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부문] 즐거운 생일파티 / 황형선

  [2010년 공모마당 연간 최우수상 수상작]     즐거운 생일파티   황형선         오늘은 마을의 마지막 생일파티를 벌여요 설레는 마음에 옆집 순이가 훌쩍거리기 시작해요 집집마다 하얀 벽지 크림들이 더 누래지기 전에 어서 케이크를 차려야 해요 건너 건넛집 할배는 주름진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담아요 무언가를 그러쥐려는 손아귀처럼 옷들이 꽉 주름으로 뭉쳐 있어요 놓칠 수 없음은 저렇듯 쉽사리 주름을 풀지 않는가 봐요 언제 녹아 사라질지 모르는 초콜릿 지붕들이 퍼먹기 편하게 놓여 있네요 집집마다 꽂힌 나무들은 마을의 마지막 한 생의 초로 꽂혀 있어요 그 가닥 풀린 가지들의 심지에 저녁이 타오르기 시작해요[…]

[시 부문] 즐거운 생일파티
황형선 / 2011-01-27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다. / 손홍규

  [작가가 읽은 책]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다.   –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열린책들, 2010)     손홍규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방에서 보낸다. 딱히 갈 곳도 없고 나를 찾는 이도 없어서다. 책상 앞에 앉으면 되도록 고개를 들지 않는다. 고개를 들면 방이 훤히 보여서이고 그러면 답답해서다. 내 방은 감옥의 혼거방만 한 크기여서 원하든 원치 않든 내면을 들여다보기 좋다. 그러나 이따금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면서 동시에 세계와 대면하기도 한다. 글쓰기처럼 독서 역시 그런 행위다. 나는 아직 행복한 책읽기가 무언지 잘 모른다. 내게 독서는 고달픈 행위였다[…]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다.
손홍규 / 2011-01-27
사고하지 마라, 반응하라. 창조하지 마라, 연결하라 – 세번째 / 함성호

  [에세이 테라스]   사고하지 마라, 반응하라 창조하지 마라, 연결하라   – 세 번째   함성호           이것은 에셔의 판화입니다. 제가 앞서 ‘습합’이란 말을 했는데 에셔의 판화에는 그것보다 더 복잡한 습합의 방법인 재기 순환의 논리란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괴델이란 수학자에 의해서 정의된 적이 있는데, 이 재기 순환의 논리와 습합의 문제가 이토록 적절히 표현된 예는 찾기 힘들 겁니다. 여기서 흑은 백의 바탕이 되고, 백은 흑의 바탕이 됩니다. 서로가 서로의 바탕이 되면서도 각자의 고유성을 보존합니다. 저는 ‘끝난 바둑 이론’이란 명명으로 이 습합의 문제를 에셔와는 다른[…]

사고하지 마라, 반응하라. 창조하지 마라, 연결하라 - 세번째
함성호 / 2011-01-27
까롭까 / 이은선

  까롭까 коробка, 러시아어. ‘상자’라는 뜻이다 – 수로2   이은선        배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인간들이 나에게 하는 거수 경례였다. 홉뜬 두 눈과 절도 있는 동작으로 서둘러 이마 위에 붙여 놓은 오른팔들. 내 속에 대령의 팔뚝을 던지던 얼굴이 보였다. 뚝뚝 끊어 놓은 대령의 내장을 모아서 팔뚝 위에 얹어 두던 손들도 있었다. 갑판의 난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간들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갑판 여기저기 고여 있는 대령의 피에 신발들이 찌걱대는 소리, 혀 꼬인 채 부르는 노랫소리, 술이 엎질러지는 소리들이 모두 배 위로 날아올랐다. 나는 갑판 한쪽에 가만히 몸을 붙이고[…]

까롭까
이은선 / 2011-01-26
그들이 다가올 때 / 구경미

  그들이 다가올 때   구경미    1   119 구급대원들이 도착한 것은 새벽 두 시 무렵이었다. 우리가 한강으로 배를 끌고 나간 지 이십여 분 만이었다. 둔치에 선 구급대원들이 우리를 향해 빛줄기를 쏘며 얼른 돌아오라고 소리 질렀다. 괜찮아 아무도 모를 거야, 했던 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어두워서 오리배에 부딪히는 물소리만 아니라면 그것이 물인지 아스팔트 바닥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무서웠다. 물이 아니라 어둠이 무서웠다. 그래서 뛰어들지 못했다. 형에게는 객기였고 내게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정이었다. 우리는 초저녁부터 한강 둔치에 앉아 술을 마셨다. 얘기는 주로 형이 했다. 나는 듣는 척하면서 듣지[…]

그들이 다가올 때
구경미 / 2011-01-26
탐닉 / 김유철

  탐닉   김유철          1     8층 높이에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병원은 밋밋한 모양에 별다른 인상을 주는 외형은 아니다. 1층 현관 옆에는 응급실과 원무과가 마주보고 있고 그 앞으로 환자 대기실, 내과, 외과, 신경외과, 주사실이 나란히 붙어 있다. 내가 근무하게 될 방사선실은 2층이다. 복도 왼편엔 종합검진실이 있고 그 옆에는 임상병리실과 화장실이 나란히 붙어 있다. 그리고 복도 오른쪽 끝에 방사선실이 있다. 방사선실은 크게 CT실과 일반 촬영실로 나뉜다. “연락은 받았네……. 생각보다 나이가 많군.” 실장이 악수를 청한다. 나이에 비해 탄력 있는 피부와 쌍꺼풀진 눈동자가 이상하리만큼 차갑게 느껴진다. 나는 말없이[…]

탐닉
김유철 / 2011-01-26
활짝 / 김혜수

  활짝   김혜수         카메라 들이대자   노 포토 노 포토 연발하며   완강하게 손사래치던,   사진 찍히면 자신의 영혼 빼앗긴다고   굳게 믿는   이슬람 사내 뒤로   어디선가 떼거지로 몰려와   목 길게 빼고   카메라에 얼굴 들이대며   활짝 꽃 피던   개망초, 금꿩다리, 까마중   끈끈이주걱 같은   이국의 코흘리개 야생화들     《문장웹진 2월호》        

활짝
김혜수 / 2011-01-26
폐타이어를 끌고 달리는 아이를 보며 / 윤재철

  폐타이어를 끌고 달리는 아이를 보며   윤재철           야구부 연습장 담벼락엔 누군가 ‘미쳐야 이긴다’ 크게 써 붙이고 다른 친구들 투구 연습도 하고 배팅 연습도 하는 저쪽 한구석에서 너는 허리에 끈 매달아 폐타이어 끌며 달리고 있다   전력질주해서 달려갔다가는 전력질주해서 달려오고 수도 없이 달려갔다가는 수도 없이 달려오고 항시 네 엉덩이 뒤에 매달려 있는 폐타이어   왜 달려야 하는가를 묻는 것은 아니다 단지 슬플 때가 있다   즐겁게 미쳐야 미칠 수 있을까 고통스럽게 미쳐야 미칠 수 있을까 즐겁게 미쳐야 이길 수 있을까 고통스럽게 미쳐야 이길 수 있을까[…]

폐타이어를 끌고 달리는 아이를 보며
윤재철 / 2011-01-26
부두에서 / 이세기

  부두에서   이세기         인당수 전설이 서려 있는 수심 깊은 바다를 건너온   부두에 내리는 옹진에서 오는 섬사람을 보면 대대로 이 지방 사람은 마음 쉴 날이 없다   포성이 멈추지 않는 얼어붙은 바다는 언제 휴전이 끝날 것인가   왜 내가 태어난 바다는 이토록 사나운가     《문장웹진 2월호》        

부두에서
이세기 / 2011-01-26
얼음이 산벚나무 발목을 꽉 / 배한봉

  얼음이 산벚나무 발목을 꽉   배한봉         비음산 용추계곡 소(沼)가 허연 얼음으로, 늙은 산벚나무 발목을 꽉 붙잡고 있다   연분홍 봄날을 계류로 흘려보내기만 했던 소(沼)가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고 겨울부터 미리 산벚나무를 온 힘으로 꽉 붙잡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제 더는 용서 못한다고 이웃 영진이 할매가 바람난 영감님 허리춤을 꽉 붙잡고 있는 것이다   수태가 저승꽃같이 말라붙은 산벚나무 그래도 역정 한 번 내지 않는다, 뼛속 바람 소리가 거칠게 꺾어져도 삐쩍 마른 팔로 시린 하늘이나 휘휘 젓는   산벚나무 그 발목 붙잡고 입 꽉 다문[…]

얼음이 산벚나무 발목을 꽉
배한봉 / 2011-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