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인생 / 김현영

  하루의 인생   김현영         태양이 뚝 떨어졌어요. 그리곤 와장창 깨졌지요. 오늘 아침 나는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타는 태양이 보였어요. 눈꺼풀을 덮는 것만으론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세계가 있었던 거예요. 그것도 바로 내 집 천장에 말예요. 눈감았는데도 보이는 강렬한 그 빛을 피하기 위해 나는 잽싸게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어요. 그와 동시에 태양이 뚝 떨어졌어요. 나의 왼쪽 어깨와 흐트러진 머리칼을 살짝 건드리며. 순간 몸을 돌리지 않았다면 태양은 그대로 내 품에 안겼을 거예요. 나는 그대로 타버렸을 거예요. 곧이어 와장창 소리가 들렸고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내 오른편에서[…]

하루의 인생
김현영 / 2011-06-30
김사이 시인(2013)
달리는 시간 / 김사이

  달리는 시간   김사이           아기 울음 소리가 끊긴 지 오래된 고향마을에 베트남 처녀들이 눈에 띈다 도시 뒷골목에서 값싸게 일하는 이주노동자 처녀들 여기 깡촌에도 있었다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동창놈 하나는 얼마 전 갓 스무 살 필리핀 처녀를 데려왔단다 아이를 가졌다고 곁눈질하며 내 눈치를 살피는 엄마가 사람만 좋으면 되지 않겄냐며 중얼거린다 맞아요, 사람만 좋으면 되는데 사람이 사람이고 또 사람이 사람인데 왜 갈가리 찢어지는지 모르겠다고, 나도 중얼거린다   술이 취하니 속내를 털며 붉어지는 동창놈 논밭을 팔고 몸을 팔고 절망을 팔아 행복을 사는가 노동이 죽은 땅에 무엇을[…]

달리는 시간
김사이 / 2011-06-29
문전성시 / 손세실리아

  문전성시   손세실리아           해안가 마을길에 찻집을 차린 지 달포 발길 뜸하리란 예상 뒤엎고 성업이다 좀먹어 심하게 얽은 싸리나무 탁자 마당 정중앙에 버텨 앉은 맷돌상 바다정원의 화산암 테이블 좀처럼 빌 틈 없다 만석이다 기별 없는 당신을 대신해 떼로 몰려와 종일 죽치다 가는   눈먼 보리숭어 귀 밝은 방게 아기 보말 남방노랑나비   《문장웹진 7월호》        

문전성시
손세실리아 / 2011-06-27
/ 김성규

  뿔   김성규           한 번도 남들과 다르게 살아 본 적 없어 몸을 웅크리고 어둠속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혈관 속 어린 사슴들이 뛰어나오려 사방을 들이받고 있어 동맥을 달려 팔뚝을 들이받는 사슴들 혈관을 긋자 공중으로 솟구치는 사슴들   아직 자라지 않은 뿔로 술에 전 벽지를 들이받고 천장에서 웃으며 뛰어다니고 있어   내 몸을 통과해 나오는 사슴을 보며 천장을 뚫고 몰려다니는 사슴을 보며 내가 온몸으로 내 이름을 부를 때 끝없이 변주되는 내 울음 소리가 얼굴을 덮으며 꽃잎처럼 쏟아져   몸을 웅크리고 어둠속 내[…]

김성규 / 2011-06-27
매그놀리아 / 진수미

  매그놀리아[mæ?nóulj?]   진수미           구멍일 뿐이지 나는 당신들의 피리, 자유롭게 들락거려도 좋아 혈관에 새기고 싶은 흐르는 글자들이 생겼어요   붉은 피가 덕지덕지 엉겨붙어 만년필을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올봄 저 목련은 만개를 모른다 수척한 뺨을 허공에 부비다 이내 촉대에서 굴러 떨어진다   담요를 두르면 덜 아플지도 몰라 창틀에 서서 발끝으로 죽음의 너비를 재본다   그들은 한없이 선량한 친구 눈웃음치고 있다                                 (합창) 우리가 죽어 봐서 아는데                               (합창) 우리가 죽어 봐서 아는데   네 몸을 탈취하자마자 사각사각 안구를 돌려 깎는다 과일처럼 망막에 맺힌 시간들이[…]

매그놀리아
진수미 / 2011-06-27
웃음은 감염된다 / 김종일

  [장르소설 특집]   웃음은 감염된다   웃음은 전염된다. 웃음은 감염된다. 이 둘은 당신의 건강에 좋다. – 윌리엄 프라이   김종일          “때 이른 무더위가 연일 계속되면서 얼굴 찡그릴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굴 찡그릴 일보다 얼굴 펴고 웃을 일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마감뉴스의 앵커는 그렇게 오늘자 뉴스를 마무리했다. 자기 딴에는 훈훈한 마무리를 의도한 모양이었지만 내내 암울한 뉴스만 지켜본 시청자로서는 냉소할 수밖에 없었다. 병 주고 약 주나. 나는 리모컨으로 TV 전원을 끄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 펴고 웃을 일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퍽이나 그렇게 되겠다. 도대체 웃을 일이[…]

웃음은 감염된다
김종일 / 2011-06-24
도그 워커(dog walker) / 손현주

  도그 워커(dog walker)   손현주           ㅌ팰리스 앞에 노인이 서성이며 유모차를 끌고 있다. 여자는 노인이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부지런히 개들을 몰아 노인 앞에 선다. 유모차 안에는 2년생 치와와인 유끼가 얌전히 앉아 고개를 내밀고 있다. 진 브라운의 부드러운 털이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한눈에 보아도 순종이다. 노인은 오늘이 유끼의 검진 날이라며 여자에게 병원 수첩을 건넨다. 노인은 의사에게 당부할 내용을 조근조근 설명한 후 유끼를 땅에 내려놓고 빈 유모차를 끌고 유리 출입문 안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유끼는 노인이 사라진 유리문을 보며 심하게 짖어댄다. 유끼의 모습이 철없는[…]

도그 워커(dog walker)
손현주 / 2011-06-24
2011: 스페이스 아우슈비츠(2011: A space Auschwitz) / 김성대

  2011: 스페이스 아우슈비츠(2011: A space Auschwitz)   김성대           * 그곳은 살아 있는 가축을 묻으면서 시작된다. 우리는 같이 사는 동물을 믿지 못한다.   * 가축들은 눈을 감지 않는다. 우리의 눈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눈들. 우리에게서 얼굴을 거슬러 간다.   * 가축들의 울음은 멀리 가지 못한다. 자신의 피로 목을 축이며 흩어지지 않는다.   * 우리라는 가설은 우리를 빠져나간다. 우리를 미리 덮어쓰는 행위들. 먼저 돌아와 있는 경험들. 우리는 무한히 초기화된다.   * 1933년 히틀러는 인류 최초로 동물보호법을 만든다.   * 발자국은 그림자가 얼어붙어 있다. 동일한 중력을 향하여.[…]

2011: 스페이스 아우슈비츠(2011: A space Auschwitz)
김성대 / 2011-06-24
이빨 / 유현산

  [장르소설 특집]   이빨   유현산              1993년 6월 23일─자수   형사가 이빨을 쑤셨다. 고추씨 기름이 묻은 밥알 대가리가 이쑤시개에 찔려 나왔다. 권재범은 형사를 부러워하며 오른쪽 어금니의 썩은 자리에 끼어 있는 밥알들을 혀끝으로 긁어냈다. “지문을 숫돌에 갈았어요? 그게 요즘 유행인데, 어떻게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엄청 아팠을 텐데. 그 정성으로 숨어 지내지 뭐 하러 자수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뭘……. 한 가지 물어봅시다. 피의자는 딱 두 가지로 나뉩니다. 뭔지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곱게 들어가는 놈과 뒤통수치는 놈. 자, 내 얼굴을 똑바로 보세요.” 형사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벗어진 이마가 형광등 불빛을[…]

이빨
유현산 / 2011-06-23
안개 수집가의 실종 / 김애현

  안개 수집가의 실종   김애현       1   18시 06분, 동해상으로 빠져나간 비구름은 소멸되었다. 무려 십오일 동안 줄기차게 비를 뿌린 뒤였다. 죽을 듯 말 듯하다가 살고 또 죽을 듯 말 듯하다가 살아나 매번 기상청의 예측을 오보로 만들며 우리를 애먹였었다. 그럴 때 쓰라고 ‘예측은 빗나갔다’란 말이 있음에도 선배는 오보의 책임으로 시말서를 쓰게 되었다. 전 국민이 기상청 안티, 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우린 뭐 이 나라 국민 아닙니까? 솔직히 그때만 해도 내가 선배와 같이 시말서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우리가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안개 수집가의 실종
김애현 / 2011-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