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웬즈데이 / 오한기

  더 웬즈데이   오한기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는 경기도 성남의 컴컴한 모텔 방에서 민수라는 여배우와 성관계를 갖던 도중 사망했다. 주간지 《더 웬즈데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사실들을 세세하게 가르쳐주었다. 사건 당일, 아버지와 민수는 선 그린 모텔 403호에 묵었다. 일곱 평가량의 평범한 모텔 방이었다. 그날 밤 그들이 나뒹굴었던 원목 침대 위에는 새하얀 담요가 깔려 있었다. 그 외에도 《더 웬즈데이》는 민수의 사진을 게재하는 데 두 면을 할애했다. 민수는 몸에 붙는 자주색 원피스를 입은 채 한껏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슴이 밋밋한 게 흠이었지만 도시 근교의 야산을[…]

더 웬즈데이
오한기 / 2012-05-31
고독한 인간 / 김태형

  [연재 에세이]     고독한 인간 ― 사막의 미학 1   김태형 (글/사진)             어워, 고대의 존재론     아무런 감동도 설렘도 없이 보낸 지난밤의 불편한 잠자리 때문이었는지 한시라도 빨리 울란바토르를 벗어나고 싶었다. 웃통을 벗어부친 덩치 큰 사내들이 문을 열어 놓고 마작을 치는 모습도, 밤늦게 무거운 슈트케이스를 끌고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튀어나온 어느 유럽 여자의 앙칼진 외국어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좁은 발코니에서 녹슨 철제 난간에 기대지도 못한 채 바라본 밤하늘도 역시 그저 철거를 기다리는 빈 건물처럼 어둠 속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

고독한 인간
김태형 / 2012-05-31
메트로년 외 1편 / 김별

    메트로년           그러니까 그때가 아마도 메트로년쯤이었을 것이다   왔다 갔다 하다가 너를 잃었다   지하 동굴에 매인 채로 사형수에게 달려드는 히드라의 마지막 머리처럼   밤마다 좌우로는 흔들리지 말 걸 그랬다   그래도 단조로운 벽지를 세는 와중에 예수가   나타나고 이후로 벌써 몇 천 박자,   어디서든 삼천박자 동방삭   박자가 단조로운 벽지무늬만을 기억하며 서툰 와중에   그러니까 그때가 서기 메트로년, 우리는 모두 어머니를 잃었다     엄마, 나는 박자 하나마다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을 불러 볼 거야,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륜,[…]

메트로년 외 1편
김별 / 2012-05-30
speakers 외 1편 / 신해욱

    speakers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사람이 시험에 합격한 것이라네. ― 카프카           “이제 그만 하자.”     그는 매번 똑같은 얼굴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을 한다.     차례를 기다려   假聲으로   이렇게 말을 한다.        *     그래. 나는 그의 말을 따르고 싶었다. 이제   그만 하자.     그가 뱉은 말의 뼈들이 흩어져 있는 무언극 속으로 들어가   내가 하지 않은   어떤 것을 후회하고 싶었다.     뼈가 없는 영혼처럼 모로 누워   다음과 다음다음과[…]

speakers 외 1편
신해욱 / 2012-05-30
B-612 외 1편 / 조동범

    B-612           두 개의 달이 떠오르고 태양은 오래도록 지지 않는다. 낯선 행성의 모래폭풍은 길고 지루했다. 사내는 이윽고 죽음을 직감한다. 지구는 멀었고, 극소량의 외로움과 극미량의 그리움을 견디면 마지막 순간은 잠시, 허기졌다. 지구로부터의 영상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내는 흐느끼지 않는다. 항공우주국으로부터의 장엄한 국가는 석양을 배경으로 엄숙했다. 사내는 합중국의 국가를 따라 부르며 바오밥나무와 사막에 추락한 오래 전의 조종사를 애써 기억해 낸다. 고개를 돌리면 우주는 아름다웠다. 문득 사막의 밤하늘이 생각났지만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그리움이 문득 서글펐다. 오래 전에 잊힌 사랑을 떠올리며 사내는 어느덧 죽음에 이르렀음을 직감한다. 항공우주국은 행성의[…]

B-612 외 1편
조동범 / 2012-05-30
말에 대한 생각 외 1편 / 천양희

    말에 대한 생각           말이 날마다 나를 찾아온다   내가 그토록 말에 봉사하사   말솜씨와 말놀이를 말벗처럼 알았더니   어느덧 말꾼이 되었다   말에 몸 바쳐   예순아홉 번 허울을 쓴 내게   굽이굽이 고비를 넘게 하고   길고도 짧은 반성문을 쓰게 하네   가끔 나는   반성문을 반송문으로 잘못 읽는다   모든 것은 오래되면 변하기 마련인데   말만은 그렇지가 않다   세상에 나쁜 꽃말은 없고   좋은 헛말도 없는 것인지   나는 지금 말로써 업을 짓는데   말은 제 온몸으로 사원이 된다  […]

말에 대한 생각 외 1편
천양희 / 2012-05-30
식은 사과의 말 외 1편 / 길상호

    식은 사과의 말           나는 심장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린 사람, 몇 가닥 혈관만 남은 가지 끝에서 익기도 전에 물러버린 행성입니다. 당신의 맥박을 찾아 가끔 링거 줄에 맺혔다 떨어지는 유성의 힘으로 하루를 돌리고 나면 곪은 상처만 하나 더 돋았습니다. 도려낸 살점을 블랙홀에서 날아온 새들의 먹이로 건네주는 저녁, 발그레한 꽃잎의 기억은 노을 속으로 떨어져 쌓입니다. 한 겹 더 얇아진 중력으로는 이제 어떤 꿀벌도 부를 수 없습니다. 귓가에서 윙윙거리던 별들도 닿을 수 없는 거리까지 멀어지고, 이제 벌레들이 그려 넣던 미로까지 막혀버리면 궤도를 지우고 잠들겠지요. 바람이 흔들 때마다[…]

식은 사과의 말 외 1편
길상호 / 2012-05-28
일상의 무한한 혁명에게 / 김선우&이은선&전석순

  [기획특집 인터뷰]     일상의 무한한 혁명에게 ─ 김선우 시인 인터뷰     ● 일시 : 2012. 4. ● 장소 : 창비북카페 ● 진행 : 이은선, 전석순(소설가) ● 정리 : 이은선(소설가)       나(이은선)와 전석순 작가는 83년생 동갑내기다. 학교는 다르지만 학과는 같고, 02 즉 산소학번(아, 우리가 정말 산소처럼 풋풋했을까?)이 되어 새내기라는 꼬리표를 같은 시기에 달았다. 질풍과 노도 그리고 방랑과 역경의 시기를 통과했지만 아직도 마음은 이십대라 주장하며 서른의 초입에 함께 들어선 사이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굉장히 많은 시간을 함께한 것 같지만, 등단을 해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지 이제 겨우[…]

일상의 무한한 혁명에게
김선우&이은선&전석순 / 2012-05-28
문학을 배달하는 소설가 하성란 / 하성란&주하림

  [기획특집 인터뷰]     문학을 배달하는 소설가  하성란 ─ 소설가 하성란 인터뷰     ● 일시 : 2012. 2. ● 장소 : 홍대 앞 카페 ● 진행/정리 : 주하림(시인)         1996년 단편소설 「풀」로 등단한 이후 『루빈의 술잔』, 『웨하스』, 『삿뽀로 여인숙』, 최근 발표한 『A』까지. 동인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고, 사실주의적인 묘사와 삶의 이면을 치밀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며 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하성란 소설가를 만났다. 유독 매섭던 한파가 지나간 봄날 같던 오후 세 시. 홍대 한복판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만난 하성란 소설가는 체호프[…]

문학을 배달하는 소설가 하성란
하성란&주하림 / 2012-05-28
[강연록] 시간의 두 얼굴 /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제2회_ 소설가 윤성희 편     [강연록] 시간의 두 얼굴 ―자서전들 씁시다―   김용규(철학자)         1     여러분은 조금 전에 196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뮈엘 베케트(S. Becket, 1906~1989)의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를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작품을 매개로 철학자들이 보통 ‘시간성(時間性)’이라고 부르는 ‘시간의 본질’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시간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살펴보자는 거지요.   그럼 우선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를 잠시 되짚어 볼까요? 이 작품은 베케트가 1958년에 발표한 단막극입니다.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고도를 기다리며〉(1953)를 쓴[…]

[강연록] 시간의 두 얼굴
김용규 / 2012-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