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란 무엇인가 (제8회) / 김경욱

     장편연재_제8회     야구란 무엇인가   김경욱            여관 근처 기사식당에서 돈까스와 된장찌개로 아이와 자신의 배를 채운 사내는 염소의 흔적이 끊긴 곳으로, 목사가 일러준 동네로 차를 몰고 돌아간다. 가장 먼저 눈에 띈 부동산중개업소 앞에 차를 세운다.    불펜에서 꼼짝 말고 기다려.    싫어.    아이가 간밤에 무슨 꿈을 꿨는지, 꿈결에 무슨 낌새라도 챘는지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아빠는 선발투수고 진구는 구원투수잖아. 구원투수는 불펜에서 기다려야지.    선발투수가 계속 던질 수는 없어.    아이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한다. 사내는 말문이 막힌다. 혹을 떼려다 혹에게 보기 좋게 한방[…]

야구란 무엇인가 (제8회)
김경욱 / 2012-10-31
국가의 왼손 / 주원규

  국가의 왼손   주원규            1      나의 하나뿐인 작은아버지, 그가 다시 돌아온 건 정확히 일주일 만이었다. 작은아버지, 그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직접 현관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요란법석한 소리에 못 이겨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문 밖의 그가 작은아버지일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왜 하지 못했을까’라는 점을 돌이켜보면 그 감정은 괴이하게도 죄책감 탓이 컸다. 그랬다. 죄책감이 분명하다. 작은아버지가 돌아올 거란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으니까. 그 문제를 좀 더 근본적으로 들여다보면 작은아버지가 돌아오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에 대한 모종의 합의가 내재된 것이기도 했다.    작은아버지는[…]

국가의 왼손
주원규 / 2012-10-31
수태고지 / 이경

  수태고지1) 1) 〈기독교〉 마리아가 성령에 의하여 잉태하였음을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알린 일.   이경                “우리 앞에 있는 이 처녀, 소마와 관계한 자가 있느냐? 이 처녀에게 생명의 씨앗을 뿌린 자, 여기 있느냐?”    전도사가 신도들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성단에 오른 소마는 실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신도들은 죄 지은 사람처럼 두 손을 얌전히 가슴께에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파리가 소마의 콧등을 치고 날아갔다. 천막 밖 수챗구멍에는 시금치국과 부추 겉절이, 계란말이가 불어터진 밥풀 찌꺼기와 함께 어우러지고 있을 것이다. 십여 명의 기도원 신도들이 끼니때마다[…]

수태고지
이경 / 2012-10-31
스물두 개의 침대 / 방현희

  스물두 개의 침대   방현희                K의 연인이었던 그녀와 그렉안나가 만난 것은 K의 장례식장에서였다.    누군가 죽기엔 어울리지 않는 날씨였다. 더구나 두 여자가 들어서서는 안 되는 곳임을 알아채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이마에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걷기엔, 더욱 어울리지 않는 날이었다.    단풍이 몹시 진하게 들어서 장례식장 주변은 온통 꽃밭처럼 화사했고 햇살 역시 더없이 따끈했다. 둘 셋씩 짝 지어 장례식장을 찾은 여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눈웃음을 치며 어머, 벌써 이렇게 단풍이 들었네, 와, 너무 이쁘다, 하며 수다를 떨다가 서둘러 웃음을 지우고 어두컴컴한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스물두 개의 침대
방현희 / 2012-10-31
일본식 정원과 글쓰기의 미 / 강수미

     사유의 드로잉_제3회     일본식 정원과 글쓰기의 미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내가 교토에 가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 그곳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혹은 도시 전체가 일본 전통문화의 정수로 정교하게 꾸려진 그 유서 깊고 아름다운 곳에서 무엇이 가장 좋았냐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길가 하수도를 덮고 있는 대나무 덮개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참 아름다웠다고. 직사각형 하수도 구멍에 딱 맞는 길이로 잘린 중간 두께의 대나무들이 군더더기 없이 일렬로 반듯하게 묶여 있는 그 덮개에서 나는 일본인들이 사물을 대하는[…]

일본식 정원과 글쓰기의 미
강수미 / 2012-10-31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외 1편 / 허수경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잘 있니?    환각의 리사이클장에서 폐기되던 전생과 이생의 우리    그리고 미래의 오염된 희망으로 살아가다가 결국 낙엽이 된 우리    우리는 함께 철새들을 보냈네    죽음 어린 날개로 대륙을 횡단하던 여행자    먼 곳으로 떠나가는 모든 것들에게 입맞춤을 하면    우리의 낡은 몸에는 총살당한 입김만이 어렸네      잘 있니?    우리는 떨어지던 사과들이 곪아 가던 가을 풀밭에서    뭉그러지는 육체 속으로 기어 들어가    술 취하던 바람을 들었네    먼 시간 속에 시커멓게 앉아 있는 아버지    살해당한 아버지에게[…]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외 1편
허수경 / 2012-10-31
나의 가수 데뷔기 외 1편 / 박완호

    나의 가수 데뷔기          내가 가수로 데뷔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눈물 젖은 두만강을 좋아했던, 그러나    남 몰래 흥얼거릴 뿐 누구 앞에서 노래 부르기를    주저했던 엄마 때문, 바로 그날    딸내미 둘 낳고 결혼식 올린    시광이 아재 잔칫날 뒤풀이에서 엄마는    당연한 듯 내게 숟가락을 떠넘겼지    나의 첫 공연은 얼마나 유치하고 눈부셨던지    그날 이후 엄마가    시도 때도 없이 공짜로 써먹을 수 있는    싸구려 가수 하나를 얻은 대신 나는    언제라도 무대에 오를 준비가 된 무명 가수가 되었지   […]

나의 가수 데뷔기 외 1편
박완호 / 2012-10-31
라식 외 1편 / 이해원

    라식          오래된 시간이 안개로 태어났어요 초점 잃은 눈동자 위로 물체들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려요 몸을 훑고 가던 떨림이 물방울로 맺히기도 해요 아침저녁 안개의 눈을 꺼내 식염수에 담그지요 이제 충혈된 날들을 걷어내고 한 곳으로 초점을 모으고 싶어요      몇 겹의 안개를 걷어내는 동안 통증에 불안이 겹쳤어요 레이저에서 탈출한 빛이 각막 깊숙이 박혀요 잠을 눕혀도 툰드라의 백야가 펼쳐질까 두려워요 깜깜한 머릿속으로 흔들리는 시선이 길을 내며 지나가요 그곳을 지나야만 환한 태양이 뜬다는데,      얇아진 과거가 급류에 휩쓸릴까 눈알이 둥둥 떠내려갈까 흔들리던 날들, 이제 잘려 나간 각막으로 덮일[…]

라식 외 1편
이해원 / 2012-10-31
잉크 외 1편 / 이여원

    잉크          뾰족한 글씨가 담겨 있는 잉크병    뚜껑이 있는 글씨들이 들어 있는 파란 유리병    어쩌자고 이 밀교 같은 병을 집어 들었을까    생제르맹 거리 뒷골목 백 년도 더 된 문구점에서 사온 파란색 잉크 한 병    며칠간 배낭에서 물결처럼 찰랑거렸다      청자갈 같은 질서가 묻어나는 색    파란 보석 같은 잉크병      산의 꼭대기 끝으로 올라가는 봄    뾰족한 산 봉오리에서 파란 잉크를 흘리던    비행기 안에서 본 하늘    나뭇가지들마다 높은 색을 풀어내던 파란색 잉크      백 년도 더[…]

잉크 외 1편
이여원 / 2012-10-31
나는 광대다 / 장정희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나는 광대다
장정희 / 2012-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