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마술사 코니 킴의 생애 / 하창수

  탈출마술사 코니 킴의 생애   하창수            배우가 문으로 들어오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면 하나의 상황이 된다. – 빌리 와일더         사람은 누구나 처음 무엇이 되려 할 때 그 되려는 것에 대해 지극한 환상을 갖게 마련이다. 법률가나 정치가가 되려는 꼬마들은 정의의 실현에 대해 끔찍할 정도로 맹렬한 환상을 갖고 있으며, 배우가 되려는 소녀는 화면 속에 재생되는 삶이 가짜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소설가가 되고 싶은 아이는 만들어낸 이야기야말로 진실이라는 ‘소설교(小說敎)’의 사이비 강령을 철저하게 신봉하는 어린 광신도다. 그러나 정작 맹렬히 갈망했던 그 무엇이 되었을 때,[…]

탈출마술사 코니 킴의 생애
하창수 / 2011-02-26
병(病)의 밤(夜) / 이신조

      이신조               그날 밤, 노인이 병원의 복도에 나타났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A병원 본관 2층 감염내과 외래진료실 앞의 대기좌석은 낮 시간대와는 달리 모두 비어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복도 천장의 형광등 조명은 일부 소등된 상태였다. 정적과 공백과 어둠이 공기 속에 소독액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정적과 공백과 어둠 속에 낮게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는 무엇, 가만히 도사리고 있는 무엇, 정적도 공백도 어둠도 완전하지 않았다. 당연히 무엇도 끝난 게 아니었다. 밤의 병원은 낮의 병원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다. 밤이면, 노인이 병원의 복도에 나타났다. 그 곳이 병원인 만큼, 그것은[…]

병(病)의 밤(夜)
이신조 / 2011-02-26
약의 역사 / 오현종

  약의 역사   오현종       나는 공항 출국장에서 비행기가 뜨길 기다릴 때마다 약을 샀다. 비타민제, 프로폴리스, 오메가3, 홍삼 같은 것들을. 무료해서이기도 했고 필요에 의해서이기도 했으며, 어쩌면 여행 마지막 날의 피로를 풀어 줄 거란 기대에서 시작된 습관일지도 몰랐다. 색조 화장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처럼 화장품 코너에서 환율을 따져 보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약의 종류가 다양하고 저렴한 홍콩 첵랍콕 공항을 경유할 때는 비타민제는 물론이고, 파스며 연고며 백화유까지 비닐 백 가득 담아 가지고 탑승을 했다. 나는 기내용 캐리어 지퍼를 열고 약병을 챙겨 넣을 때 느끼는 안도감 같은 것을 좋아했다.[…]

약의 역사
오현종 / 2011-02-26
가능성의 엉뚱한 핑계가 아프든. / 최정진

  가능성의 엉뚱한 핑계가 아프든.   최정진           네가 다시 보이든. 누가 유리를 의식하든. 극장에서 꺼내면서 줄거리가 구겨지든.   두 눈은 보고 있다.   육중한 자동차가 네 앞에서 서서히 방향을 바꾸든. 손은 손잡이의 분위기에 못 박혀 떨고 있다.   너의 역할이 잘 움직여지지 않든.   극장에서 꺼낸 줄거리를 찢어서 얼굴의 땀을 닦든. 네 얼굴이 굳기 전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가 답이든.   《문장웹진 3월호》        

가능성의 엉뚱한 핑계가 아프든.
최정진 / 2011-02-26
/ 전동균

  뒤   전동균           꽃이 오고 있다   한 꽃송이에 꽃잎은 여섯 그중 둘은 벼락에서부터 왔다   사락 사라락   플라스틱 그릇의 쌀알들이 젖고 있다 눈 가늘게 뜨고 물젖을 빨고 있다   머무르되 집이 없는 소리, 소리들 밤과 절벽과 시퍼런 칼과도 같은 후회를 품고서 그러나 깊어지면서 순해지는 눈동자들의 빛   죽음에서 삶으로 흘러오는, 혹은 삶에서 죽음으로 스며 가는   모든 소리는 아프다 모든 소리는 숨소리여서 ─ 멀리 오느라 애썼다, 꽃아 거친 발바닥 씻어 주는 손들이어서 아프고, 높고 컴컴하고, 환하다   사락 사그락 사락 사라락   지금,[…]

전동균 / 2011-02-26
올해는 辛卯年, / 장옥관

  올해는 ,   장옥관           올해는 辛卯年, 토끼해다. 토끼는 귀가 크고 입이 찢어졌다. 뒷다리는 물론 길다. 몸은 둥글고 눈알이 빨갛다. 눈알이 왜 빨갈까? 간이 뜨거워서 그런 게 아닐까. 교각처럼 튼튼하던 코끼리가 갑자기 총무직을 내놓고 사라졌다. ‘A형이나 O형 토끼 간을 구하러 갑니다.’ 단체 메일 띄워 놓고. 농담으로 봉해 놓은 검붉은 피비린내. 나는 토끼의 간이 필요해. 내 시집에 해설을 써준 양헌이는 토끼 간을 못 구해 죽었다. 등신같이 죽었다. 좀 더 살아도 되는데, 살아야 했는데. 그가 묻힌 곳은 야트막한 구릉지에 타오르는 천 리 불꽃. 토끼 간을 구해 복사꽃[…]

올해는 辛卯年,
장옥관 / 2011-02-26
십 원짜리 눈이 내리는 날 / 이장근

  십 원짜리 눈이 내리는 날   이장근             일곱 살 걸음으로 한 시간쯤 가면 읍내 농협이 나왔다 주판을 굴리시던 아버지께 두 손 모아 “십 원만!” 하고 외치면 꿀밤 대신 떨어지던 십 원 눈깔사탕 녹이며 집에 오던 길 한 시간하고 삼십 분 실은 사탕보다 눈빛이 그리워 갔더랬다 오전 햇살이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녹이면 윤기 흐르는 고드름 끝에 사탕이 맺히면 투명한 눈깔 속에 산과 하늘이 뒤집혀 놀고 있으면 나를 그렇게 보던 눈빛이 그리워 집을 나섰더랬다 십 원만 십 원만 걸어서 딱 십 원만큼만 보고 오던 눈빛[…]

십 원짜리 눈이 내리는 날
이장근 / 2011-02-26
유성(流星) / 여태천

  유성(流星)   여태천           내가 기다리는 거기에서 나의 기억이 만들어낸 바로 거기까지 당신이 있다 있다가 없다 백 년의 이별 그렇게 사라지는 이 모든 착란은 기다림 때문이다 그러니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왔다   멀리 가본 자들만이 오직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안다는데, 생의 바깥에서만 안쪽이 필요한 법 계산이 안 나오는 것들이여 눈을 감아도 보이는 어둠이여   1977년의 내 은빛 보이저 1호는 어디쯤 갔을까 백 년쯤 지나면 당신의 끝에 도착할 수 있는 걸까   백 년쯤 멀리 있는 눈이 반짝 빛난다 백 년쯤 후에야 나는 당신과[…]

유성(流星)
여태천 / 2011-02-26
아이러니스트 / 강기원

  아이러니스트   강기원           밀물의 밤 심야방송 끝난 TV 화면 속 지직거리는 물결무늬, 내 안의 썰물, 나는 생각한다 밤의 수족관 밑바닥에 죽은 듯 엎드린 물고기의 두통, 시체 안치실에서 불현듯 발기하는 음경, 아무리 곱씹어도 소화되지 않는 허무의 살덩이, 내 안에 쌍두사처럼 붙어 있는 밀실공포증과 광장공포증, 벙어리 책들이 와글거리는 서점의 고요와 소요, 사지가 잘린 채 태어난 태호, 태호의 말간 웃음, 죽은 배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그리고 또 나는 생각한다 턱이 잘린 아기 고양이 차차, 요요한 곡선에서 직선이 되어버린 금강의 어이없는 슬픔, 내, 네 얼굴 밑에 숨어 있는[…]

아이러니스트
강기원 / 2011-02-26
사고하지 마라, 반응하라. 창조하지 마라, 연결하라 – 네번째 / 함성호

  [에세이 테라스]   사고하지마라, 반응하라 창조하지마라, 연결하라   – 네번째     함성호          이 그림의 아래쪽에서 가시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넬슨 만델라입니다. 그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와 싸웠습니다. 근대가 가지고 있는 인종주의적 편견들, 근대는 타자에 대한 태도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습니다. 인종주의적 편견 같은 것들은 근대가 낳은 것으로 그 이전에는 서양에도 동양에도 없던 것들이었습니다. 결국에는 그러한 근대주의적 모더니티들이 정치적으로 악용되면서 제국주의가 성립되었고, 제국주의가 확산되면서 아시아에는 온갖 폐해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의 경계선 때문에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분리가 되고, 같은 민족들이[…]

사고하지 마라, 반응하라. 창조하지 마라, 연결하라 - 네번째
함성호 / 2011-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