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민
새가게 / 이지민

이혼은 하되 규모 있게. 일단 포부는 단단했다. 이혼 후 딸을 말레이시아 국제학교에 보내고 그곳에서 우아한 40대의 삶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딸이 다니는 영어학원 앞 카페에 앉아 엄마들에게서 정보를 모으며 홀가분한 새 생활을 꿈꾸었다.

새가게
이지민 / 2015-02-01
황현진
한두는 만나지 마 / 황현진

기어이 모텔이었다. 한낮이었다. 방은 깨끗했지만 허름했다. 방 안은 바깥보다 온도가 낮았다. 직전에 누군가 묵었다가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에어컨의 전원을 금방 끈 듯 방 안에 찬 기운이 돌았다. 잠깐 소름이 돋았다가 이내 사라졌다.

한두는 만나지 마
황현진 / 2015-02-01
임현
거기에 있어 / 임현

무영의 제안에 마음이 크게 동한 것도 아니면서 은우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래, 우리에게도 그런 게 좀 필요했지. 잘 생각했어. 나야 아무데라도 괜찮아. 가자, 어디든. 그렇게 말은 해두었지만 적어도 두어 달은 족히 걸리지 않겠냐 싶었다. 알아보고 계산하고 고민하고 갈까 가지 말까

거기에 있어
임현 / 2015-02-01
황유원
전국에 비 외 1편 / 황유원

    전국에 비       황유원           어둔 방 창밖으로 들려오는 자욱한 빗소리 속에서 나는 기타를 치고 기타는 허공에 나무 한 그루 심어 놓는다 기타의 목질(木質)이 허공에서 축축이 젖어 가는 사이 나무는 비를 맞아 무럭무럭 자라나고 우리는 그 아래서 비를 그으며 젖은 머릴 말리며 다시 기타를 친다 내가 기타를 치면 참 평화롭다고 너는 말하지 나는 고작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틀렸는지나 생각할 뿐인데 너는 그게 평화롭다고 말하고 진심으로 평화로워지지 나는 어리둥절해지고 내가 치고도 듣지 못한 음악을 너의 입으로 전해 듣고서야 평화로워진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처럼[…]

전국에 비 외 1편
황유원 / 2015-02-01
박찬세
흰 소 외 1편 / 박찬세

    흰 소 *       박찬세           화포 너머에 산이 있었고 산 이전에 소가 있었다 남자는 뼈가 드러난 산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다 지친 소가 화포 속으로 걸어 들어올 때까지 소의 긴 울음이 산을 휘돌아 붓을 세울 때까지 어디 하나 상처가 아닌 곳이 없는 갈아엎어 놓은 땅 희끗희끗 뼈들이 흙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남자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화포 속으로 들어온 소가 남자를 바라볼 때까지. 남자는 붓을 들어 소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붓이 닿는 곳마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산맥으로 일어서고 헐거워진 뼈들이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또 한[…]

흰 소 외 1편
박찬세 / 2015-02-01
정재학
제주-히말라야 샤머니즘의 만남展 외 1편 / 정재학

    제주-히말라야 샤머니즘의 만남展 ― 푸르바 *       정재학           하늘에는 불의 길을 따라 빛으로 짜여진 음들이 타올라 거대한 눈동자를 감싸고   땅에는 바람소리를 덮는 소음들 몇몇 낮은음들만 간신히 버틴다   지하의 뿌리들이 흙을 놓치지 않는다 스며드는 빗소리를 암송하며 나무는 지속된다      *  나무를 깎아 만든 네팔 샤먼의 무구(巫具). 3단 구조를 갖는데 천상, 지상, 지하를 의미한다.               제주-히말라야 샤머니즘의 만남展 ― 신칼           피 흘린 자가 상처를 치유한다 바람의 만과 곶 칼과[…]

제주-히말라야 샤머니즘의 만남展 외 1편
정재학 / 2015-02-01
김현
조선 마음 4 외 1편 / 김현

    조선 마음 4       김현           기도하자   속삭인다 비가 와 속삭인다 비가 와요 속삭인다 비가 오지 속삭인다 비가 오니 속삭인다   비가 기도를 지나올 때 그러면 기도하자   비의 숨통으로 들어가자 뼈만 남은 손목을 잡고 속삭인다 비의 숨통으로 들어가요 속삭인다 비의 숨통으로 들어가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단내가 나는 입술을 벌리며 속삭인다 비의 숨통으로 들어가자 달콤하게 속삭인다 비의 숨통으로 들어가면 비가 계속 내릴까 내리는 비는 딱 멈출까 비 사라지고 해 뜰까   그렇다고 기도하자   비의 숨으로 들어가고 비의 결에 서 있어[…]

조선 마음 4 외 1편
김현 / 2015-02-01
기린 외 1편 / 최명진

    기린       최명진           내가 가끔 산그늘 푸른 이끼 속에 으스스 몸 떠는 이유는 내 엄마의 기억이 나에게 새겨져 있기 때문   혹은 몽당꼬리를 놀리며 걷던 날들 가뭄과 메마른 초원과 흙먼지 끝없이 자욱한 날들   어느 날은 속눈썹처럼 까만 새순들이 돋아나는 그런 꿈을 무리 지어 따라왔기 때문   별똥별이 긴 상흔을 하늘에 그으면 지옥불처럼 화려한 은하수 지평선 너머 뻗어 흐르고   어제의 죽음들은 덕지덕지 엉덩이 끝에 따라와 붙곤 했지   나는 또한 돌고래의 피를 가진 아이로 이건 우리 아빠의 이야기   먼[…]

기린 외 1편
최명진 / 2015-02-01
텅 빈 외 1편 / 함성호

    텅 빈       함성호           턱이 비어 있다 옆구리가 비어 있다 가운데가 비어 있다 그를 때려눕힐 수 있었지만 그러면 왠지 슬퍼질 것 같았다 그냥 맞았다   알 수 없는 일은 알 수 없는 대로 둬야 한다 비어 있는 것은 텅 비어 있게   멀어지는 별과 별 사이 낭떠러지 위의 산양처럼 홀로 밤하늘을 찢고 있다   별똥별 알 수 없는 데서 자라 알 수 없는 대로 미쳐 가는 우리가       우리들의 시간은     ―영화 『프란시스 하(Frances Ha)』 중에서 / 감독 : 노아[…]

텅 빈 외 1편
함성호 / 2015-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