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문 / 서유미

  검은 문   서유미               211번은 일어나자마자 침대 옆의 벽으로 다가갔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그는 벽에 사선을 하나 그었다. 다섯 개씩 묶인 표시는 꽤 되지만 그 수가 정확한 건 아니다. 처음부터 표시를 남긴 게 아니고 남기기 시작한 후에도 버릇이 붙지 않아 잊은 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걸 뭘 세고 있냐?”   123번은 식전부터 병에서 꺼낸 사탕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211번이 처음 벽에 표시하는 걸 봤을 때도 그의 반응은 비슷했다.   이곳에서는 날짜를 새기고 세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211번도 알고 있다. 벽의 구석구석에는[…]

검은 문
서유미 / 2012-02-29
이해학개론 / 이갑수

  이해학개론   이갑수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두 물체 사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의 질점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인력이 작용한다. 유럽과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는 뉴턴이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 법칙을 생각해 냈다는 낭설이 돌고 있다. 아마도 북유럽의 세계수 신화와 관련이 있는 소문일 것이다. 그러나 뉴턴은 사과나무 근처에도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곱 살 때 벌레 먹은 사과를 먹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사과에는 쐐기밤나비의 유충이 들어 있었는데, 그로 인해 뉴턴은 사흘 밤낮을 고열에 시달리다 겨우 깨어났다. 일부[…]

이해학개론
이갑수 / 2012-02-29
모형 외 1편 / 유계영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2년 젊은 시인들       유계영     모형           나의 기분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완전히 쫓겨난 어둠에 관한 이야기   상자는 무언가 담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지고도   비우는 일에만 계속 쓰였듯   이 방의 전개도는 거대한 착각의 모양을 본떴다     네가 나누어 놓은 이목구비가 마음에 들 리 없다   남들이 다 모를 때   내가 갖게 될 노인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던 나는   간단히는 죽지 않을 자신이 있다     기분에 비해 너무 작은 입으로   무슨[…]

모형 외 1편
유계영 / 2012-02-29
노을 외 1편 / 성동혁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2년 젊은 시인들       성동혁    노을           살인자들의 마을에 과수원이 생겼다 살인자가 살인자를 죽이고 산 살인자가 살인자를 죽인 살인자를 죽이고 엉킨 가지들은 던져 놓은 그물 같았다     석류가 웃돌았네     석류를 따먹으며 살인자들만 부르는 노래를 엿들은 바람 과수원을 나올 때 팔이 없어진 바람     석류를 만지고 돌아오는 길엔 모든 것에 살기가 느껴졌다 과수원의 박동이 짐승처럼 움직였다 작은 짐승에게 무거운 돌을 던지며 과수원과 가까워졌다     명절이면 텅 빈 마을에 석류가 웃돌았다 명절이 지나고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노을 외 1편
성동혁 / 2012-02-29
거대한 난쟁이 외 1편 / 김재훈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2년 젊은 시인들       김재훈    거대한 난쟁이           나는 우는 법을 어깨 너머로 배웠다     7초마다 한 종의 생물이 사라진다는 문장을 읽은 밤     사라지는 생물보다 빨리 위로받고 싶어서 고해소로 달려갔다   나는 나를 모욕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해소에는 거대한 난쟁이가 숨어 꾸역꾸역 세상을 삼키고 있었다     나는 거대한 난쟁이에게 삼켜져 창자 속으로   떨어지면서 생각했다 거대한 난쟁이는 거인일까 난쟁이일까     나는 창자 속의 기생충들과 싸우다 지쳐버렸고,   거인이든 난쟁이든 간에 장이 더럽게 튼튼하구나 소리[…]

거대한 난쟁이 외 1편
김재훈 / 2012-02-29
야구란 무엇인가 [연재를 시작하며] / 김경욱

   연재를 시작하며            당신에게 야구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는 기쁨이고 누군가에게는 슬픔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미래이고 누군가에게는 과거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영광이고 누군가에게는 치욕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희망이고 누군가에게는 절망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추억이고 누군가에게는 악몽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밥이고 누군가에게는 술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불이고 누군가에게는 물일 수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집이고 누군가에게는 길일 수 있다.     여기 집을 떠나 낯선 길 위에 선 두 남자가 있다.   세상은 이들을 아버지와 아들이라 부른다.   아버지에게는 해야만 하는[…]

야구란 무엇인가 [연재를 시작하며]
김경욱 / 2012-02-27
물로 빚은 우주 외 1편 / 김재근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2년 젊은 시인들       김재근    물로 빚은 우주   ─ 우포         어느 날     눈동자에 얼음이 낀다   머리를 풀고   죽은 새에게 저녁의 안부를 묻는다     울음이 아름다워   물의 행로를 따라 지구 저편이 물들고     한번쯤, 자신이 한 말은 돌아와   제방을 떠도는   바람이 된다 입술이 휘도록   휘파람 불고   저녁만 있는 마을   물을 베고   아이들이 불을 피운다       외계의 시간     태어나지 말아야 할 밤이 연속으로 온다  […]

물로 빚은 우주 외 1편
김재근 / 2012-02-27
웅덩이 외 1편 / 김성태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2년 젊은 시인들       김성태    웅덩이           웅덩이에 발이 빠졌다.     걸을수록 웅덩이가 늘어난다.     나는 늘 하나의 길을 걷지만 너는 늘 삽을 들고 함정을 파기에 내가 딛는 발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웅덩이에서 빠져나오기 바빠서 나는 지속된다.     완전히 빠져 보지 못한 사람은 별들이 묻혀 있는 웜홀을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언젠가 웅덩이에 묻힌 적이 있다.     연애가 파놓은 웅덩이였는지 대학이 파놓은 웅덩이였는지 나라님이 파놓은 웅덩이였는지  […]

웅덩이 외 1편
김성태 / 2012-02-27
물구나무꽃 외 1편 / 황혜경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2년 젊은 시인들       황혜경    물구나무꽃           엄마를 할머니라고 인정하기 싫은 것처럼   엄마는 내가 꽃인 줄 아나 봐   엄마는 찌그러진 씨앗이 몇 개인지도 모르고   엄마는 그리다 만 동그라미가 몇 개인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사뿐사뿐 몰래 놓고 가야지 다음은 네 차례야 수건은 돌고     내 숨이 내 숨으로만 되지 않을 때가 있듯이 그러다 보면 좀 어때, 가 되어 가는 타협의 요일들 허용과 용납이 헤프다 오기도 포기처럼 오기도 하고 나서는     꼭 해야 할 일과[…]

물구나무꽃 외 1편
황혜경 / 2012-02-27
구원 외 1편 / 황인찬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2년 젊은 시인들      황인찬    구원           나는 나의 사냥개들을 풀어 놓았고, 그것들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멈춰, 기다려,   그렇게 말하고는 잘했다고 말해 줘야 하는데     뜨겁던 총신이 식었고 어느새 새들도 울지 않았다   나는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숲은 너무 어두워서 그림자가 보이지 않고,   나는 나의 사냥개들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저 토끼 한 마리를 잡고 싶었을 뿐이다   이제는 개를 생각하는 내가 있었다   골똘하게     생각이라는 것을[…]

구원 외 1편
황인찬 / 2012-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