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신부 외 1편 / 임곤택

     저녁의 新婦            해는 낮아져    담배 연기로 가릴 수 있구나, 저 붉은 것에게    고맙다고 말할까      우리가 고려했던 善意의 목록이 있고    손금에서 모래를 골라내는 일꾼들의 품삯이    속임수 없이 나누어진다      옆 사람의 뺨에서 쓸어내리는 더운 이삼 초      몇 글자 공책에 옮겨 적던 아이는 두꺼운 책을 덮고    일어서 창문을 톡 톡 두드린다      안녕, 아침의 까마귀    안녕, 오후의 이른 초저녁    안녕, 쫓기는 신부여              추신    – 감사의[…]

저녁의 신부 외 1편
임곤택 / 2012-08-26
다국적자 외 1편 / 이상협

     다국적자            세계 각국에서 나는 태어납니다    가난한 나라의 내가 아플 때    높은 나라의 나는 숨이 찹니다      나는 활선공이 됩니다    송전탑에 올라 감전처럼 마음과 마을을 잇습니다      높이를 세우는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이해하자 그것을 더더욱 설명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비를 기다립니다 비가 오고도 비를 기다립니다    이것 또한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극지의 내가 적도의 나를 생각하면    르완다의 내가 용산에서 식은땀이 납니다      나는 나와 잘 지내고 싶습니다    쉽게 죽었고 계절처럼 쉽게 재생됩니다[…]

다국적자 외 1편
이상협 / 2012-08-26
신부 외 1편 / 손택수

     신부            할머니 화장하는 거 처음 봐요    숫적어서 손과 얼굴 다 가리고 가마 속으로 들어가시는 당신    마흔아홉 해 청상 할머니는 어린 제게 물었지요    아가 아가 강 건너에 사랑하는 님이 있는데    뱃사공이 몸을 허락해야만 건네준다는구나    너는 몸을 허락한 여인을 어찌하겠느냐    그때 왜 저는 함부로 돌팔매를 던졌을까요    어린아이의 말에 당신은 또 왜 그리 쓸쓸해 하셨을까요    헌옷을 벗고 새옷으로 갈아입는 짧은 순간    잠시 드러난 알몸을 죽음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지구상 어디에 살고 있다는데    염을 하는 할머니 알몸을[…]

신부 외 1편
손택수 / 2012-08-26
하늘의 개 외 1편 / 류성훈

    하늘의 개            더 어두웠으면 좋겠다. 넉가래 쥔 손에 번지는 숨들을 잊힐 때까지. 더러운 별이여. 잠든 재앙처럼 굳이 붉은 얼굴이 아니어도. 불빛은 잠들어도 꿈꾸지 않는, 어두울수록 퍼지는 액(厄)을 키운다. 탄내가 난다. 내게 빛은 태울 때 자라나니 밤의 이름이 옅어지는 건 천구(天狗)가 가까운 증거.      여기 빈 길목에 쏟긴 체액은 시간의 종(種)과 멀었다. 그저 봄이 없어서 인간의 달력이라니. 밤의 지루(地壘)가 줄을 잇고 늘 어긋나게 서 있었으니. 짧고 단단한 목줄엔 책임이 없었으니. 침을 흘리며 된소리 하나 씹어 삼키지 못한 낮이 어떤 둔갑으로 거대한 무덤을 날아다닐지[…]

하늘의 개 외 1편
류성훈 / 2012-08-26
야구란 무엇인가 (제6회) / 김경욱

    장편연재_제6회   야구란 무엇인가   김경욱             용궁장의 조가비 침대에서 사내의 모로 누운 잠이 꿈을 꾼다. 꿈속에서 사내는 주사위를 던진다. 선행을 하면 고속도로를 타고 위로 올라가고 악행을 저지르면 뱀을 타고 미끄러지는 놀이판 위로. 1에서 출발해 100까지 먼저 올라가면 이기는 게임인데 사내의 말은 100에서 시작해 아래로 내려간다. 주사위를 던진다. 1의 눈이다. 한 칸 내려간다. 주사위를 던진다. 또 1의 눈이다. 나무를 타는 바람에 몇 칸 미끄러진다.(야호!) 주사위를 던진다. 1의 눈이 거푸 나온다. 1의 눈만 나오는 주사위, 외눈박이 주사위다. 실험에 매진해 몇 칸 올라간다. 과학자가 된다.(젠장!) 주사위는[…]

야구란 무엇인가 (제6회)
김경욱 / 2012-08-26
기록이 주는 교훈 / 편혜영

  기록이 주는 교훈   편혜영              94년 이후 처음이라고 합니다. 폭염 말이에요. 올해의 폭염이 참을 수 없이 힘들기만 한데, 94년도의 삼분의 일 수준이라고 하는 걸 보니, 94년에 말도 못하게 더웠나 봅니다. 우리 모두가 그 해 여름을 통과했을 텐데, 그 무더위를 어떻게 견뎠을까요. 개인적으로 94년도에 있었을 법한 몇 가지 일들이 떠오르는데, 날씨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끝내 떠오르질 않습니다. 아마 올해의 이 참혹한 무더위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그저 관측사 같은 기록 속에나 남겠지요.      지난 기록을 살펴보는 일은 그래서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기록 속의 일들을 보면[…]

기록이 주는 교훈
편혜영 / 2012-08-22
/ 김태형

  [연재 에세이]     별 ― 사막의 미학 3   김태형(글/사진)                낙타는 지평선을 건너가지 않는다      기운 햇살을 받은 데리스가 마른 잎을 반짝이고 있었다. 한 떼의 가축과 어린 목동이 말을 타고서 황금들판을 지나가고 나면 바람 소리만 남았다. 데리스의 앙상한 잎은 낙타만 먹는다. 겨울에 먹이가 부족할 때는 양과 염소가 눈 위에 솟아난 길쭉한 잎을 마지못해 먹기도 한다. 석양을 받아 지평선을 건너다보고 있는 낙타는 마른 데리스 빛을 닮았다.      몽골 신화를 보면 원래 낙타는 아름다운 뿔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사슴이 잔치에[…]

김태형 / 2012-08-01
돌아와, 그레텔. / 서미애

  [장르소설 특집]      돌아와, 그레텔.   서미애              길을 잃다      길이 끊어진 곳에 다다른 뒤에야 윤희는 자신의 기억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기억의 이정표 역할을 했던 갈림길의 커다란 느티나무는 시골길 어디에서나 불 수 있는 흔한 나무에 불과했다. 불완전한 기억에 의지해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고 믿고 기꺼이 운전 핸들을 꺾은 게 실수다.    돌아갈 기회는 있었다. 마주 오는 차라도 만나면 한쪽으로 피해야 하는 좁은 시멘트 길이 나타났을 때 왔던 길을 되돌려야 했다. 아니, 그나마 시멘트가 깔린 길이 끝나고 자동차 바퀴에 자갈이 툭툭[…]

돌아와, 그레텔.
서미애 / 2012-08-01
과부들 / 전건우

  [장르소설 특집]     과부들   전건우              집에 돌아오니 장모님이 와 계셨다. 장모님이 사시는 곳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여섯 시간씩 고속버스를 탄 뒤 늙은이 해소기침처럼 콜록거리며 달리는 기차에 올라서는 또 한 시간 정도 가야 이제 절반쯤 왔구나, 하는 곳이었다. 한 마디로 멀다는 거고 두 마디로 하자면, 웬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고는 절대 우리 집에 오실 일이 없다는 거다.    먼 길을 오시는 게 힘들었던지 노인네는 거실에서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언제 오신 거야?”    나는 턱짓으로 장모님을 가리키며 아내에게 물었다.    “아까, 저녁때.”[…]

과부들
전건우 / 2012-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