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들의 밤 / 좌백

  호랑이들의 밤   좌백     정말 재밌는 것은…… 하하…… 몇 년에 한 번씩 도사들이 모두 지리산에 모인다는 거예요.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휴전선을 넘어 백두산에서, 묘향산에서, 금강산에서 달려온다는 군요. 그렇게 모여서는 한민족 도사회합을 열고는 중요사항을 의논한다지요. 그게 끝나면 서울로 온대요. 남대문 앞에. 아니, 숭례문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거기 모여서 남대문을 뛰어넘는 시합을 한대요.       ─ 남대문 뛰어넘기   “어렸을 때 쿵푸 도장에 다닌 일이 있었어요. 당랑권이다, 태극권이다 뭐 이렇게 정해놓지 않고 뭐든지 가르치는 그런 도장이었죠. 당시가 80년대 초반이었으니까……, 흠, 성룡이 나온 영화 취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였거든요.[…]

호랑이들의 밤
좌백 / 2011-09-30
로레나 / 김혜나

  로레나   김혜나       1   로레나. 그녀는 나에게, 로레나, 라고 말했다. 나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혓바닥을 잔뜩 말아 “로레에나.”라고 발음해 보고는 객쩍어 웃었다. 로레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용희 삼촌은 그런 내가 우스웠는지 푸핫, 하는 소리를 냈다. 내 옆자리의 은정은 “웬 혀를 그렇게 부담스럽게 굴려, 언니.” 하며 표정을 찡그렸고, 우리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로레나는 그저 가만히 웃었다. 용희 삼촌은 오른쪽 팔을 탁자에 올려 두고 왼손으로만 소주병을 집어 종이컵에 따르며 “비밀 하나 알려줄까?”라고 말했다. “한국 사람들, 발음 때문에 자꾸만 고민하는데 말이야, ‘아르[r]’와 ‘엘[l]’, 사실 아주 간단히 구별할 수 있어.[…]

로레나
김혜나 / 2011-09-30
아름다운 남자 / 전성혁

  아름다운 남자   전성혁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우연한 만남이었다. 며칠째 늦은 밤까지 토익 동영상 강의를 듣다가 집을 뛰쳐나간 뒤였으니까. 때마침 하나뿐이던 선풍기도 과열로 고장이 나버렸다. 정말이지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던 하루였다. 다행히 시원한 밤바람을 쐴 수 있는 한강공원이 집 근처에 있었다. 한강 산책과 야경만큼은 파리의 센 강도 독일의 라인 강도 부럽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하늘을 보니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장우산 하나와 가벼운 샌들만 신은 채 한강을 향했다. 시계는 자정을 가리켰다. 이 시간에 집 밖으로 나온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물론 후덥지근한 여름밤을 에어컨도 없는 작은 방에서[…]

아름다운 남자
전성혁 / 2011-09-30
발화 / 황인찬

  발화   황인찬         중간이 끊긴 대파가 자라고 있다 멎었던 음악이 다시 들릴 때는 안도하게 된다   이런 오전의 익숙함이 어색하다   너는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 왜 나를 떠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거지?   통통거리는 소리는 도마가 내는 소리다 여기로 보내라는 소리는 영화 속 남자들이 내는 소리고   어떤 파에는 어떤 파꽃이 매달리게 되어 있다 어떤 순간에나 시각이 변경되고 있다   저 영화는 절정이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이 끝나버린다 그런 익숙함과 무관하게   찌개가 혼자서 넘쳐흐르고 있다 불이 혼자서 꺼지고 있다   나는 너에게 전화를[…]

발화
황인찬 / 2011-09-30
울기엔 좀 애매한 / 정창준

  울기엔 좀 애매한*   정창준         연애의 계약기간 역시 좀처럼 연장되지 않았다. 쉽게 해고를 통보 받았고 쉽게 수긍했다. 사랑에서조차 나에게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자리만 허락되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라는 위안은 왠지 반복될수록 서글펐다. 흔한 이별 방식이었고 번번이 슬펐지만 언제나 울기엔 좀 애매했다.   소개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했지만 입사면접만큼 까다롭거나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만큼 모호했다. 가지지 못한 것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같았기 때문이다. 간혹 만나고 싶은 여자도 있었지만 인터넷쇼핑몰의 카트에 오랫동안 담겨 있다가 자동으로 삭제되는 다른 물건들처럼 곧 지워졌다. 어차피 내게는 선망할 수 있는 권리만 허락되어[…]

울기엔 좀 애매한
정창준 / 2011-09-30
괴물에게 / 이선욱

  괴물에게   이선욱         물러가라, 물러가라 한 무리의 일그러진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면 물러가라는 그 말처럼; 직설적으로 날아온 돌들은 그대의 창문을 뚫고 반짝이는 파편들과 함께 쏟아져 내릴 것이다 본능적으로 어두운 구석을 향해 몸을 웅크리겠지만 그런 식으로 보호할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단단한 돌보다 더 단단한 통증이 박힐 것이다 박힌 채로 그대의 몸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물러가라는 그 말처럼; 아니 물러가라는 말 그대로 왜 물러가야 하는지 알 수 없겠지 바닥을 딛고 부정하듯 무거운 고개를 흔들겠지 굳어진 몸을 일으키다 불현듯 슬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로지[…]

괴물에게
이선욱 / 2011-09-30
트윈 베드룸 / 남궁선

  트윈 베드룸   남궁선         바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내륙, 미라의 심장   햇살이 나를 무균처리하는 각혈하는 李箱의 병실 같은, 습도 0의 침실   침이 고이지 않도록 조심 우리는 우리의 입술을 감추고 키스하지 않네   우리의 눈물이 사라져 가는 것은 손으로 빨아 널은 속옷이 말라 가는 것처럼 시간의 뼈를 남기고   하얀 종이슬리퍼 두 켤레 하나는 밤에 신고 하나는 아침에 신고   오후에는 내 속눈썹보다 길게 자란 당신의 손톱과 곧 바스러져 흩어질 심장을 나의 침대 곁 나의 침대에 누인다   《문장웹진 10월호》    

트윈 베드룸
남궁선 / 2011-09-30
雪月 / 김지순

  雪月   김지순         덩치 큰 곰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설천지에 피 문신 흩어져 두리번거리고 있다 물새들이 물고기의 꿈을 순금빛 저녁으로 건져 올린다 두 포유류 사이 심장을 겨누던 짐승이 방아쇠를 당긴다 남의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혀 놓은 적 있나요 탕, 총구 방향으로 피 그림자 비틀비틀 걸어온다. 바람 탄 사스레나무 이파리가 황금 숲을 개장한다 우수수 낱장의 지폐가 떨어진다 떨리던 손이 체중으로 실린 짐승은 지폐을 쓸고 간다   곰은 숲의 주인 황금가지*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실래요 백일 동안 잠자던 곰 두 마리 사제의 꿈을 꾼다 보시게, 양날의[…]

雪月
김지순 / 2011-09-29
후곡(後曲) / 김은상

  후곡(後曲)   김은상         당신이 한밤중에 손톱을 잘라 달이 자란다는 걸 알았네 생의 과녁을 향해 쏜 화살들 모두 그대 어깨뼈 위로 떨어지고 낮에 꿈꾼 하얀 나비들 떨기나무에 쓰인 불꽃을 끄네 회향은 바람의 붓을 들어 낮과 밤의 양피지를 춤추었으나 푸른 옷소매 지울 수 없는 손사래로 공중을 흔드네 아아, 금빛으로 울어대는 첼로를 향해 뭉게구름은 뒷모습을 잃어 가고 순록은 돌아오지 않는 제 그림자를 매미처럼 부르다 뿔을 부러뜨리네 눈썹을 밝히는 티티새의 노래로 목을 맨 붉은 소년의 메아리 잘린 손금 고인 거울에 잠기네   《문장웹진 10월호》    

후곡(後曲)
김은상 / 2011-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