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發信) / 안웅선

  발신(發信)   안웅선         당신, 이 세기로 감춰진 사람 문득 담쟁이로 가득한 나라의 왕족 같다 이 세기는 새벽 깊은 해저로 가느다란 시차가 연결되는 공중전화 뒷모습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일에 익숙해집니다 활주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일로 중독을 이해하기로 해 허공에 대해 오해하듯 자백한다 다시 말하면 구토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 출발하는 사도들이여, 난 딱 어제만큼 큰단다 여러 날 느리게 항해한단다 공정하게 말해진단다 하지만 다정하진 않아요 당신, 흔적이 아닌 적 있었던가 웃거나 화내지 않음으로 야만의 박동이 된다 간신히 무채색을 꿈꿀 수 있다 덧칠을 덜어낸 화가의 자리 웃자란 가지들이 시야를 벗겨내고 있어요[…]

발신(發信)
안웅선 / 2011-05-31
/ 이현승

  뼈   이현승         알루미늄으로 만든 목발을 보고 있으면 살을 벗기고 흰 뼈만 꺼내 놓은 듯 처참해진다. 퇴원하고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우산꽂이에 처박힌, 저 목발 위에 나는 한 삼 분 매달려 있었나.   피부를 열고 살을 갈라 뼈에 구멍을 내고 끊어진 인대를 나사못으로 고정시키고 다시 살을 덮고 피부를 꼬매고 붕대로 감는 동안 나의 참담은 자고 있었다.   집도 부위 위로 자라는 머리카락처럼 낱낱이 파헤쳐졌을 애욕의 처소를 석고로 봉인하고 여름 내내 부끄러움인지 노기인지 알 수 없는 가려움을 견뎠는데 엉기어 말라붙은 핏자국, 칠자국, 칼자국들이 시끄럽고 가려웠는데   대충 묻고[…]

이현승 / 2011-05-31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2-건축가 김원 편』 / 이경자

  〈작가가 읽은 책〉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2─건축가 김원 편』   이경자         건축가 김수근이 건축은 냉동음악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하지 못해 질문도 못 했다. 하지만 건축이 냉동음악이라는 말을 잊은 적이 없었다. 특히 그분은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그렇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무얼까, 바흐의 교향곡, 협주곡, 조곡 같은 것을 얼려 땅에 내려놓으면 그게 집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무식한 걸까? 건축은 무엇이든 살기 위해 지어지는 공간의 틀이다. 그러나 건축이 그냥 틀로 존재할 때는 아직 건축이 아니라고 했다. 그곳에 숨 쉬는 무엇이 살[…]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2-건축가 김원 편』
이경자 / 2011-05-30
기척도 없이 / 김경주

  기척도 없이   김경주         문장이 기웃거리다가 떨어뜨린 깃털   새때에 걸려, 문장은 기척을 내기도 한다   내 얼굴에서 내려야 하는데 얼굴을 놓쳐버린 뺨처럼   문장은 행진곡을 못 듣고 횃불로 들어가 날을 샌다 기척도 없이   아무도 모르는 내 난동과 잘 지내야 하는데   기척도 없이 꿈속의 새가 내 베개에 침을 흘린다 침에게 기울고 있는 내 얼굴처럼   문장은 나의 타향살이다   자신의 영정 앞에 와서 기척도 없이   《문장웹진 6월호》      

기척도 없이
김경주 / 2011-05-30
말의 사막 한 복판에서 / 윤석산

말의 사막 한 복판에서 ─ 상상력 연습·5   윤석산         비 내리는 프리지아 꽃잎 속 말의 사막   혼자 걸어간 낙타 한 마리   그 발자국에 고인 빗물의 호수에 배를 띄우고   퍼덕이며 튀어오르는 물고기기 별이 되는 걸 바라보다가   나 혼자 이 망막한 세상을 어찌 사나 생각하다가   하늘 한복판에 여자와 남자라는 말을 나란히 뉘어 놓고   마주 보는 시선 사이에 사과나무를 심고   사과가 익어서 ‘뚝’ 하고 떨어지길 기다렸다.     《문장웹진 6월호》    

말의 사막 한 복판에서
윤석산 / 2011-05-27
쇼브라더스 베이비 / 이지민

  쇼브라더스 베이비   이지민          차 안에서의 죽음은 상상해 본 적 없다. 그건 내가 정말 경멸하는 부류, 나약하고 간편하고 평범하고 정말 ‘뽀대’ 안 나는 죽음이니까. 핸들만 살짝 꺾어도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건 싱겁고 허무하다. 현장에서도 카 스턴트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BMW끼리 처박아 떼굴떼굴 나뒹굴게 해도 그건 축제의 불꽃놀이 같은 것, 사연 없는 자들을 위한 구경거리일 뿐. 시속 150Km로 달려오는 차에 받히거나 보닛 위에 떨어지는 장면을 찍을 때도 고통에 비해 쾌감은 별로다. 차갑고 묵직한 쇠붙이와는 뭔가 주거니 받거니 짜르르 찌르르한 맛이 부족하다. 결투라는 건 결국 같은[…]

쇼브라더스 베이비
이지민 / 2011-05-27
황학주 시인(2013)
다른 하루 / 황학주

다른 하루 ─ 사이구란 사루니에게   황학주         누군가는 남고……누군가는 계속해서 떠나겠다……하루만 지나면 나와 당신이 역할을 바꾸느라 핏물 배는 허공의 무대에서 헤어지는 거   그래도 가끔은 나도 흑인이었으니까……당신을……초대하고 싶어질 것 같다   해 뜰 때 안녕이라 말하며 왔지 해 저물 때도 맨몸으로 안녕이라 말하겠지 그 사이에도 거리에는 뒤축 없는 구두들이 달리겠지 늙고 질긴 코끼리뼈를 부싯돌 삼아 지평선을 켜겠지   반대로 나는 검고……다음번엔 당신이 희었으면 좋겠다……당신한테는 그런 말을 안 하지만……   메마른 진흙 술잔 동그란 눈동자에 우리, 무엇을 빠뜨렸나 인간의……거기에……하양만 있고 얼룩덜룩과 울긋불긋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나도[…]

다른 하루
황학주 / 2011-05-27
한강대교 북단에서 남단 방면 여섯 번째 교각에서 / 주영중

  한강대교 북단에서 남단 방면 여섯 번째 교각에서   당신의 얼굴은 범람의 흔적이 묻어 있다 아니 당신의 연주는 범람의 흔적이 묻어 있다 아니 모든 게 사라지고 어느 순간 당신의 기타에 범람의 흔적이 묻어 있다 아니 당신의 기타 소리에 범람의 흔적이 묻어 있다 ─ 로이 부캐넌(Roy Buchanan), ?The Messiah Will Come Again? 에 대한 불가해한 변주   주영중       얼굴에서 막 떠난 얼굴이, 무한의 기울기로 잠긴다 공중에서 잠시 정지한 물방울들, 격전을 위해 아주 잠시 조준점을 정렬하고 각도를 바꾸며, 하늘을 뒤덮는 그 무수한 점들   홍수 통제소의 긴박한 움직임과 잠수교의[…]

한강대교 북단에서 남단 방면 여섯 번째 교각에서
주영중 / 2011-05-27
손님 / 김숨

  손님   김숨              손님들이 그녀의 식당에 들어선 것은 밤 여덟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술 한잔 걸치려는 저녁 손님들로 북적북적할 시간이었지만 홀에는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졸음에 겨워하면서 센베이를 우두둑우두둑 베먹고 있었다. 센베이 가루가 묻은 입을 털린 콩깍지처럼 벌리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님들을 쳐다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센베이에서 날린 푸르스레한 파래가루가 그녀의 얼굴 주변에서 떠돌았다. ‘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를’이라는 구절을 십자수로 수놓은 액자가 그녀의 머리 위에 걸려 있었다. 식당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설 때 언뜻 서너 명은 돼 보이던 손님은 고작 둘이었다. 비몽사몽 중에 착각한 것이리라 하면서도 그녀는[…]

손님
김숨 / 2011-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