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돌 외 1편 / 유희경

[신작시]     가벼운 돌     유희경       그것은 안주머니에 있었다 퍽 오래된 외투에 달린 그 주머니는 늘 비어 있다 가을이 지나고 다시 이 외투를 꺼내 입었을 때에도 비어 있었다 아무것 없구나 지난겨울도   나는 안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낸다 이것은 단단하지만 뜻밖으로 가벼워서 어쩌면 단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닷가에 있었다 바닷가에서 여기까지 와서 이것이 되었다 이것은 가벼운 돌이다   바닷가에서 나는 그것을 찾았다 바닷가에서 내가 찾고 있던 것은 주워올 어떤 것이었다 바닷가에서 우리는 주워 올 어떤 것을 찾게 되지 그것은 조개껍데기이거나 한 움큼 모래이거나 말라죽은 불가사리가 되기도 하고[…]

가벼운 돌 외 1편
유희경 / 2018-02-01
파도 / 김유진

[단편소설]     파도     김유진           연정은 재래시장에서 삶은 유채 나물과 연근, 두부 한 모를 샀다. 갓 튀긴 방울 어묵도 조금 사고 싶었지만, 참았다. 연정은 어묵을 에워싼 채 자글대는 누런 기름을 멍하니 바라보다 뒤를 돌았다. 기껏해야 삼천 원인데. 연정은 스마트폰의 메모장 애플리케이션을 열었다. 얼마 전부터 장을 보러 가기 전에 필요한 물품을 적어 두고 그 외의 충동구매는 자제하고 있었다. 연정의 머리에 이제 막 갚기 시작한 아파트 대출 이자와 차 할부금이 떠올랐다. 연정의 남편은 두 달 전 연정을 설득해 제네시스로 차를 바꿨다. 영업사원한테 차는 백그라운드 같은 거야.[…]

파도
김유진 / 2018-02-01
성냥과 새와 사자 외 1편 / 이문숙

[신작시]     성냥과 새와 사자     이문숙       창살에 바짝 붙어, 살짝 코 빠진 스웨터 같은 목소리로 홍알홍알 우는 '붉은머리성냥새'.   내가 최초로 불꽃을 켜본 때는 언제였을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로자를 위한 선물', 성냥 상자에 새겨져 있는 '목도리딱새'. 목도리딱새는 '딱' 성냥이 켜지는 순간, 그 목소리로 울까.    그 아래 적혀 있는 러시아 키릴 문자로 '노래하는 새들'.   그 안에는 성냥갑 18개가 열여덟 종의 명금과 함께 세 줄로 나란히, 머리가 녹색인 성냥이 각기 60개씩 들어 있다는데.    기억은 믿을 수 없는 금속 창살의 아라베스크. 나는 아홉[…]

성냥과 새와 사자 외 1편
이문숙 / 2018-02-01
애틀랜틱 엔딩 / 문지혁

[단편소설]     애틀랜틱 엔딩 Atlantic Ending     문지혁       1       박은 성의 외벽처럼 도박장을 둘러싸고 있는 슬롯머신을 지나 테이블 게임 사이로 들어섰다. 블랙잭, 룰렛, 바카라, 포커. 유니폼을 입은 딜러들이 테이블마다 기둥처럼 서 있었고 수영복 모양의 검은 의상을 입은 버니 걸 몇이 윙크를 하며 지나갔다. 박은 머뭇거리지 않고 카지노 끝에 있는 보가타 호텔 프런트를 향해 걸었다. 코끝에서 카지노 특유의 냄새가 맴돌았다. 바닥에 깔린 카펫과 금속성의 기계들이 내뿜는 열기, 사람들의 땀 냄새와 체취, 미처 다 환기되지 못한 담배 연기가 섞인 기묘한 냄새. 일확천금을 꿈꾸는, 혹은 파국을[…]

애틀랜틱 엔딩
문지혁 / 2018-02-01
나의 시인 외 1편 / 민구

[신작시]     나의 시인     민 구       오늘은 너도 시가 된다는 것   너는 가장 달콤한 시라는 것   나는 제과점 앞을 서성이며 주머니 속의 동전을 만지작거리다가   케이크의 나라   초코와 라즈베리를 바른 도시를 가로질러 공항으로 간다   캄캄한 섬에 내려서 아무도 없는 상점의 유리창을 깨고   받으쇼, 탈탈 털어 동전을 내놓고 초를 꺼내서 불을 붙인다   비밀이 있다면 그것이 단 하나라면   오늘은 너도 시가 된다는 것   너는 가장 따뜻한 비라는 것   처음 만난 당신이 나의 시인        […]

나의 시인 외 1편
민구 / 2018-02-01
베스트 컷 / 조진주

[단편소설]     베스트 컷     조진주           홍보용 제품 사진을 고르는 기준은 명확하다. 제품의 장점이 부각된 사진을 고를 것. 제품을 최대한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것. 초점이 맞지 않거나 상품의 기능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사진들은 당연히 사용할 수 없다. 드러나지 않아야 할 부분이 지나치게 드러난 사진, 예를 들어 약해 보이는 손잡이 부분이나 제품의 미관을 해치는 회사 로고가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사진 따위도 제외해야 한다. 기준을 충족시킨 쓸 만한 사진을 골라내고 남은 사진들은 한데 모아 두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곧 삭제될, 불필요한 자료들이었다.     사진 선별 작업이[…]

베스트 컷
조진주 / 2018-02-01
돌아온 빨간 구두 이야기 / 임어진

[글틴-동화]     돌아온 빨간 구두 이야기     임어진               “빨간 구두 소문 들었어?”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오래전 한 소녀를 불행에 빠뜨리고 어딘가로 멀리 떠났다는 구두였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이야기 속 소녀는 세례 뒤 성사에 신을 새 신발로 빨간 구두를 고른다. 눈이 어두운 할머니는 소녀가 고른 신발 색깔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배당에는 검정 신을 신고 가야 한단다.”     “예, 할머니. 까만 구두를 신었어요.”     예배당에 들어가려는 소녀에게 빨간 수염 노인이 다가와 구두를 톡톡 치며 말했다.     “참 예쁜 신이군요. 춤출 때[…]

돌아온 빨간 구두 이야기
임어진 / 2018-02-01
독자 모임 –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 김주선 외

[기획]     문장 웹진 독자 모임 –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김주선(사회, 문학평론가), 김영삼, 송민우, 이다희, 이서영         김주선 : 지금부터 《문장 웹진》 독자모임 좌담회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1회 모임인만큼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뒤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사회를 맡은 평론가 김주선이라고 합니다.   송민우 : 저는 이번에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했고 조선대 석사 졸업 예정인 송민우입니다.   김영삼 : 저는 전남대에서 강의하는 보따리 장사이고 문학을 좋아하는 서생입니다. 김영삼이라고 합니다.   이다희 : 저는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해서 시를 쓰고[…]

독자 모임 -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김주선 외 / 2018-02-01
측량과 측정-지도제작자와 시계수리공 / 서희원

[커버스토리]     측량과 측정 ― 지도제작자와 시계수리공     서희원               우리는 흔히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현재’라는 말로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를 시간의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사유를 진행한다면 ‘현재’를 결코 시간 개념만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도, 감각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재’의 맥락에서 시간은 필수적인 상관물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은 논리적인 사고 속에서는 개별적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특수한 경우를 지칭할 때는 시간과 공간의 두 가지 축이 함께 요구된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을 예로 들면 아마도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자동차[…]

측량과 측정-지도제작자와 시계수리공
서희원 / 2018-02-01
유리큐브와 뇌의 색깔 외 1편 / 김연아

[신작시]     유리큐브와 뇌의 색깔     김연아       그 집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내 얼굴을 삼킨 너는 차가운 낯빛을 하고 칼을 건넸다   유리벽 나는 너의 그림자 속에 네가 모르는 어둠 속에 있다   사막의 밤하늘 같은 뇌의 사진 이 잿빛 유리상자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림자가 삐거덕 소리를 내자 나는 피를 내놓는다 흰 필름 위에 씌어진 홀쭉한 나의 육체   어떤 번개가 너의 눈을 때렸나 갈라진 말들이 불꽃처럼 내려앉는다   사방은 온통 귀먹었고 흙이 섞인 포도주 냄새가 났다   달이 우리의 피를 교환하는 동안 한 눈에는[…]

유리큐브와 뇌의 색깔 외 1편
김연아 / 2018-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