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없는 이야기 / 박진규

  혀 없는 이야기   박진규           1.   대한민국 시골마을 구석구석까지 새마을운동의 물결이 일던 시절이었다. 한 시골마을의 야산이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하룻밤 사이에 반토막 났다. 노인들과 아이들은 물론 동네 개들까지 해가 뜨자마자 큰길로 나와 붉은 흙이 흐르는 장관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누군가 담배를 꺼내면서 슬며시 말문을 텄다. “김가네 고명딸 결국 목을 맸다면서?”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던데…….” “학교선생하고 야반도주했다 붙잡혀 왔다면서?” “아비란 작자가 목 매달라고 동아줄까지 손수 마련해 줬다는 이야기 들었나?” 김가네는 이 작은 시골마을의 토지 대부분을 갖고 있던 지주였다. 마을을 빙 둘러싼 야산 역시[…]

혀 없는 이야기
박진규 / 2011-05-26
글자들이 날아다니는 숲 / 함기석

  글자들이 날아다니는 숲   함기석         ? 나는 P다 검은 실내다 벽을 따라 시신경들이 뻗어 있다 창 너머 가우스 숲에서 자객들이 바늘과 단도를 던졌다 실내가 찢어졌고 나는 눈동자 밖으로 나갔다 P가 흐르고 눈이 내렸다 눈길에서 나는 눈과 길을 잃었다 나를 태우고 온 말도 어디론가 사라졌고 사방은 칠흑의 어둠이었다 숲의 공중으로 초서체 벌레들이 날아다녔다 올빼미 눈이 박힌 각도기가 빛을 뿜으며 날고 붓을 쥔 張旭의 취한 손이 까마귀 떼와 함께 날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짐승 갈루아의 울음이 들려왔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가자 불빛이 보였다 불빛 사이로 호수가 보였다 숫자들이[…]

글자들이 날아다니는 숲
함기석 / 2011-05-26
세계지도와 지구의 / 하종오

  세계지도와 지구의   하종오         어렸을 때 커다란 종이에 인쇄된 세계지도를 보고는 왼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아프리카와 오른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아메리카가 서로 가장 멀리 떨어진 대륙이고 그 중심에 한국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둥그런 지구의에 인쇄된 세계지도를 보고는 모든 대륙이 중심이 될 수 있고 그 가장자리에 각 나라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옆 동네도 놀러 오가지 못하던 어렸던 그때, 잡생각 많이 했다 왜 아메리카인들이 가까운 아시아인들을 놔두고 머나먼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끌고 갔는지 왜 유럽인들과 아메리카인들이 아시아인들을 지배하러 왔는지 왜 육이오 전쟁 때는 육대주에서 군인들이 남한[…]

세계지도와 지구의
하종오 / 2011-05-26
검은 낙타 / 여정

  검은 낙타 ― 케이블TV, 드라마 채널. 3   여정         한 번도 아버지의 길을 걸어 보지 못한 아들이 아버지의 검은 낙타코트를 입고 아버지의 길을 걸어 본다.   어머니의 집에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늘어뜨리는 검은 낙타 한 마리가 있다. 검은 낙타는 꽃피는 봄과 푸르른 여름과 풍성한 가을 동안 가족들을 위해 죽은 듯이 계절-잠을 자고 늦가을 또는 초겨울이 되어서야 겨우 자기를 위해 눈을 뜨는 겨울동물이다. 검은 낙타는 다른 낙타와 다르게 사막을 살진 않는다. 오히려 사막을 온몸에 담고 추운 도시를 산다. 약해진 뼈로 시린 바람을 맞으며 뒹구는 낙엽을 밟으면 가지에[…]

검은 낙타
여정 / 2011-05-26
여름날 / 전삼혜

[청소년 테마소설] 1. 관계와 소통_다섯번째   여름날   전삼혜          은이 사라진 이후, 나는 자주 놀라는 사람이 되었다. 건너편 아파트의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책상 위에 던져둔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에도, 더운 여름날 열린 베란다 창을 통해 갑자기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에도 나는 놀랐다. 한창 작업 중이던 내 컴퓨터가 갑자기 꺼졌을 때도, 그 컴퓨터가 아무런 예고 없이 다시 켜졌을 때도 나는 놀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은? 나는 대답이 들릴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기대하면서 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름 부르기를[…]

여름날
전삼혜 / 2011-05-23
책들의 전쟁 / 김응교

  [작가가 읽은 책]   책들의 전쟁   김응교(시인)            『창조된 고전』(하루오 시라네 엮음, 소명출판, 2002)이라는 책은, ‘고전’(古典, The classic)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서문에서, 미국의 교육에서 고전을 결정하는 데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지적한다. 미국 교육에서 강조하는 고전이란, 첫째는 젠더의 문제로, 여성 문학은 거의 없고, ‘죽은 백인’(dead white meals)만 등장한다. 둘째는 민족성(ethnicity)의 문제로 미국에는 소수민족이 존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럽계 백인 문학’만이 고전으로 대우받는다. 셋째는 글로벌리즘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대학교 교양이나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유럽 작가는 들어 있어도, 아시아ㆍ아프리카ㆍ중근동ㆍ남미의 작가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책들의 전쟁
김응교 / 2011-05-10
3월의 법칙 / 이문영

[청소년 테마소설] 1. 관계와 소통_네번째   3월의 법칙   이문영             1.   3.1절은 이제부터 학교라는 지옥문에 들어가는 학생들을 위한 한 방울의 자비일 것이다. 20세기 초 식민지 조선에서 벌어진, 푸른 하늘 그리다가 숨이 진 애국투사 언니는 음악 시간에만 잠깐 존재했다. 사실 봄방학 끝에 숫자만 달라진 채 살짝 붙어 있는 요크셔테리어 꼬리 같은 3.1절은 3월을 알리기에 부적절하다. 진짜 3월은 교실에서 시작한다.     2.   “안녕!” 최대한 발랄하게 인사를 날렸는데 선예는 슬쩍 눈인사만 보낸다. 같은 중학교 출신으로 한 반이 된 두 명 중에 그나마 안면이 있는[…]

3월의 법칙
이문영 / 2011-05-09
제9회_스타킹 / 강신주(철학자)

[제9회]   스타킹   강신주(철학자)           이브의 손끝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의 입이 열린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깊고 깊은 구멍이 그녀의 아랫도리를 서서히 점령한다   발끝을지나정강이를지나무릎을지나허벅지를지나 깊은골짜기를지나엉덩이를지나배꼽언저리에서멈춘다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뱀은 저 북방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랫도리와 더욱 밀접하다   이글거리던 태양이 어둠에 들 즈음 다시 체위를 바꿔   배꼽을지나엉덩이를지나깊은골짜기를지나 허벅지를지나무릎을지나정강이를지나 발뒤꿈치를지나발끝을빠져나온다   작은 상처 하나에도 민감한 뱀이 온 종일 그녀와 한 몸일 수 있었다   그녀가 없는 방 한 쪽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는 고탄력 팬티스타킹,   이브의 형이상학을 모르는 저 뱀!   ─[…]

제9회_스타킹
강신주(철학자) / 2011-05-05
꽃 같은 시절 / 편혜영

  꽃 같은 시절   편혜영         꽃 같은 시절, 5월입니다. 올해는 유난히 봄이 늦된 것 같아 조바심이 나더니, 막상 5월이 되니 기다려 주어 고맙다는 듯 봄이 그 기운을 한껏 풀어 주고 있습니다. 마냥 봄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들이, 여전히 많았습니다. 이웃나라의 재해 복구는 아직도 요원하고 또 다른 이웃나라에서는 올해도 여전히 사나운 먼지바람을 날리고, 나라 안의 정세는 언제나 그렇듯 멀리서 듣는 얘기만으로도 침울합니다. 아마 5월에도 많은 일들이, 봄인 것과 상관 없이, 봄이거나 말거나, 분주히 일어나고 한순간 잦아들 것입니다. 시절이 꽃 같지 않다면, 그저 우리가 꽃이 되어 한[…]

꽃 같은 시절
편혜영 / 2011-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