5」(«문장 웹진», 11월호)를 읽고.   이지연이 이지현을 문득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살면서 종종 그런 순간들을 맞는다. 상처 입었다고 생각했지만 상처를 줬고 어두웠지만 반짝이던 순간들이 있었다. 다정했지만 뾰족했고 접고 싶지만 잡고 싶은 시절이기도 했다. 일상에서 마주친 순간에[…]

12월호
박연미 / 2019-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