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 회상 / 양선형

[글틴 스페셜-글틴 출신 작가 초대석]       글틴 회상     양선형           글틴에 처음 가입했을 때 내 나이는 열여덟이었다. 나는 열일곱 여름 고등학교를 그만두었으며, 기나긴 잠, 그리고 잠보다 더 지루하게 계속되는 무기력한 기분 속에 빠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청소년기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내게 청소년기는 무기력과 권태, 소파 위에 누워 뭔지 모를 불만으로 뒤척이는 나날들을 환기시킬 따름이다. 나는 종일 영화를 보거나 제자리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가끔 산책을 했으며 일주일에 한 번 친구들을 만나, 이 불쌍한 고등학생 놈들, 이죽거리며 반나절에 이르는 수면 시간이나 궤도를 완전히 잃어버린[…]

글틴 회상
양선형 / 2019-01-03
음험하게 숭고한 사랑 / 오혜진

[문학 더하기+(소설)]       음험하게 숭고한 사랑 ─ 소설 『우리가 통과한 밤』(기준영, 문학동네, 2018)*과 영화 (정주리, 2014)       오혜진(문화연구자)             작년 가을에 출간된 기준영의 장편소설 『우리가 통과한 밤』의 표지를 한참 들여다봤다. 최근 많은 '여성 소설'이 그렇듯, 이 책의 표지 역시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여자 두 명의 '뒷모습'을 택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얼굴 없는, 검은 긴 머리에, '표준' 혹은 다소 마른 체형의 여성-형상들이 '여성 서사 강세'라고 적힌 한국 문학 매대를 장악하고 난 후, 더 이상 내게 '뒷모습'은 독자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이미지는[…]

음험하게 숭고한 사랑
오혜진 / 2019-01-03
석류가 익는 계절 외 1편 / 김은경

[신작시]     석류가 익는 계절     김은경       "우리의 겨울은 당신의 여름보다 뜨겁다" 지난겨울 에스모텔에 내걸렸던 현수막이 여태 펄럭인다 철 지난 것과 철모르는 것들이 여름을 뒤집어쓴 채 엉켜 있다   오십 원짜리 동전처럼 주울까 말까 고민하는 기억들이 매일 늘어 간다 목 늘어난 셔츠가 서랍에 쌓여 간다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을 어떻게 구분하는 겁니까 누구에게 물을 수라도 있다면   거두는 이 하나 없는 열매의 무색함처럼 한없이 붉기만 한 석류 시어 빠진 앵두처럼   – 우리의 여름은 대체 뜨겁기라도 하였습니까?   마흔 번 살아 본 여름인데도[…]

석류가 익는 계절 외 1편
김은경 / 2019-01-01
도플갱어 / 김신식

[문학 더하기+(시)]       도플갱어       김신식             집 창문을 본 지 오래되었다. 관리실에서 작성한 공고문을 본 게 발단이었다. 공고인즉슨 비바람이 부는 날 창문을 열어 놓으면 떨어질 수 있으니 되도록 닫아 놓으라는 것이었다. 경고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난 유리창 사진이 게시된 걸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언젠가부터 에어컨 실외기 창이 창문을 대체했다. 공기청정기를 들였고 암막커튼을 달면서 창문으로 바깥세상을 볼 일이 점점 줄었다. 좀처럼 창문을 볼 일이 없으니 창문을 다루는 기록물을 보면 어색했다. 창문이 나오는 작품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가 등장인물의 긴 이름이 헷갈려 이전[…]

도플갱어
김신식 / 2019-01-01
관조의 삶 / 천정완

[단편소설]     관조의 삶     천정완           구관조, 그의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 줬다. 지혜로 세상을 비추어 보라는 뜻이 있었지만, 남의 말만 잘 따라해도 밥은 먹고살 수 있다는 의미였다. 관조는 '적당히 맞춰 살다가 조용히 가자.'라는 가훈 아래 큰 저항 없이 살았다. 그래서 그를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특이했다는 것밖에 딱히 그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관조의 집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집안이었다. 고조, 증조부에서 조부와 아버지까지. 높은 직책까지 올라간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 정년을 채우고 은퇴했다. 관조의 아버지는 종종 스스로를 국가를 위한 작은 부품이라고 표현하곤[…]

관조의 삶
천정완 / 2019-01-01
독자모임 – 책방곡곡 제주 시옷서점 1편 – 시 쓰기 좋은 제주도에서 / 현택훈 외

[독자모임-책방곡곡]   ※ 기획의 말 2019년 독자모임 코너 [책방곡곡]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의 독립서점들을 방문하고, 그 지역의 문인 및 독자의 목소리를 청취하고자 합니다. 각 지역의 문학 생태계와 특수한 현안들이 곳곳에 계시는 독자들에게 서로 공유되어, 사유와 비평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주 시옷서점 1편 – 시 쓰기 좋은 제주도에서     사회 : 현택훈(시인) 참여 : 안민승(사진작가), 홍임정(소설가), 김진철(제주대 강사, 동화작가), 허유미(시인), 김신숙(시인)               현택훈 : 제주의 문화가 생산보다는 소비에 치중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현장과 문화가 분리되어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제주의 작가들이 과연[…]

독자모임 - 책방곡곡 제주 시옷서점 1편 – 시 쓰기 좋은 제주도에서
현택훈 외 / 2019-01-01
섬 외 1편 / 최지인

[신작시]     섬     최지인       바위 위 사마귀 바위색 사마귀 그것들 뒤로 그림자 나는 벌써 백발이 되었다   그날 운세는 이러했다 쪽배가 큰 파도를 만나 예상치 못한 일로 변고를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 불의를 행하지 마라   트럭을 피하려다 벽에 차를 박았다 보조석 범퍼가 깊게 파였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어제는 저녁에 한강 공원을 걸었다 죽은 지렁이들을 보았다   실패한 사랑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괜찮은 변명거리다 누구나 실패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다   형광봉을 흔드는 한 사람과 참 캄캄한[…]

섬 외 1편
최지인 / 2019-01-01
오리진 / 김희선

[단편소설]     오리진     김희선           교황청의 깊고 어두운 지하에 둥글고 오래된 나무 탁자가 놓여 있는 비밀스런 회의실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아마 아무리 많아 봤자 열댓 명 정도? 그들은 모두 바티칸에서 중요한 직책을 수십 년째 맡아 온 '몬시뇰'이라 불리는 최고위 성직자들이며, 교회의 중요한 일에 대하여 교황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대단한 권한을 가진 추기경들이다. 탁자는 투박하고 아무 꾸밈없는 디자인에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해진 표면을 가지고 있는데, 전해 오는 전설에 의하면 오래전 베드로가 여기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신에게 기도를 올린 적이[…]

오리진
김희선 / 2019-01-01
당신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 장은영

[문학 리뷰(시)]       당신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 리뷰) 이민하, 「누드비치」(문학동네, 2018, 가을호), 양안다, 「deja vu」(현대시, 2018, 10)       장은영         1       아시다시피 오늘날 시의 곤란함은 언어의 '바깥'을 언어화하려는 데 있다. 예술의 통념에 저항하면서 출발한 현대 예술이 재현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파울 클레) 만들고자 했던 것처럼, 그것의 한 장르로서 시는 언어를 매개로 언어를 초과하는 역설 위에서 이전 시대를 넘어섰다. 그렇게 도달한 오늘의 시 쓰기란, 언어의 상징적 의미를 해체하는 데서 나아가 재현의 논리를 거부하며 조직화 되지 않은 감각의 잠재성을[…]

당신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장은영 / 2019-01-01
잔 외 1편 / 하상만

[신작시]     잔     하상만       혼자 앉아 있는 것보다 옆에 커피 잔이 놓여 있으면 덜 심심하다 아는 할머니 한 분은 헤이즐넛 커피를 해질녘 커피라고 한다   해질녘   그게 더 예뻐서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모르고 사는 삶이 더 아름답다 하늘에서 하얗게 내린 눈이 쌓여서 어떻게 푸른 빙하를 만들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세상을 신비롭게 만든다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면서 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삶을 사랑한다 영원히 궁금해 할 수 있는 삶   내게 모든 진실이 필요한 건 아니다      […]

잔 외 1편
하상만 / 2019-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