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먹는 것에 대하여 외 1편 / 장석남

[신작시]     먹는 것에 대하여     장석남           이야기는 끝이 없고     농담처럼 죽순이 자라나는 뜰에서,     저것까지도 먹는 것이라니       온갖 곳에서 쩝쩝이며     먹는 것을 찬양하노니     겨우 먹힐 것에서 벗어난 죽순은     배와 허리와 어깨에서     팔다리가 돋아 나오고 잎이 나오고 거기     바람 소리 새소리를 모아     고매한 정신이 되어     먹는 것에 대하여 질타해 다오       제발 좀 숨어서 먹어 다오                             열쇠    […]

먹는 것에 대하여 외 1편
장석남 / 2019-06-05
마른 익사 / 이수진

[단편소설]     마른 익사     이수진           길이 굽이칠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자칫 가드레일을 들이받을 것만 같아 오른다리가 떨렸다. 먼저 지나가길 바라며 속도를 줄이고 깜빡이를 켜자 숙부의 차가 기다렸다는 듯 바퀴를 틀었다. 노면을 긁으며 중앙선을 넘은 하얀색 승용차가 내 차를 훌쩍 추월했다. 삼십 년도 넘게 오가던 길이니 어려울 것 없다 호언장담한 것치곤 우스운 꼴이 된 셈이었다. 운전자와 승객의 시야는 확연히 달라서 내가 볼 수 있는 건 한 치 앞 정면뿐이었다.     면허를 딴 뒤로 시도하는 첫 번째 장거리 운전이었다. 주황빛이 도는 작은 포클레인을 짐칸에 실은[…]

마른 익사
이수진 / 2019-06-04
무덤공방으로 오세요 외 1편 / 김효은

[신작시]     무덤공방으로 오세요     김효은           내 머리 위 무덤공방으로     놀러오세요     풍성한 인조 잔디로     싱싱한 초록 떼를 입혔어요     최신식 스테레오 장착     계절에 걸맞은 노래가 쉼 없이 흘러나와요     태엽 감은 새들이 날아와 정겹게 인사해요     한참 동안 이국의 언어로 지저귀다 가요     절름발이 바람이 걸터앉았다가 가고요     자못 뜨거워진 애꾸눈 햇살은     능선을 타고 내려와     편향된 시선의 열기를 식히고 가죠     바람둥이 구름은 자주 바퀴를 스페어로 갈아 끼우고요     엔진 오일이나 브레이크 오일을 날마다     정비하고 갑니다    […]

무덤공방으로 오세요 외 1편
김효은 / 2019-06-01
이유가 있다 외 1편 / 김호성

[신작시]     이유가 있다     김호성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 삶이란 그 자신이다 그리고 유일한 소통은 그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그래서 올바른 길로 접어드는 대신 떨어진 귓바퀴를 모은다 버림받은 것보다 객관적인 것은 없다 스스로의 수치스런 기억보다 사적史的인 것은 없다 어차피 학살자들은 누군가를 먹여 살리는 일에 감흥이 적고 그 밑에서 학자들은 이유를 찾는다 물렁해진 정강이뼈나 그 이후의 무릎을 떠올린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생고기들을 막아낼 수 있는 우산이 펼쳐지지 않는다 허울뿐인 유희만으로 웃을 수 있는 연기력도 모자란다 그런 모습으로 당신의 귀를 간지럽힌다 거리를 맴도는 바람이 나를 깊은 예언의[…]

이유가 있다 외 1편
김호성 / 2019-06-01
마법책을 받은 날 외 1편 / 김이듬

[신작시]     마법책을 받은 날     김이듬           천사가 선물한 마지막 기회라는 말을 들었다.       좌표를 보며 내가 개펄을 찾아간 것은 늦여름이었다.       여름은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는 샌들을 벗어 둔 채 펄로 들어갔다. 허벅지까지 펄에 푹푹 빠졌지만, 조금 더 외진 곳 깊숙이 추적하다 보면 보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래블 버그의 최종 위치는 수평선 너머로 확인되었다.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폭격을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햇빛을 걷어차며 해변을 걸었다.     나는 옆으로 걸어 너를 만났다. 너는 읽던 책을[…]

마법책을 받은 날 외 1편
김이듬 / 2019-06-01
노란 애벌레가 좋아 외 1편 / 이재훈

[신작시]     노란 애벌레가 좋아     이재훈           무리를 소개하는 땅에서 바닥에 엎드려 흙냄새를 맡습니다. 콧속에서 흙이 뒤범벅됩니다. 제겐 창조가 있습니다.       슬픔이 죄가 되어 눈을 찌릅니다. 질문이 없고 관념만 남았습니다. 세상 모든 종류의 기도가 머릿속에서 꿈틀댑니다.       왜 쫓아가지 않았을까요. 왜 옮기지 못하고 말만 했을까요.       무릎을 꿇고 뱃속에 가득한 허기를 노래했습니다. 제게도 노래가 있습니다. 흙이 알고 물이 알고 미천한 생물이 아는 소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질투의 악수를 청했습니다. 간혹 믿지 않는 참상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늘 공중을 향해 소리[…]

노란 애벌레가 좋아 외 1편
이재훈 / 2019-06-01
무제 / 곽다혜

[글틴스페셜]     무제     곽다혜           열일곱, 17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들 말하는 3년의 시작점. 달려야 하는 순간들만을 앞에 두고 나는 퍽이나 무력감에 젖어 있었다. 다들 그렇지 않을까.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확실히 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희망찬 꿈과 현실, 그 경계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해준 것은 특별히 더 거창한 것도 아닌, 지금에서야 말하는 나의 기억이다.       '검문 있겠습니다. 성인은 신분증 제시해 주시면 됩니다.'     사진으로만 본 DMZ, 실감나지 않았던 곳. 우리가 분단국가라는 것을, 아직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은 통일대교 위에서[…]

무제
곽다혜 / 2019-06-01
멍게 부케 폴리시 / 고민실

[단편소설]     멍게 부케 폴리시     고민실           손톱이 하나 비었다. 세이는 혀를 움직여 입안을 훑었다. 젓가락으로 봄동을 뒤적였다. 혀의 예민한 촉각에도 젓가락의 섬세한 움직임에도 걸리는 게 없었다. 된장에 무치기 전이었을까 후였을까, 검지에서 네일 스티커가 사라진 것은.     반찬이 떨어져 시장에 들렀다가 봄동까지 사왔다. 끝물인 줄 알면서도 꽃샘추위가 한창이니 아직 괜찮지 않을까 하는 셈이 있었다. 오산이었다. 데쳐 놓자 단맛도 없고 질기기만 했다. 비닐 재질의 네일 스티커를 같이 씹어도 모를 정도로. 만약 무사히 식도를 넘어갔다면 지금쯤 위산의 바다 속에 가라앉고 있겠지. 세이는 입을 오물거리며 봄동을 마저[…]

멍게 부케 폴리시
고민실 / 2019-06-01
나무인간 증후군 / 변미나

[단편소설]     나무인간 증후군     변미나       🔊 KBS 라디오 문학관에서 오디오북을 만나볼 수 있어요             여름 내 Y시에서 일어나게 된 그 일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은 쉰 살의 남자였다. 그날 저녁, 남자는 일주일째 지속된 장마가 끝나 미뤄 뒀던 운동을 하기 위해 중앙공원을 찾았다. 남자는 여느 때보다 상쾌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향해 걸었다. 비는 다음날 정오까지 내리지 않을 전망이라고 했지만 남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우산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십여 분쯤 걸어 공원에 도착한 남자는 공원 입구에 있는 벤치에[…]

나무인간 증후군
변미나 / 2019-06-01
겨울의 찬란, 봄의 도래 / 박성경

[글틴스페셜]     겨울의 찬란, 봄의 도래     박성경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게 치열한 곳, 이기를 모르는 생명들이 자정작용을 마치고 인간의 화해를 기다리는 곳, DMZ 남방한계선에서 2km 가량 떨어진 파주 캠프그리브스. 나는 그 곳에서 사흘을 보내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화를 깊이 생각했다.       시작은 포스터에 적힌 신철규 시인의 이름이었다. 파란 표지가 꼭 눈물을 가득 담은 것 같은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에 실린 시인의 말, '숨을 곳도 없이 / 길바닥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이 / 더는 생겨나지 않는 세상이 / 언젠가는 와야 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 나는 이[…]

겨울의 찬란, 봄의 도래
박성경 / 2019-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