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있던 풍경의 신과 잠들지 않는 거인 / 우다영

[단편소설]     당신이 있던 풍경의 신과 잠들지 않는 거인     우다영           노란 나무 벽과 바닥을 가로지는 몇 줄기 빛. 나는 따뜻하고 밝은 곳에서 그늘로, 고요한 어둠 속에서 다시 빛이 있는 쪽으로 걷는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나의 행로에도 빛과 어둠이 만들어낸 곧고 선명한 줄무늬가 뒤섞이거나 훼손되지 않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면서. 부드러운 그물처럼 촘촘하게 몸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언제나 빛과 어둠이라는 놀라운 진실에 서서히 무감해지면서. 어쩌면 이것은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이고, 나는 이 순간이 내가 살아갈 삶 전반을 의미하며 작동시키는 신의 중요한 계시가[…]

당신이 있던 풍경의 신과 잠들지 않는 거인
우다영 / 2019-04-08
시간의 모양 / 배미주

[글틴스페셜-청소년을 위한 SF소설]     시간의 모양     배미주       럭키문방구       그 소년이 우리에게 온 덕분에, 리-다비트 구에 대한 우리 연구는 다시 희망을 보았다.       우리 셋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럭키문방구가 문을 닫은 걸 알았다.     럭키문방구는 우리 초등학생 때 만남의 장소였다. 밖에 오락기가 있어서 약속시간보다 좀 늦게 가도 마음이 편했다. 중학생이 된 뒤로는 만남의 장소가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야, 왜 문 닫았대?"     태영이가 아쉬워했다. '폐업정리' 종이가 색 바랜 채 붙어 있었다. 오늘 초여름치고 더워서 럭키문방구에서 파는 오백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먹자고 오지 않았으면 문[…]

시간의 모양
배미주 / 2019-04-01
봄의 연인과 방아쇠 외 1편 / 윤여진

[신작시]     봄의 연인과 방아쇠     윤여진           당신은 천천히 파묻던 고개를 든다 천진하게 입가에 매단 물방울, 어느 저녁 옮아온 빛깔을 떨어트리면 당신의 입 꼬리를 쓰다듬을 수 있다 당신은 입을 벌렸을 뿐인데 탕, 신호가 터지고 도는 피를 뒤집어쓴 채 뛰어나가는 것이 있다       수풀이 활짝 열리고 그것이 달아나는 동안 피어오른 연기는 가볍게 찢긴다 끼얹던 물소리가 범벅인 채로 방금 당신의 입 꼬리는 무엇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오른손은 수풀을 헤치고 왼손은 뒤로 감추는, 번갈아 먹는 다짐이란 몸 안의 커다란 풍선을 띄우는 것 그러다 팽팽해진 줄을[…]

봄의 연인과 방아쇠 외 1편
윤여진 / 2019-04-01
쉼보르스카는 모른다 외 1편 / 김명기

[신작시]     쉼보르스카는 모른다     김명기       쉼보르스카를 읽는 밤. 절정이 지나도록 피지 않는 능소화와 때가 되기도 전에 피어버린 배롱나무 꽃을 생각한다. 끝과 시작 사이, 어긋난 꽃처럼 때를 찾아낸다는 건 무모한 짓이다. 태풍이 오고 비바람이 쳐도 방 안에선 선풍기가 돌아가고, 나는 어떤 말에 따옴표를 쳐야 할지 모르겠다. 꽃이 피고 지는 이치를 모를 리 없지만 모른다. 두 번이 없으니 세 번과 네 번도 없겠지. 당신의 시는 너무 합당하고 인간적이라서 때로는 실망스럽다. 희망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 희망을 얘기하는 건 기만일 뿐. 저버린 희망들이 뜨거운 한낮을 피해 어깨[…]

쉼보르스카는 모른다 외 1편
김명기 / 2019-04-01
원인 / 민병훈

[단편소설]     원인     민병훈           너는 옷을 태운다. 밤의 해변에서, 불에 그을린 종아리가 파도에 씻길 때까지, 뛰고, 바닷물을 마시고, 도망치듯,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수평선이 지퍼처럼 열리자, 지금이, 계절이 바뀌는 순간이라고, 창문 하나 없는 호텔을 상상해 보라고, 소리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옥상에서 솟구친 미래가, 널 울게 만들 때, 너는 고동소리를 듣는다.       1999년 3월 24일.     풀이 무성한 운동장. 녹색 빗금 사이를 헤치는 연속적인 감각들. 너는 아득하게 흐려지는 정문 너머의 오르막길. 오르막길 끝의 하얀 집. 너는 동급생들보다 먼저 교실 창문을 열었고 칠판에 번진 흔적을 바라보며[…]

원인
민병훈 / 2019-04-01
더 레드 / 윤예원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소설]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대상-더 레드     윤별(윤예원)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체온 사이의 서사를 옮겨 적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풍경을 글로 묘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써넣은 낱말이 이 세상에서 부드럽게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그러면 어떤 세계에서든 언제나 가장 먼저 멸종할 단어는 빨강이다.   *       피터, 하고 부르면 빨간 베레모를 쓰고 벤치에 앉은 203이 익숙하게 돌아본다. 그게 낯설어 나는 못내 아쉬운 투로 203을 발음했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피터, 하고 입술을[…]

더 레드
윤예원 / 2019-04-01
검은색과 흰색 외 1편 / 이성진

[신작시]     검은색과 흰색     이성진       원래 없는 색은 검은색인가 흰색인가   일단 보기로 한다 안경 너머 걸어가는 사람들을 본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 너무 많다   사실 그건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건물로 눈을 돌린다   한 사람은 아프고 다른 한 사람은 침대를 서성이고 나머지는 웃음이다 가깝지 않게 옆에 있다   나는 한 사람일까 웃음일까   기억으로 간다 밤 고속도로 휴게소 떠도는 자동차의 마음과 대학 동기들 졸업 그리고 나만 읽었던 표정들 다시 들을 수 없는 눈빛들과 수많은 한 장면들 다시[…]

검은색과 흰색 외 1편
이성진 / 2019-04-01
‘법의학(강대영 외)’ 239쪽 우측상단 사진 10-27 / 조유진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최우수상 수상작/시]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최우수상 – '법의학(강대영 외)' 239쪽 우측상단 사진 10-27     곧(조유진)       준아, 내가 아는 세상의 다른 모든 준에게는 또다시 세상에 한 사람의 준이 사라졌다고 차마 말해줄 수가 없어 오늘은   아아 그래 너의 부고는 아홉 사람을 거쳐 비로소 나에게로 전해졌구나 너에게 맞는 옷 또한 이 세상에는 부재하여 너는 존재하지 않는 몸을 공허로 감싼 채 매트리스 없는 침대 위에 뉘였다 그들의 카메라는 너의 부재를 촬영할 수 있었으나 이미 휘발하여 바람에 섞인 너의 언어는 차마 해독할 수 없었으므로 너의 육신은 기록되어지나[…]

‘법의학(강대영 외)’ 239쪽 우측상단 사진 10-27
조유진 / 2019-04-01
콧수염, 없는 인간 / 이상희

[단편소설]     콧수염, 없는 인간     이상희           『내용 없는 인간』을 꺼내려고 가방을 열었는데 엉뚱하게도 『콧수염』이 들어 있었다. 파리 행 비행기 안이었다. 두 책 모두 하얀 바탕에 검정 글씨가 적힌 단순한 디자인이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가방에 책을 넣을 때 다시금 제목을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반사적으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이 부리부리한 남자였는데 고골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가 어느 틈엔가 『내용 없는 인간』을 가져가고 거스름돈처럼 『콧수염』을 넣어 둔 후에 『고골 단편집』 뒤에 얼굴을 숨기고 있을 리가. 나는 한숨을 내쉬고 멍청히 표지를 쳐다보다가 책을[…]

콧수염, 없는 인간
이상희 / 2019-04-01
등껍질 속 가족 / 오태연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소설]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 등껍질 속 가족     잇몸(오태연)           할머니는 내가 태어난 게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너는 돌다리 밑에서 주워 온 거야.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지. 네가 강에서 떠다니는 걸 네 애비가 주워서 집 앞에 놓고 갔어. 그게 끝이야.     할머니가 술과 한 뭉텅이의 약을 왕창 먹고 식탁으로 올라가 손을 번쩍 들고는, 하나님 아버지! 하고 울부짖었다. 나는 엄마와 배를 잡고 웃었다. 킥킥, 움직이는, 움직이는 텔레비전이야. 엄마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속삭였다. 엄마의 입김이 귀에 닿자 알코올과 약방의[…]

등껍질 속 가족
오태연 / 2019-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