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들) / 이반장

  하루살이(들)   이반장          *   아침, 창밖에 무지개가 떴다. 한 주 내내 우중충하던 하늘이 살짝 개었다. 그리고 드높은 건물숲 속으로 무지개가 선연했다. 잠자리서 관리자는 침침한 눈을 비비고 무지개를 보며 참 무지개스럽구나, 생각했다. 그가 줄곧 알던 무지개 그대로. 누구나 줄곧 알던 무지개 고스란히. 식상할 만큼, 단지 무지개에 불과한. 그는 생전에 무지개를 몇 번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본 게 대체 언제였는지조차 기억에 없었다. 그럼에도 식상하다고 느껴버린 스스로에 대한 의문도 잠시, 관리자의 생각은 곧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 그 생각, 또 다른 의문은, 다음과 같았다. 혹시 무지개는, 오늘이 처음이었던[…]

하루살이(들)
이반장 / 2011-03-31
2011년 6월 23일 외 1편 / 김승일

  [기획·특집]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1년 젊은 시인들     김승일     2011년 6월 23일         너희들 고전 속의 주인공들은 자살하기 전에 항상 독백을 하지. 주인공이 자살하는 소설만 골라; 읽었다. 고전 위주로.   당신들의 독백을 독서합니다. 나도 곧 자살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은 타당하지 않았다. 그 책도 불가피하지 않았다. 그 책의 독백은 숭고했으나…… 내가 써먹기엔 너무 거창하였다.   안 되겠어 차라리 내가 써볼까? 그래, 고전을 써보는 거야.   서사시   책상 앞에 창문이 뚫려 있었다. 책상 뒤에 앉아서 시 쓰는 일은 창밖을 신경 쓰는[…]

2011년 6월 23일 외 1편
김승일 / 2011-03-31
청파동 9 외 1편 / 박준

  [기획·특집]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1년 젊은 시인들     박준     청파동 9 ─ 산책         청파동에서 그대는 햇빛만 못하다 나는 매일 병(病)을 얻었지만 이마가 더럽혀질 만큼 깊지는 않았다 신열도 오래되면 적막이 되었다 빛은 적막으로 자주 드나들고 바람도 먼지도 나도 그 길을 따라 걸어 나왔다 청파동에서 한 마장 정도 나가면 먼저 죽은 친구가 살던 집이 나오고 선지를 잘하는 식당이 있고 어린 아가씨가 약을 지어 준다는 약방도 하나 있다 그러면 나는 친구를 죽인 사람을 찾아가 패(悖)를 좀 부리다 오고 싶기도 하고 잔술을 마실까 하는 마음도 들고 어린[…]

청파동 9 외 1편
박준 / 2011-03-29
별의 사운드 트랙 외 1편 / 이은규

  [기획·특집]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1년 젊은 시인들     이은규     별의 사운드 트랙           움켜쥐었던 손이 하루를 놓는다 서둘러 숨을 곳을 찾는 빛, 사라지는 것으로 어둠과 하나가 되려는   푸른 잎맥이 광합성을 잊을 때쯤 천천히 기지개를 켜는 나는 야행성 밤이 불안의 중심을 서성이면 기억은 항상, 이미 읽혀진 상태로 다가온다   밤하늘보다 먼저 펼쳐지는 노트 속엔, 흐르는 별 대신 돌멩이를 옮겨 놓던 우리가 살고 있지 돌멩이 하나에 우주가 기우뚱할 수 있다는 걸 몰랐을까, 모른 척했을까   돌멩이라고 적힌 페이지를 찢어 밤의 유리창에 던지면 기억이 깨질까[…]

별의 사운드 트랙 외 1편
이은규 / 2011-03-29
풀밭 위의 상자 외 1편 / 심지아

  [기획·특집]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1년 젊은 시인들     심지아     풀밭 위의 상자         수줍은 밤들이 자꾸만 따라옵니다   나는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얼굴을 붉혀요   잠든 산타의 자루 속으로 밤들이 걸어가지만   밤은 길어지지 않아요   썰매를 태워 주세요   하품과 하품 속으로 깜깜한 비행을 합니다   자루 속에서 어둠을 꺼내면   얼굴을 붉히며 상자가 됩니다   리본을, 커다란 리본을 달아 주세요   손톱은 아주 길어지고 있어요   나는 밤새 리본 끈을 당겨요   지구를 돌고 있는 손톱 때문에   나는 매일 밤[…]

풀밭 위의 상자 외 1편
심지아 / 2011-03-29
부(富)와 꽃의 데생 / 주하림

  [기획·특집]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1년 젊은 시인들     주하림     부(富)와 꽃의 데생       삶이 진정 혐오스러운 여행이라는 사실만이 불변하지 적어도 조각은 문명에서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예술가가 신과 경쟁한 장르다*     나는 글귀가 적힌 쪽지를 들고 오랫동안 거시기를 거울에 비춘 채 거시기 털들을 뽑으며, 홈드라마home drama! 닥스훈트Dachshund!를 외치며 온몸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겨울의 아침. 잡문들이 열린 창으로 빨려 들어갔다 애인은 떠났고 엄청난 방황 속에서 생의 삼분의 이를 보낸 셈이다 그곳에선 괴롭다는 말도 쓸 수 없고 아프단 말도 영원할 수 없었다   밀물 뒤로…서서히… 내 남자는[…]

부(富)와 꽃의 데생
주하림 / 2011-03-28
유희경 시인(2013)
너가 오면 외 1편 / 유희경

  [기획·특집]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1년 젊은 시인들     유희경     너가 오면         그렇게, 네가 있구나 하면 나는 빨래를 털어 널고 담배를 피우다 말고 이불 구석구석을 살펴본 그대로 나는 앉아 있고 종일 기우는 해를 따라서 조금씩 고개를 틀고 틀다가 가만히 귀를 기울여 오는 방향으로 발꿈치를 들기도 하고   두 팔을 살짝 들었다가 놓는 너가 아니 너와 비슷한 모양으로라도 오면 나는 펼쳤다가 내려놓는 형편없는 독서 그때 나는 어떤 손짓으로 어떻게 웃어야 슬퍼야 가장 예쁠까 생각하고 그렇게 나, 나, 나를 나비 날개처럼 접어 놓는 너 너 너의[…]

너가 오면 외 1편
유희경 / 2011-03-28
붉은 유대인 외 1편 / 정영효

  [기획·특집]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1년 젊은 시인들     정영효     붉은 유대인*         당신은 어느 종족입니까 슬라브족인가요 게르만족인가요 나는 조상을 좋아하지만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식사와 기도의 친밀함으로 오래 외지를 내진(內診)한 그들에 대해 오늘도 부모님은 말했지요 숭배는 따르는 것이 아닌 물려받는 것이라고   미발굴된 유적이거나 선명한 지리인지도 모릅니다 위태로운 고도에 매달린 태양의 뒤 또는 침이 묻은 베개에 있을 것 같은 있음으로 해서 숨겨지는 조상은 나에게 타인의 예절로 기다리는 공손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은 아닙니다 나에 대한 태도로 돌아오는 안부를 뜻할 뿐 있음을 믿어야 할 때 사라지는 게[…]

붉은 유대인 외 1편
정영효 / 2011-03-28
어떤 싸움의 기록 외 1편 / 박성준

  [기획·특집]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1년 젊은 시인들     박성준     어떤 싸움의 기록         귀신 같다. 어지러운 집은 귀신 같고 어지러운 집에 사는 나는 귀신이 아니다. 어제 몸에 든 귀신이 몸이 가렵다고 한다. 어디가 가려운지 모르겠는데   가려운 곳이 분명 있는 듯한 찝찝한 기분, 내 몸에 귀신이 왔다 갔다. 말도 없이 귀신이 기분만 주고 갔다. 귀신은 기분이 나쁜 귀신, 나는 어딘가 가렵다고 뒤죽박죽 몸으로 중얼거린다. 할 말이 많은 몸은 귀신처럼, 귀신 같은 기분, 귀신 냄새가 난다. 냄새를 맡는다.   살을 핥으면 무슨 맛이 날까. 무슨[…]

어떤 싸움의 기록 외 1편
박성준 / 2011-03-28
검은 책, 이스탄불 그리고 서울 / 최수철

  [작가가 읽은 책]   검은 책, 이스탄불 그리고 서울   최수철(소설가)           몇 년 전에 나는 터키를 여행하면서 이스탄불에 사흘간 체류한 적이 있다. 이스탄불처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온 도시를 여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두텁고 심오한 텍스트를 접하는 일과 흡사하다. 더욱이 나는 일찌감치 지중해권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 지역을 여행했으며, 특히 이스탄불의 경우에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과 같은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 전후로 기독교의 십자가와 이슬람의 초승달이 각축하는 과정에 대해 각종 매체와 문헌을 통해 틈틈이 정보를 쌓아 오고[…]

검은 책, 이스탄불 그리고 서울
최수철 / 2011-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