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제희
플루이드 / 도제희

어서 오시죠. 저쪽 소파에 앉으시면 됩니다. 저렴한 소파라 그리 편하진 않아도 더럽지는 않습니다. 제가 긴장돼 보인다고요? 사실은 조금 그러네요. 기자님 이름을 보고 당연히 남자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뇨, 불편하다기보다는 당황을 했습니다.

플루이드
도제희 / 2015-06-01
최민우
레오파드 / 최민우

차오라는 남자와 알고 지낸 적이 있었다. 차오는 처음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이름에 대해 뭔가 말을 꺼내기 전에 고울 차(瑳) 자에 깨달을 오(悟) 자를 쓴다고 선수를 쳤다. 나이는 30대 후반 내지는 40대 초반이었고, 날씬한 체구에 넓은 미간에서는 까맣고 동그란 눈이

레오파드
최민우 / 2015-06-01
문동만
장작 외 1편 / 문동만

    장작       문동만         지게를 지고 아까시 나무를 베어 와서는 자귀로 하얀 육질을 갈랐다 아궁이 불길은 역풍으로 뱉어냈고 엄마의 머리칼에는 늘 불내가 배어 있었다 그 냄새를 좋아했다 그걸로 식구들 시린 등골을 견디며 정부미로 밥을 지었고 물이 스몄다 지면과 장판은 수평이어서 메마른 장작으로 얻어터진 날도 있었다 자식들을 업은 적 없다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내 등에 업자 가벼운 장작 같았다 평생 이불을 깔지 않고 냉골에만 드러눕던 아버지에게서 잘 마른 굴비 같은 옅은 비린내가 풍겼다 아버지는 가까스로 등에 대고 앉아 등을 빌려준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

장작 외 1편
문동만 / 2015-06-01
조용미
만어 외 1편 / 조용미

    만어       조용미             어떤 것은 종소리가 나고 어떤 것은 텅 빈 소리가 나며 어떤 것은 악기소리가 나고       또 어떤 것은 그저 맑은 음이 울리고 어떤 것은 둔탁한 쇳소리가 나며 어떤 것은 옥의 소리가 났다       수많은 물고기돌을 두드려 보며 나는 한나절 따뜻한 겨울 한낮의 설법에 귀 기울였다       물고기들은 나를 태우고 산정을 향해 높이 헤엄쳤다       미륵전 너머 자성산 너머까지 날아간 물고기들은 끝끝내 어디까지 다다랐을까       다시 돌너덜을 내려가 맨 아래쪽의 물고기를 찾았다 뭍으로 나온[…]

만어 외 1편
조용미 / 2015-06-01
함민복
원과 점 외 1편 / 함민복

    원과 점       함민복         1.원   ○을 하나 그린다   ○은 뚫려 있음만 있다   ○을 그리고 있는 나라는 나의 막힘   ○이 삶의 열쇠를 보여준다   여집합인 줄 알았는데 교집합이 나란 말인가   ○을 지우자 뚫려 있음도 사라진다   2.점   잘못 찍은 ●을 지운다   ●은 빈틈이 없다   ●을 지우고 있는 나의 빈틈   ●이 죽음의 열쇠를 보여준다   교집합이 나인 줄 알았는데 여집합이 나란 말인가   ●을 지우자 여백도 지워진다                […]

원과 점 외 1편
함민복 / 2015-06-01
송승언
비실감 외 1편 / 송승언

    비실감       송승언         봄이었고, 일곱 살이었다 소풍 생각에 들떠 있었다 꽃을 처음 본 것도 그때였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멀미를 참으려, 흔들리는 풍경을 따라 흔들리는 눈이 애써 매달리던 도로변의 꽃들 흘러가던 꽃들 이전의 꽃들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때 매스꺼웠다 그 꽃이 금방 시들어버릴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일곱 살인 내가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처음 기도했다   하나님, 그래도 나는 안 죽으면 안 될까? 나는 안 될까? 짝꿍 옆에서 제발 토하지 않게 해달라고 덧붙이면서                 램프[…]

비실감 외 1편
송승언 / 2015-06-01
김선재
사탕이 녹는 동안 외 1편 / 김선재

    사탕이 녹는 동안       김선재             사탕이 녹는 동안, 한 세상이 지나간다. 오래된 표지를 넘기면 시작되는 결말. 너는 그것을 예정된 끝이라고 말하고 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옮긴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거야. 어디서든, 어떻게든. 등 뒤에서 작게 속삭이는 사람들. 멀리 있는 사람들. 그것이 인생이라고 노래 부르는 사람들. 새롭지는 않았으나 아는 노래도 아니었다. 다만 열꽃을 꽃이라 믿던 날들을 돌이키며 각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뿐. 후회와 미련에 붉은 줄을 그어 나갈 뿐. 오늘도 어디선가 새는 울겠지. 내일도 새는 어디선가 새로 울 거야. 흔들리는 시선이 고요해질 때까지[…]

사탕이 녹는 동안 외 1편
김선재 / 2015-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