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자오선(子午線) 외 1편 / 박연준

    자오선(子午線)       박연준           그는 밤의 하인,   발자국을 손으로 쓸며 달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펄럭이다 나뭇잎과 섞이는 줄도 모르고   냇물에 지문이 풀어져 물에 지도가 생기는 줄도 모르고   바다의 단단함이 무너져 파랑이 가루가 될 때까지 가루마저 쓸며 달리고 있었다                 키스의 독자         그게 뭐지? 물살이 물살과 뾰족하게 부딪치는 거 서로의 입속을 헤매다 아귀처럼 쩝쩝대는 거 허공을 물어뜯어 아작 내는 거 찾지만 끝내 찾고 싶지 않은 거 젖지만 끝내 젖지[…]

자오선(子午線) 외 1편
박연준 / 2014-07-03
보아뱀 외 1편 / 심지아

    보아뱀       심지아           빛이 늪이나 못이라면 빛 속에서의 흐느낌도 이해할 수 있다 울고 있는 엄마는 울고 있는 것이다   늪의 점도는 소요를 삼키고 빛을 삼키고 늪을 삼킨다 천천히 소화되는 덩어리들과 함께 녹지 않는 덩어리들과 함께 죽은 듯 고요하게 불가능하게                 종이처럼 얇은 이웃이란 누구인가           나는 나의 바깥에서 의아한 얼굴을 짓고 있다 이리 와 이게무슨소리일까말하는네가있다 있다라는낱말이 있다 도마위에서녹고있는조기처럼   비린 물을 흘리며 나는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진실에근접한단어가있을까, 맙소사 우리는똑같은모양의유리병처럼키득거린다 나는 얼마나[…]

보아뱀 외 1편
심지아 / 2014-07-03
이재웅
[공개 인터뷰 나는 왜:4회_이재웅 자선 단편소설]전태일동상 / 이재웅

대학 시절 김태광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조소학과 학생이었다. 체격은 우람했고, 험궂은 얼굴에, 과묵했고, 약간 곱슬진 머리를 목덜미가 덮이도록 기르고 다녔다. 그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인상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곤 했다. 하지만 실제의 그는 무척 순박했다.

[공개 인터뷰 나는 왜:4회_이재웅 자선 단편소설]전태일동상
이재웅 / 2014-07-01
[공개 인터뷰 나는 왜 제4회]삶의 짙은 그늘 속에서 리얼리스트를 꿈꾸는가_(이재웅소설가 편) / 안희연

요 몇 달 어두운 소식이 참 많이 들렸습니다.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불쑥불쑥 물속이 생각나 내내 울먹이는 시간이었지요. 남달리 힘겨운 여름의 입구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이재웅 소설가를 만나러 갔습니다.

[공개 인터뷰 나는 왜 제4회]삶의 짙은 그늘 속에서 리얼리스트를 꿈꾸는가_(이재웅소설가 편)
안희연 / 2014-07-01
염승숙
호우 / 염승숙

그는 의아했다. 보통 호우는 언제나 오후 네 시 정각에 시작되었다. 호우가 일어난 이래로 그것이 일 분이라도 일찍 시작하거나 혹은 그 반대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99. 사내 전화를 돌려 볼까 하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곧 그만두었다. 그룹웨어를 통해 공지된 메일의 창을 닫았다. 동료들이 술렁이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무심한 척 서류철을 넘겼다.

호우
염승숙 / 2014-07-01
성윤석
먼지의 화학식 외 1편 / 성윤석

    먼지의 화학식       성윤석           원두커피 찌꺼기와 열경화성 수지 A를 섞는다.   실험 중이오니 절대 따라하지 말 것   새로 개업한 동네 커피 집에 선물해야지.   커피 찌꺼기로 만든 블록이에요. 오늘은 의자를   만들어 봤죠. 화장실 변기도 만들 수 있어요.   커피 찌꺼기는 수지와 안 섞인다.   실험 중이오니, 해보시길. 함박눈이 내리던 밤이었다   함박눈은 눈의 알갱이가 녹았다 서로 뭉쳐진 것   그래서 함박눈은 따뜻하단다. 얘야. 사람도 그렇지.   한 번 녹았던 사람. 무서운 건 우리가 낱낱의 알갱이로 떨어져   서로의 입자들을[…]

먼지의 화학식 외 1편
성윤석 / 2014-07-01
박신규
들별꽃 외 1편 / 박신규

    들별꽃      ― 성근에게       박신규           질기고 힘세고 숭고한 밥은 불현듯 가장 잔인하고 싸가지가 없다 생일날 아침 갓 서른을 넘긴 후배가 남편을 잃었다 상을 치르는 내내 나는 울고 밥 먹고 울었다 세 살짜리와 두 달 된 어린것을 품은 그녀는 젖을 물리려 밥을 먹고 토하고 또 밥을 먹고 토하며 꺽꺽 울지도 못했다 죽지조차 못하는 슬픔에게도 빈틈을 내주지 않는 죽음   어느 봄날의 공원, 물빛 꽃빛이 너무 시렸던가 이제는 연애도 하고 제주에도 가보라고 나는 꾸역꾸역 김밥을 밀어 넣었다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그녀를 한동안[…]

들별꽃 외 1편
박신규 / 2014-07-01
임승유
밖에다 화초를 내놓고 기르는 여자들은 안에선 무얼 기르는 걸까 외 1편 / 임승유

    밖에다 화초를 내놓고 기르는 여자들은 안에선 무얼 기르는 걸까?       임승유               어제 잠 속으로 들어간 소년은 오늘 나오지 않았는데     불이 났다고 해     하루에 한 번 물 주는 여자들은 마을을 다 돌면서 하루에 한 번 물을 주고     바람은     언덕은     던져 주고 있다     더 타야 할 것들이 있다면서       “나이든 여자가 옆에 있으면     엄마, 나는 엄마가 그립고 무섭고 무조건 미안해요”       애원… 원망… 증오… 소년은 늘어나는 팔다리를 가졌다 달빛은 그렇게 부드럽다는데 밤새 회초리를[…]

밖에다 화초를 내놓고 기르는 여자들은 안에선 무얼 기르는 걸까 외 1편
임승유 / 2014-07-01
민구
공기 외 1편 / 민구

    공기      ― 오리       민구           조개껍질 속의 나무 한 그루 솜털 보송한 발자국이 잎사귀에 찍혀 있다   밤이면 뒤뚱뒤뚱 그곳을 내려온 미운 오리와 산책을 해도 좋다   5리마다의 연못 태어나지 않은 알의 오리들이 날아다니는 무덤 안개 무성한 갈대밭 그들의 서식지까지   나무는 공중에 떠 있다 뿌리가 운해에 박혀 있다   산속 오두막 주인 없는 나무 아래 회색 조개의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깨어나는 새   눈 감으면 바스러지는 빈 오리알                 소가죽 구두  […]

공기 외 1편
민구 / 2014-07-01
김경주
[시극]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제3막 / 김경주

어디선가 미미하고 단조롭고 선명하지만 아득한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햇빛이 깨진 종소리를 물고 가는군요. 당신, 밤이 깊어 갈수록 내가 쓰는 언어는 짐승의 빛깔이 되고 새벽이 밝아 오면 식물의 빛깔이 되어 갑니다. 밤이면 내 언어는 짐승이 되고 새벽엔 식물이 되는 거예요. 무슨 소리냐고요. 어떤 생명은 피를 토하고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 안에 있는 식물들을 다 토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시극]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제3막
김경주 / 2014-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