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놀러와] 삼천포로 한 번 빠져 보세요 / 조인영

저는 삼천포라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 삼천포라는 곳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1995년에 삼천포시와 사천읍이 통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삼천포는 여전히 삼천포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삼천포 여자고등학교, 삼천포 도서관 등 장소의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동네 놀러와] 삼천포로 한 번 빠져 보세요
조인영 / 2013-05-15
처음 돋아난 흰 벌레가 혀를 차고 허물어지는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외 1편 / 김기주

책꽂이에서 책을 한 권 꺼내들면 언제나 나머지 책들은 몸이 기울어졌다.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질 수도 없는 책들. 서로 몸을 기대고 버티고 서 있다. 언젠가 자신의 몸뚱이를 해부할 손짓을 두려워하면서…….

처음 돋아난 흰 벌레가 혀를 차고 허물어지는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외 1편
김기주 / 2013-05-01
최정화 소설가(2013)
구두 / 최정화

그때 딱 잘라 여자를 돌려보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습니다. 어째서 바보처럼 그 여자에게 “어서 들어오세요.”라고 한 걸까요? 그것도 아주 친절하게요. 하긴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날은 날씨가 너무 추웠거든요. 삼일 동안 폭설이 내렸고 그러고도 날이 풀리지 않아 쌓인 눈이 거리에 꽁꽁 얼어붙어 도시 전체가 온통 얼음산이었습니다.

구두
최정화 / 2013-05-01
김주희 소설가(2013)
숫눈 / 김주희

벚나무 가지 끝에 사월의 바람이 매달려 있다. 허공의 뼈마디마다 오후의 햇빛이 달라붙어 있고, 노는 아이들의 웃음이 그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중이다. 중절모 쓴 노인은 벤치에 앉아 곧추세운 지팡이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있다. 공원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펼쳐져 있다.

숫눈
김주희 / 2013-05-01
이주란 소설가(2013)
나쁜 흐름 / 이주란

지난여름 내내 나는 집 밖엘 나가지 않았어.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말이야. 갇혀 있는 기분이었어.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어. 거실에서 방으로, 방에서 거실로 장소를 옮겨가면서 누워 있었어. 남편하고도 같이 자지 않았어. 그래도 작년엔 가끔 하긴 했는데.

나쁜 흐름
이주란 / 2013-05-01
손홍규 소설가(2013)
서울(제4회) / 손홍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눈을 감기 전과는 다른 세상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랐으나 그 바람이 실현된 적은 없었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목매단 어머니를 보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으나 어머니는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불판 위에 남겨진 고깃점 같은 아버지를 보았다. 눈을 감았다. 코끝에 노르스름한 냄새가 맴도는 듯했다. 눈을 뜨자 불타버린 가계(家系)가 환상처럼 보였다.

서울(제4회)
손홍규 / 2013-05-01
조연호 시인(2013)
악기(惡記) 5~10 / 조연호

두 개의 불 사이, 차이점은 이러한 것이다; 박무 속의 태양이 오래도록 주장해 비로소 우리의 눈에 사물에 대한 적응이라는 익숙한 빛을 건넬 때의 불과, 명백한 윤곽을 향할 때의 우리의 눈이 가진 명징이 달의 건너편에 의해 명징의 원천을 도움 받을 때의 불이 단지 사실의 행위 속에서도 그 행위의 중심이 자신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회상자의 의지에 의해 분별된다는 것.

악기(惡記) 5~10
조연호 / 2013-05-01
김성중(2013)
낯선 방들에서 보내는 편지 / 김성중

쿠바에서 멕시코로 날아오자 흑백 TV가 컬러 TV로 바뀐 것 같다. 자본주의의 화면, 대형 간판과 광고영상과 다국적기업의 심벌들이 커다랗게 떠오르는 화면, 나에게 익숙한 화면으로 말이다. 한인 민박집에서 첫날 여장을 풀자 뜨거운 물이 콸콸콸 나오는 게 ‘아깝다’는 생각부터 든다. 쿠바에서 묵은 아나의 카사에서는 딱 오 분만 더운물이 나왔기 때문에 나는 빨리 샤워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낯선 방들에서 보내는 편지
김성중 / 2013-05-01
김준현 시인(2013)
그 식당 외 1편 / 김준현

스피커에서 귀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테이프를 돌리면 찬바람이 감기고 얼룩이 짙은 요 위에 앉아 몸을 비틀면 드러나는 등뼈 마른기침 끝에 귀가 축축한데 반복되는 녹음으로 되돌리는 밤이면 몸이 몸을 기다리다 시동을 걸고 트럭이 오래된 자세로 녹을 앓는지 얼음 위로 생선이 덜덜 떨어 모텔 창문을 바라볼 때 몇 번을 하면 김이 서릴까

그 식당 외 1편
김준현 / 2013-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