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레이 / 김경욱

  스프레이   김경욱            그가 다른 집 택배 상자를 들고 온 것은 실수였다. 무심코 송장을 들여다보았을 때는 이미 포장 테이프를 반쯤 떼어낸 뒤였다. 109호. 상자 옆면에 검은 매직펜으로 휘갈겨진 숫자를 확인하는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경비가 적어 놓은 숫자는 709로도 읽을 수 있었다. 새로 온 경비라 필체가 눈에 설었다. 게다가 필요한 물품을 대부분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그는 퇴근길에 빈손으로 올라오는 날이 드물었다. 아주 납득 못할 실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부주의한 행동이 그로서는 의아하기만 했다. 문자메시지조차 퇴고를 거듭해서 보내는 그였다. 평소 같으면 포장 테이프를 떼기 전에 송장을 꼼꼼히[…]

스프레이
김경욱 / 2011-04-23
말하기수업 / 김혜진

  [기획·특집] 동화를 읽자!                    ─ 단편동화   말하기 수업   김혜진         “어머, 두 분이 오실 줄은 몰랐어요.” “원래 두 사람이 수업을 진행합니다.” 나이든 쪽 선생님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두 선생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숫자 10 같아서, 젊은 선생님이 홀쭉하게 마른 1이고 배가 넉넉하게 나온 나이든 선생님이 동그란 0이라고 하면 딱 맞았다. 동그란 선생님이 말하는 동안 홀쭉한 선생님은 연신 안경을 고쳐 썼다. 홍이가 보기에도 긴장한 티가 났다. “꼭 교생 선생님 같아. 이쪽 할아버지 선생님은 저 선생님이 수업 잘하나 못하나 감시하러 왔나 봐.” 홍이는 짝인[…]

말하기수업
김혜진 / 2011-04-23
연희 / 조헌용

  연희   조헌용            힐끔힐끔 엿보이는 치마 속 빨간 속옷을 생각하며 김ㄷ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빨간이라면 눈썹을 기꺼이 맡겨도 좋았다. 햇살 좋은 풀밭을 떠올렸다. 혹은 작은 방 침대 위가 좋을까. 예수처럼 펼쳐진 연의 두 팔을 빨간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쭉 빠진 두 다리로 지그시 누를 터였다. 숨 막힐 듯 다가서는 분꽃 내음에 취해 배시시 웃음을 흘릴 때쯤 날아드는 지청구. 나쁜 새끼, 니가 날 두고 딴 년을 만나, 이번에는 또 어떤 년이야, 응, 응? 나쁜 새끼. 넌 내 꺼야, 내 꺼라고. 빨간의 입에서 술처럼 달콤한 욕이[…]

연희
조헌용 / 2011-04-23
동화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유 / 김남중

  [기획·특집] 동화를 읽자!                    ─ 여는 글_2   동화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유   김남중         힘든 세상이다. 내일은 나아질 거란 희망도 없다. 차츰 침몰하는 타이타닉 같은 세상. 홀몸이라면 기울어지는 갑판 위에서 술병이나 비우며 빨리 끝나길 기다릴 테지만, 새근새근 잠든 자식들을 보면 술기운이 확 달아난다. 나는 이리 살다 가겠지만 너희들은 무슨 죄냐. 너희들만은 더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다. 부모와 다르게 살게 해주고 싶다. 그리하여 세상을 바꾸는 촉매는 누군가의 자식들이다. 어린이가 세상의 희망인 이유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우리는 ‘동화 같은’ 이야기에서 위로를 찾는다. ‘동화 같은’이라는 표현이 잦아진다.[…]

동화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유
김남중 / 2011-04-22
날아라 장수풍뎅이 / 김남중

  [기획특집] 동화를 읽자!                   ─ 단편동화   날아라 장수풍뎅이   김남중        여름방학이 얼마 안 남았다. 강건이는 아빠를 졸랐다. “아빠, 우리 마트 가. 방학숙제로 곤충채집해야 돼.” 강건이 아빠가 정보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곤충 잡으려면 산이나 들에 가야지.” “마트에도 있어. 장수풍뎅이랑 사슴벌레.” 강건이 아빠가 피식 웃었다. 더 들어 보지 않아도 강건이 속셈을 알 것 같았다. 강건이는 오래 전부터 장수풍뎅이를 기르고 싶어 했다. 반짝반짝 검고 단단한 등껍질에 우뚝 솟은 뿔, 축구공도 밀 만큼 힘이 센 숲 속의 최강자, 장수풍뎅이를 이길 수 있는 곤충은 없었다. 강건이는 크리스마스에도 어린이날에도 장수풍뎅이[…]

날아라 장수풍뎅이
김남중 / 2011-04-18
순천만에 새떼가 온다 / 장철문

  순천만에 새떼가 온다   장철문         밥 먹으러 오니?   나도 밥 먹으러 왔다 밥 벌어 새끼 키우러 왔다   갈대도 밥 먹으려고 소금밭에 뿌리를 내리지   너희들도 무논으로 출근을 하고 개펄로 퇴근을 하지? 독감에 걸려 기침을 하지?   너희들과 나는 감기를 주고받는 사이, 날개와 부리를 놀려 목구멍에 밥을 넘기는 사이   능선을 따라 흐린 북녘에서 참 끝없이도 돋아나구나 콩싹처럼 돋아나서 부리로 허공을 뚫고 오는구나   오랜 비행에 날개가 아파서 칭얼대는 아이들이 제 하늘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러시아워 속에서 날개를 놀려야지?   너는 목이 길고 다리가[…]

순천만에 새떼가 온다
장철문 / 2011-04-18
붉은색을 먹다 / 김희진

  붉은색을 먹다   김희진             여자는 오늘도 붉은색을 먹었다. 여자가 붉은색을 먹기 시작한 건, 몇 주 전 일요일 아침부터였다. 그날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무더웠고, 결코 특별한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그저 평범한 하루였다. 아니, 그렇고 그런 일상의 연속이었고, 토요일 밤에 이어 으레 찾아오는 일요일 아침일 뿐이었다. 그래서 여자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양미간을 찡그린 채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잠이 덜 깬 눈으로 창 밖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때 여자의 눈으로 들어온 건 양쪽으로 묶여 있던 붉은색 꽃무늬 커튼이었다. 여자는 매일같이 봐오던[…]

붉은색을 먹다
김희진 / 2011-04-18
제8회_립스틱 / 강신주(철학자)

[제8회]   립스틱   강신주(철학자)           피부로 속엣 것들을 포장하고 있지만, 얼굴에서 유일하게 껍질 없이 자기의 속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입술이다. 알몸을 누드라고 하지만 피부라는 옷을 입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우리 몸에서 진짜 누드는 입술과 유두, 항문 그리고 성기의 까진 부분밖에 없다. 속내가 겉으로 드러나 있는 솔직함. 입술과 입술을 마주 대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더는 숨길 게 없는 솔직함과 솔직함이 맞닿는 지극함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네 속으로 아니면 네가 내 속으로 하염없이 들어가고 싶듯이 서로의 깊은 속이 부딪치는 뜨거운 유쾌함에서 온다.   입술이[…]

제8회_립스틱
강신주(철학자) / 2011-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