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물물교환 / 김은주

  안식일의 물물교환   김은주             처음 발견한 색으로 그날의 요일을 결정하는     엿새치의 일력, 뜯어낼수록 부윰한 뼈대가 드러나는     짐승의 가죽 소파, 잘 길들어 사람의 사람 아닌 형상을 기억하고 있는     전나무로 만든 숯, 연기를 피우면 비로소 나이테가 사라지는     이웃들의 비밀성서, 얼룩 묻은 담요로 침묵을 덮어 두는     오래 보관된 머리칼, 백발로 변하기 전에 태워버려야 할     허름한 지도책, 살색과 하늘색만으로 모든 경로가 이어진     해질녘 지평선, 부종을 앓는 구름의 차도를 가늠해 볼     양젖이[…]

안식일의 물물교환
김은주 / 2011-10-31
침묵들 / 김원경

  침묵들   김원경         죽은 자작나무에서 버섯이 자라는 걸 본 적이 있다 죽은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은 말이 있어 손톱을 기르는 것처럼   육체가 조금씩 액체가 되고 수증기가 되고 말을 잃고 미세하게 돋아나는 불안을 얘기하자 나는 간신히 침묵이 떨어지는 순간을 본다   나의 이 불안이 누군가 죽음 이후에 심어 놓은 미세한 균사체가 아닐까 의심될 즈음 나는 자꾸만 투명한 내장을 꺼내서 최후의 수분까지 증발시키려는 순간과 악수한다   왜일까 왜 그래야만 할까를 생각할 때 이미 난 온몸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건 세수할 때마다 떨어뜨린 긴 속눈썹 파르르[…]

침묵들
김원경 / 2011-10-31
장풍의 역사 / 노희준

  장풍의 역사   노희준        아마도 그것은 위기에 몰린 입시학원장의 책상 위에서 탄생하지 않았을까. 단기간에 자신의 노하우를 학생들에게 모두 전수하는 건 미친 짓이었지만 일단은 빚부터 갚고 보자는 심산이었겠지. 그런데 예상 밖의 빅 히트를 친 거다. 사실 효과를 본 건 극소수였으나, 너도 나도 그 몇 명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몰려들었을 거야.   민들레 씨처럼, 아니면 민들레 씨인 척하는 버들개지 솜꽃가루처럼, 녀석은 치맛바람을 타고 엄마들의 ‘나와바리’ 곳곳에 씨를 퍼뜨렸으리라. 뿐이랴. 바깥양반들의 밤 문화를 휩쓸고, 아이들의 일상으로 되돌아와 온갖 형태의 변종으로 번성하는,     때는 바야흐로 속성(速成)의 전성시대였다.[…]

장풍의 역사
노희준 / 2011-10-28
마음의 마음 / 이우성

    마음의 마음     이우성            겨울아 펭귄에게 닿기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날아서    나는 구름에 가지 구름은 말을 해 조용히    조용히 라고 사람에게 전할 때 나는 거의 남지 않았어    붉은 사과를 품고 배가 볼록한 아이들이 걸어간다 볼록한 아이들이 떠오른다    바람아 너의 뿌리에서 나는 자랐어    너의 뿌리는 나무들의 뿌리지    네가 지나온 길을 내가 지나왔어 네가 울 때 나는 아이였고 내가 울 때 너는 어른이 되어야 했지 그러나 바람아 너는 돌아볼 수 없고 너를 볼 수 없어    네가[…]

마음의 마음
이우성 / 2011-10-28
지빠귀를 시작할 것 / 김안

  지빠귀를 시작할 것   김안           성난 지빠귀 한 마리 녹슨 나무 꼭대기에 올라 모두가 버린 모두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노래는 지빠귀의 몫. 입 없는 사람들, 포식자가 되는 법을 잊어버린 맹수들이 매일 밤 몸 바깥으로 말들을 밀어내다가 저마다의 말과 말 사이에서 길을 잃어도 노래는 없고 태초의 독백만 내일 또다시 반복된다. 지빠귀의 언어로, 지빠귀의 언어로. 무감(無感)과 무통(無痛)의 천국에서 사람의 입을 만드는 것은 비명일 뿐. 그러니 지빠귀의 언어로 난폭하게 자라나는 납빛 건물 꼭대기에 오를 것. 그리고 흉골 속 낡은 악기를 꺼내 이 계절을 멈출 것. 말이 아닌[…]

지빠귀를 시작할 것
김안 / 2011-10-28
그리고 바다 끝에서부터 물이 들어온다 / 이원

  그리고 바다 끝에서부터 물이 들어온다   이원         팔월과 시월 사이 사과가 익는다 접시 위에 칼을 놓는다 창에 얼굴이 반만 나타난다   바다와 나란히 비행기가 지나간다 허공은 목구멍을 사과 속에 벗어 두고 나온다 유방들의 둘레가 헐렁해진다 팔월과 시월 사이 사과가 익어 가면서   빛을 빠져나온 것들은 모두 칼질이 되어 있다 칼은 너무 오래 찌르고 있다 아는 얼굴이라고 했다   비탈에는 붉어지는 사과가 주렁주렁하다 덜 익은 사과가 기억으로부터 뚝 떨어진다 허공에는 벌어진 입   아래를 열면 그곳에 산 채로 아이들이 들어 있다 아이들은 허공에서 나오지 않는다 바람이[…]

그리고 바다 끝에서부터 물이 들어온다
이원 / 2011-10-28
공동체 / 박진성

  공동체   박진성         기다란 책장으로 집을 지었지   우리 살던 작은 집에 담장도 없이 지붕도 없이 나무만 있던 살림살이.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은 나무의 계절들을 지나서 우리는 책을 나눠 가졌지   바람에 그었던 밑줄들아 구름을 잡아 놓던 동그라미들아 내 책에 묻은 너의 지문들아                내가 꽂아 놓은 꽃잎은 네가 간직할게                                나눌 수 없는 가난은 새들이 먹을게   내 손가락이 접은 위쪽 모서리 네 손가락이 접은 아래쪽 모서리   같은 페이지 겨누고 있는 모서리를 오래 치어다본다 어떤 시에 너는 모서리를 접고 있는지   나무를, 시를[…]

공동체
박진성 / 2011-10-28
대치동 보디가드 / 김지유

  대치동 보디가드   김지유         소주 반병과 안정제 위장에 담고 영재사관학원버스 꽁무니를 따른다 몽당연필 같은 너는 안동 권 씨 추밀공파 태사공 몇 대손, 행(幸)은 능히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했다며 성을 하사하신 태조 왕건의 품에 남겨야 했거늘. 밤마다 고사리 손으로 성기를 키우는 왕자여 나의 병기여 물려받은 기둥뿌리 다 뽑아먹고도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더구나, 난쟁이 네 아비를 자근자근 밟아서라도 돈이면 장땡인 나라의 노름꾼으로 쑥쑥, 키 대신 목이라도 키워 줄게 이마에 붙인 팔광으로 하늘 밝히고 1번이 일등이 아니라며 너의 성을 노리는 비적들 가랑이를 찢어 놓을게 섯다! 그래 삼팔광땡으로 섯다를 외칠게[…]

대치동 보디가드
김지유 / 2011-10-28
강물 / 장승리

  강물   장승리         멈출 수 없던 양 날개가 머리 위에서 붙었다 이런 순간에 관객이 없다니 슬펐지만 지겹다고 말했다 지겹다고 말했더니 하품이 나왔다 밸런스가 절실했지만 한쪽 귀는 열 수 없는 문이 되었고 다른 쪽 귀는 가라앉는 돌멩이의 검은 침묵 쪽으로 계속 자라는 중 양 백 마리 양 아흔아홉 마리 여덟 마리 일곱 마리 양의 머릿수를 세다 마지막 양이 될 운명 아무리 뒤를 돌아보아도 머리털 끝 하나 변하지 않았다 지겨웠지만 슬프다고 말했다 슬프다고 말했더니 눈물이 흘렀다 볼 수 없어 보고 싶은 얼굴을 떠올렸다 거대한 단수 앞에서 얼어붙었다[…]

강물
장승리 / 2011-10-28
은밀한 낭독 / 라유경

  은밀한 낭독   라유경          목소리가 마이크 속으로 흡수되어 들어간다. 잡음 제거 기능이 탁월한 지향성 마이크는 오로지 목소리만 잡아낸다. 마이크와 입술 사이에 주먹만큼의 거리를 유지한다. 내 목소리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녹음을 주문한 사람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마이크 앞에 서면 몸 전체에 긴장이 스며든다. 무엇보다 또박또박 발음해야 하므로 입술과 혀를 움직이며 긴장을 푼다. 컴퓨터 모니터에 나타난 스펙트로그램이 목소리의 높낮이에 따라서 변화한다. 입술이 벌려졌다 다물어지는 것처럼 주파수 대역폭이 원을 그리며 늘어났다 줄어든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원고를 건드리지 않고 눈으로 보기만 한다. ‘책을 읽는 행위는 작가의 머릿속으로[…]

은밀한 낭독
라유경 / 2011-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