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성
회색 외 1편 / 이기성

    회색       이기성               나는 시인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회색은 좋아해     덜렁거리는 검은 물건 같잖아, 나는 그것을     사랑하지만 오늘은 커다란 양복을 입은 아이처럼 공손하구나. 회색 고양이와 기린의 차가운 귀처럼       세계는 고요하구나     나는 두 팔을 마구 휘저으며 휘파람을 불어, 하지만 무뚝뚝한 청소부가 그걸 냉큼 파란 쓰레기통 속에 처박아 버렸지       거리의 시멘트와 흰 종이와 떨리는 촛불들     그리고 오늘 아침 비로소 회색이 된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고     거기서 오래전에 죽은 독재자와 마주친 적도 있지, 그는 뚱뚱한[…]

회색 외 1편
이기성 / 2014-11-01
이재훈
작은 뿔 외 1편 / 이재훈

    작은 뿔       이재훈               형벌이 아니네. 단지 그런 생물이었지. 눈과 코와 입이 없을 뿐인데. 매일 꿈을 꾸네. 바람이 불어 나를 바다로 데려가네. 바다 속에 꿈틀꿈틀 더러운 생물들이 태어나고 있었네. 독수리가 물고 갔으면 좋을 법한 것들. 눈, 코, 입이 없는 생물이 있었네.       뿔이 있었네. 우쭐거리며 큰 소리를 내며 물속을 오르락내리락 거렸네. 그에겐 뿔이 있었네. 아니, 뿔만 있었지. 나는 꿈을 꾸네. 세 번의 꿈을 꾸고 일어난 아침. 아무 이야기도 기억나지 않지만 뿔이 달린 것은 선명하게 기억나네.       뿔이 있었네.[…]

작은 뿔 외 1편
이재훈 / 2014-11-01
정익진
긴 이름 짧은 이름 외 1편 / 정익진

    긴 이름 짧은 이름       정익진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 델 산티시보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   이렇게 긴 이름을 가진 그녀, 정말 오래 살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리아뇨’ *의 아내로… 밀림에서 고생만 하다 젊은 나이에 죽었다.   돌로레스, 넌 일기를 왜 나뭇잎에 새기는지 알 수 없구나. 그 정도로는 어림없어. 압도적으로 뛰어날 수 없다면 평범해지든지. 너의 동생 엔카르나시온을 봐라. 말을 거꾸로 하는 재주가 있어. 그리고 거짓말쟁이 흉내를 얼마나 잘 따라하는지 앵무새의 혀가 굳어버렸지. 강 건너 오두막에서 점심을 먹고 델 산티시보네[…]

긴 이름 짧은 이름 외 1편
정익진 / 2014-11-01
권기덕
구술지도 외 6편 / 권기덕

      구술지도     권기덕           미시시피 강을 따라 동쪽으로 4Km쯤 멤피스 신전이 보이고 그 언덕에서 바람을 타고 벼랑 끝으로 가면 지도에 없는 길이 있다 북미 인디언에 의하면 그 길은 말하는 대로 길이 되는데 되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죽음뿐이라고 한다 말할 때마다 피는 꽃과 나무는 밴쿠버를 지나 알래스카까지 변화무쌍하게 변형 된다 갈색펠리컨이 말했다 소리에 축척이 정해지면 풍문이 생긴다고 풍문의 높낮이는 산지와 평야를 만들고 때론 해안선을 달리며 국경 부근에선 적막한 총소리마저 들린다 말에 뼈가 있는 것, 수런대는 말은 지형의 한 형태다 낭가파르바트의 눈 속에 박힌[…]

구술지도 외 6편
권기덕 / 2014-11-01
장순익
비밀의 화원 외 6편 / 장순익

      비밀의 화원     장순익           건너실 산 밑에 아줌니는 생전 마실도 안 다녀 자기가 안 다니니까 남들도 그 집에 안 가 어쩌다 비탈밭에 수건 쓰고 앉아서 밭 매는 거나 볼까 뭘 먹고 사는지 장에도 안 다녀 남정네가 있나 품앗이를 하나 가을이면 온 동네 지붕 새 이불 덮은 것 같은디 그 집 하나만 시커멓고 움푹 꺼져도 이엉 엮어 줄 사람이 있나       겨우내 눈 쌓이고 녹아 내려 더 납작해진 그 집     봄 되면 아주 사라졌다     크나큰 팔이 포옥 감싸듯이     늙은[…]

비밀의 화원 외 6편
장순익 / 2014-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