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세
[차세대_3차_시]바늘의 절기 외 3편 / 박찬세

    바늘의 절기   박찬세         애인과 다투고 바늘 한 쌈을 건넨다   한 쌈의 바늘을 건네는 일이란 그믐이 초승에게 한 줌의 빛을 전하는 일이어서 손끝에서 손끝으로 또 한 번의 절기를 보내는 일이어서 곡우에서 입하로 그늘이 자라는 일이어서 당신과 내가 포개지는 곳에서 그림자는 더욱 검어지고 바늘은 더욱 빛난다   당신은 책갈피로 바늘을 쓰는 버릇이 있다 하고 나는 읽은 책을 자꾸 읽는 버릇이 있다 했다 책을 읽다 바늘을 보는 날은 당신 이름을 불러 본다   읽지 못한 날들과 읽히지 않는 날들 사이에서 바늘을 품기 위해 어두워져야 하는[…]

[차세대_3차_시]바늘의 절기 외 3편
박찬세 / 2013-11-28
기혁
[차세대_3차_시]미아 외 3편 / 기혁

    미아 – 선퇴(蟬退)   기혁         여름의 끝을 본 적이 있는가   얼마나 울어야 나는 너의 허물을 버릴 수 있는가   허물 속에 쌓인 대기의 뜨거움이란, 시린 가을밤에도 하지(夏至)의 햇살들을 놓아 주지 않는다   고백을 묻으면 꽃이 피어난다는 그곳 심장이 뛸 때마다 펼쳐진다는 연갈색 벌판 아래   너는 여름의 마디를 품고서 다시 내려가야만 한다   죽음보다 높고 시린 굴곡을 지나 스스로도 허물어뜨리지 못한 폐허의 생태를 향해   최초의 여름은 여름의 곁으로 다가갈수록 낯선 계절이 된다   허공의 손을 미아처럼 붙들고, 미성년의 주파수로 바스락거리던   사람의[…]

[차세대_3차_시]미아 외 3편
기혁 / 2013-11-28
김정경
[차세대_3차_시]골목을 잠그다 외 3편 / 김정경

    골목을 잠그다   김정경         이삿짐 속에서 고구마 잎이 쏟아져 나온다 공중에서 외줄타기 하는 푸른 싹 팔 벌리고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나는 허공 움켜쥐려고 제 속을 파먹으며 자라는 것들,   개발 개발 재개발 제발 주인 잃은 틀니 같은 꿈 유령처럼 떠도는 중노송 417-15번지 금이 간 밥그릇에 별이 쏟아진다 안다 이제 내 것이 아니다 캄캄할수록 귀는 밝아져 몸속으로 잎사귀 돋아나던 날 한때, 라고 부르던 다정함 속에 피어났던 꽃숭어리 단단히 봉해 골목 어귀에 내놓는다   노송슈퍼 안주인과 환갑 넘은 처녀보살 노선에서 지워진 버스정류장에 한[…]

[차세대_3차_시]골목을 잠그다 외 3편
김정경 / 2013-11-28
배수연
[차세대_3차_시]깃발 외 3편 / 배수연

    깃발   배수연         몇 해 전부터 춤을 추고 싶었다 퇴근 길 버스 안에서 눈을 감으면 거대한 하늘에 깃발처럼 펄럭이는 춤이 거기 있었다   집에 와 방을 비우고 거울을 달았다 오케스트라는 거꾸로 매달아 두었다 그 날부터 매일 나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안에 추락하는 새가 있어.”   어느 날 거울이 말을 걸었다   나는 거울 속에서 화염에 싸인 채 깃이 타는 새를 보았다 내 안의 물을 모두 끌어내도 거울 안을 적실 수 없었다   바람을 감거나 쓰다듬으며 다시 춤추는 나의 허리 나의 다리  […]

[차세대_3차_시]깃발 외 3편
배수연 / 2013-11-28
한호진
[차세대_3차_시]개는 혀로 안부를 묻는다 외 3편 / 한호진

    개는 혀로 안부를 묻는다   한호진         추석에는 영화가 제맛입니다   불이 켜집니다 모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 엔딩 크레딧의 끝까지 올라간 스크린에 떠오르는 얼굴   지금 당신은 통조림 맛이 납니다 혀끝에서 밀봉 직전의 순간이 딸려 나오고   우리의 마지막은 침을 삼킬수록 목이 마른 아름다운 선문답이었어요 석조 건물 계단에 앉아 바라본 오렌지색 풀밭 부신 눈 위에 손차양을 하고 도통 모르겠다는 스텝으로 내리쬐던 그 여름의 대화를 생각해요 만약 개였다면 젖은 숨을 헉헉대며 한 번 더 돌고 오자 했을 텐데 우린 차마 서로에게 잃어버린 걸 가져오라 할 순[…]

[차세대_3차_시]개는 혀로 안부를 묻는다 외 3편
한호진 / 2013-11-28
김준현
[차세대_3차_시]독감 외 3편 / 김준현

    독감   김준현         저녁은 자주 목이 쉬는 감정이다   오토바이가 골목을 긁으면 가래 끓는 소리가 난다 집집마다 내막이 깊어 나는 오른쪽 귀로부터 왼쪽 귀로 지나가는 숨소리, 노파는 길목처럼 꺾인 채 구멍마다 등을 켠다 환하게 기미가 자란다 주름들로, 갈라지는 길목이다   나방들은 해를 보기 전에 가로등을 앓는다   붉은 머리띠를 한 원주민처럼 우리는 떼 지어 숨 쉬고 떼 지어 쓸쓸하고, 잠들고 돌아오면 사라지는   비 내리는 주소를 외운다 멀어진   개들이 된소리로 짖으며, 단단해지는 저녁, 나는 시동을 켜고 떤다 눈시울이 탱탱하게 익어 가고   수상한,[…]

[차세대_3차_시]독감 외 3편
김준현 / 2013-11-28
[11월 시_불] 불 / 김승일

    불   김승일         동네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서 신문지랑 쓰레기를 태우고 놀았다 매일 밤 다른 운동장에서 불을 지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친구들과 불을 피웠다 나랑 어떤 친구 한 명이 주축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게스트였다 캠프파이어 강사가 된 것 같았다 어른들이 와서 불을 끄라고 할 것 같아서 아무도 안 다닐 것 같은 시간에만 불을 피웠다   다른 동네에서 친구들이 왔다 버스 시간 때문에 빨리 가야 돼 그래서 저녁 일곱 시에 집 앞 초등학교에 갔다 로또랑 스포츠 토토 용지랑 신문지로 불을 피웠다 돌돌 말아서 장작처럼 만들어야 돼 그래야[…]

[11월 시_불] 불
김승일 / 2013-11-27
은승완
생활소설 창작교실 / 은승완

내가 복싱 판에 뛰어들던 시절, 프로복싱의 인기는 내리막길이었어. 세계챔피언 타이틀매치가 열리면 구름관중이 모여들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도 까마득한 옛날 같았지. 복싱의 인기는 갑자기 시들해졌어.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았지. 그중엔 사람들이 이제 헝그리 스포츠인 복싱을 기피한다는 분석도 있었어. 복싱 판에서 예전과 같은 슈퍼스타를 배출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했어. 그즈음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이종격투기의 인기 때문이라고도 했지. 이종격투기는 복싱보다 화끈하고 원초적이지. 격투기 본래의 야성에 더 충실하다고나 할까.

생활소설 창작교실
은승완 / 2013-11-21
주하림
오로라 털모자 외 3편 / 주하림

    오로라 털모자   주하림             내 기억은 온전치 못한 것이기에 편지를 써두어요     겨울을 보냈어요 드레스를 입은 환자가 들판을 달려     엊그제 오해 때문에 떠나보냈던 남자 뒤를 쫓기 위해     고무오리인형을 타고 암흑뿐인 호수를 건너     조금씩 더 슬퍼져 가는 정신병자처럼     입가에 사탕부스러기를 붙이고 그것들이 떨어질 때까지     겨울 떡갈나무에도 입술이 생기길 바랐어요 잘생긴 귀가 보이는     기다랗고 멋진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얼어붙은 땅 따위 걷어차고       침대 속에 오래 묻어 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글과 익은 열매와 멍든 과일주 와 한[…]

오로라 털모자 외 3편
주하림 / 2013-11-21
11월에는 기차여행을 / 이영주

생각해 보면 문학도 달리고 서는 기차와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버려지고 소외되던 마음들이 차창 안에 하나씩 박혀서 길의 끝으로 가고 있는 것. 그 마음들을 물기 어린 창문을 닦듯이 세심하게 닦고 그 안을 들여다봐 주는 것. 그렇게 수많은 창문을 달고 현실의 고단함까지 싣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달리는 것. 이 기관사들은 바람을 뚫고 달리는 외롭고 멋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작가들은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지요.

11월에는 기차여행을
이영주 / 2013-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