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편지 / 홍은경

[2015 아르코창작기금]     고양이 편지     홍은경     1. 그렇게 고양이가 왔어       무슨 소리가 나서 눈이 떠졌다. 방이 어두컴컴하여 주위가 잘 안 보였다. 아침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었다. 창문에 쳐진 두꺼운 커튼이 빛을 꽁꽁 가로막고 있었다.     “야옹.”     긴가민가했던 그것은 확실히 고양이 소리였다. 지예는 귀를 쫑긋 세우고 눈만 깜빡거렸다.     “야옹!”     뒤이은 소리가 화난 듯해서 지예는 마지못해 이불 속에서 나갔다.     커튼을 젖히자 햇살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지예는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비켰다. 눈을 감고 있어도 햇빛은 환하게 느껴졌다.    […]

고양이 편지
홍은경 / 2017-04-18
도마뱀이 숨쉬는 방 / 탁명주

[2015 아르코창작기금]     도마뱀이 숨쉬는 방     탁명주         바이브가 젖은 걸레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그 애의 발밑에서 나무 계단이 찌걱댄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내 눈치를 살피느라 뒤꿈치를 들어보지만, 조심하면 할수록 낡은 계단은 요란한 소리를 낼 뿐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이브가 어깨를 움츠리며 소리 없이 웃는다. 눈만 마주치면 웃음을 주고받는 대화법에 언제쯤 익숙해질 수 있을까. 나는 어색해진 시선을 벽시계로 돌린다. 오전 열 한 시. 한국 시간으론 이미 열두시다.     오늘도 최 사장에게선 연락이 없다. 송수화기를 집어 들고 마닐라 지역 번호를 누르다 주춤한다. 스페인계 필리핀 여자와[…]

도마뱀이 숨쉬는 방
탁명주 / 2017-04-18
마법의 순간 / 최양선

[2015 아르코창작기금]     마법의 순간     최양선       목 차 1. 마술사 부자(父子) 2. 은밀한 거래 3. 박쥐의 실체 4. 새가 선택한 소년 5. 지하방에서의 마술 6. 용호파 7. 시온이의 흔적 8. 시온이의 마술 9. 솔선수범 10. 밤의 소년 11. 피할 수 없는 선택 12. 어긋난 계획 13. 죄의 고백 14. 희망의 끈 15. 이상한 징후 16. 박쥐의 실체 17. 재민의 결석 18. 새로운 마술 19. 미행 20. 약속 21. 마법의 순간           1. 마술사 부자(父子)       늦은 오후인데도 햇빛은 강렬했다. 횡단보도[…]

마법의 순간
최양선 / 2017-04-18
당신은 마이바흐를 타본 적이 있습니까 / 최승린

[2015 아르코창작기금]     당신은 마이바흐를 타본 적이 있습니까     최승린         “탈모는 털이 있어야 하는 곳에 털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비디오의 제목은 ‘탈모에 관한 오해와 진실’이었다. 종편에서 방영한 ‘21세기의 질병’ 시리즈 중 하나로 조회수가 얼마 되지 않는 걸 보니 인기 프로그램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털이 있어야 하는 곳에 털이 없어진 상태가 탈모. 사실상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고 있는 김민석 박사는 40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의사라기보다는 중견 탤런트 같은 얼굴이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왠지 믿음이 간 건.     언젠가부터 엘리베이터를 타면 사람들 머리를 유심히 보게 됐다. 대머리나 머리숱이 성긴 사람이[…]

당신은 마이바흐를 타본 적이 있습니까
최승린 / 2017-04-18
뱀의 가족사 외 7편 / 종정순

[2015 아르코창작기금]     뱀의 가족사     종정순         에덴에 살던 낡은 얘기가 우리 집에 살고 있다       봉천산 싱아 숲에 사는 귀가 달렸다는 뱀,     옷고름 하나 떼어주고 줄행랑치는 할머니의 뒤를 그 옷고름 물고 따라왔다는     할머니의 할머니 시절     그 뱀을 본 적 없으니 믿을 수는 없다만       옛이야기 속엔 제 꼬리를 물고 도는 뱀이 있어     나는 뱀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가곤 하네       뱀날은 간장을 담그지 않는다는     입과 입으로 유전하는 모계의 금기가 있는데     장독대 돌 틈에서 말을 걸어오던 혓바닥[…]

뱀의 가족사 외 7편
종정순 / 2017-04-18
별을 본 적 있나요 / 전성현

[2015 아르코창작기금]     별을 본 적 있나요?     전성현         커겅 커겅.     아빠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예전엔 재채기하듯 가벼운 소리였는데 요즘엔 공룡이 내는 소리처럼 크고 거칠다. 내 방에 앉아 멍하니 그 소리를 듣다 보면 베개만 했던 공룡이 기침 소리와 함께 하루하루 더 커지는 상상을 하게 된다. 침대에 함께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공룡은 이제 창밖에 고개를 내밀고 있어야 할 정도로 커 버렸다.     아빠의 기침 소리가 잦아든 뒤 나는 아침부터 들여다보던 그림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이들이 잔디가 푸른 언덕에서 뛰어놀다 별을 세며 잠든다는 내용의 책이었다.[…]

별을 본 적 있나요
전성현 / 2017-04-18
책들의 점성학 외 6편 / 장유정

[2015 아르코창작기금]     책들의 점성학     장유정         책을 폈을 때 가장 먼저 눈을 갖는 문장들로     시작되는 예언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호기심과 위기감사이에는 침 묻는 손가락이 있다.     새로운 해석은 늘 반신반의의 단락들이고     간접의 상징들이 팔랑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어떤 책도 한 사람이 걸어 들어가     머무른 적이 없듯     점성술에서 마음을 찾아내는 오래된 방식.     좋은 구절을 뽑아 인용하듯     일찍이 전해져 오던     네 귀퉁이가 다 닳아 점치기 어려운 이름께나 알려진     기획 의도는 어떤 대목에서 미간 되었을까?     잃어버린 책을[…]

책들의 점성학 외 6편
장유정 / 2017-04-18
올드 랭 사인 / 임정연

[2015 아르코창작기금]     올드 랭 사인     임정연         전철이 멈추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뒤에서 몸을 찔러 돌아보자 술 한잔을 걸친 듯한 남자가 쥔 케이크 상자였다. 홈도 내리고 타려는 사람들로 번잡했다.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 틈에 섞여 계단을 내려왔다. 바깥으로 나오자 칼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따듯했던 몸이 순식간에 식었다. 입에서 허옇게 입김이 나왔다. 마스크를 썼다. 캡 위에 파카모자를 덮어쓰고 걸음을 서둘렀다. 전철역 앞의 자선냄비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연말의 밤거리는 시끌벅적했다. 가게마다 조명이 번쩍거리고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들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빠르게 걸었다. 공원[…]

올드 랭 사인
임정연 / 2017-04-18
잔혹동화 외 6편 / 오승희

[2015 아르코창작기금]     잔혹동화     오승희     한 아이 울고 있어 남겨진 웃음소리 갈기갈기 찢어져 심장에 파종된다 영혼은 상처의 꽃밭, 여린 꽃 짓눌려   내 죄는 너희와 다른 걸까 틀린 걸까 미운 오리 백조 되는 건 오래전 낭설이래 눈 감고 푸른 하늘 날면 눌린 꽃 활짝 필까                     바다에 집을 지었네     사이버 열쇠로 나는 나를 방문한다   그물로 건진 일상 온라인 곳집에 들어 여태껏 인화되지 않은 채 늙어가는 사진파일   누군가 오고 감이 남몰래 넉넉해도 한[…]

잔혹동화 외 6편
오승희 / 2017-04-17
더위 사이즈 외 6편 / 이해원

[2015 아르코창작기금]     더위 사이즈     이해원         서울 34     대구 37     제주 31       풍만한 더위가 엉덩이를 흔들면 발전소가 쓰러지고 녹조가 떠오르고 고추밭이 쓰러지고     집집마다 전기료가 비대해진다     에스컬레이터가 멈췄다 다이어트를 거절한 상가들     흘려버린 냉기에 과태료가 부과된다       한낮의 더위가 앞가슴처럼 부푼다     계절을 건너지 못한 여름이 혀를 빼문다     삼복의 전략에 내몰린 사람들은 제2의 피서지로 버스를 선호한다       연일 풍만한 사이즈     막바지 매미소리에 살이 오른다     가슴둘레 34가 손을 흔들 때마다 전국의 체온이 올라간다     오늘[…]

더위 사이즈 외 6편
이해원 / 2017-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