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학 시인(2013)
늑대에게 경의를 / 윤성학

늑대에게 경의를* 윤성학 얼었다, 강 단단한 가죽에 흰 털을 덮어썼다 짐승은 웅크린 채 달빛을 받아 검푸르게 숨을 고른다 사위는 고요하였다 귀가 아프도록 서서 나와 짐승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바람이 몰려갈 때마다 그의 등뼈가 꿈틀거렸다   불가로 다가오지 못했다 그는 불 앞에 선 사람들의 등을 쏘아보았다 몸을 낮춰 서서히 다가온다 밝고 따뜻함에 익숙해져 앞자락이 눌어 가는 것도 모르고 저의 등이 식어 가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 순간, 몸을 날려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을 것이다   크헝크헝 강이 울고 있었다   * 바스코 포파 시선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에서. 《문장웹진 1월호》        

늑대에게 경의를
윤성학 / 2010-12-31
안데르센 나의 안데르센 / 권오영

안데르센 나의 안데르센 권오영 1. 그림 없는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큰 새 살고 있지. 종횡무진 비행을 꿈꾸며 알 낳고 있지. 황금 알 속에서 속성으로 자란 것들이 움직이고 있어. 달리고 있어. 하나의 콩꼬투리에서 튀어나온 다섯 개의 콩알처럼 여물지도 않은 내가 튀어 다녀. 오늘 화서에서 금정, 금정에서 혜화, 다시 화서역으로 오기까지 전철문을 자동적으로 열두 번 통과했어. 가고 오는 동안 남자들이 음악처럼 흘러다녔어. 요술지팡이를, 깜빡 떴다 감는 눈동자 같은 손전등을 팔고 사라졌어. 2. 미운 오리새끼 역마다 낯선 길 떠나는 열두 명의 나, 일 년 열두 달 수천 번 전철 속에서 태어나지. 불 켜[…]

안데르센 나의 안데르센
권오영 / 2010-12-31
한여름밤의 꿈 / 서영처

한여름밤의 꿈 서영처 강 건너 맹그로브 숲에는 사나운 어미 호랑이가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내 바이올린 케이스 안에는 젖을 못 뗀 새끼호랑이가 쿨쿨 잠들어 있는데 이 녀석이 수컷일까, 암컷일까, 아무튼 오늘은 내 결혼식날 나는 한껏 부풀린 드레스로 갈아입고 화관을 쓰고 하객들에게 둘러싸여 식장으로 들어섰다 정장을 한 당나귀 신랑이 털북숭이 손을 내밀었다 하객들의 박수 소리, 폭죽 소리, 남이야 쑥덕거리든 말든 누런 달이 떴는데 이상하다, 떡갈나무 아래 어른거리던 그림자 보이지 않네 떠들썩하던 웃음꽃 시들어 가는데 흥겨운 음악도 멈췄는데 자꾸만 근질거리며 발굽이 돋아나고 줄 끊어진 바이올린 금간 틈으로 맹그로브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난 칭얼대는 새끼호랑이를[…]

한여름밤의 꿈
서영처 / 2010-12-29
여름 눈사람 – 자끄 혹은 잔느에게 / 김태용

[기획/특집] 겨울에 쓰는 여름 이야기 여름 눈사람 – 자끄 혹은 잔느에게 김태용 죽음   – 자끄 드뉘망(?~2010)     어려운 말은 하지 않겠다다리 아래를 쳐다보지 않겠다목의 치수를 재지 않겠다혀를 굴리지 않겠다너는 떠났고너 때문이 아니라j로 시작하는 모든 단어가 사라졌다 겨울 식탁 아래 겨울 식탁보가 깔려 있다. 플라스틱 눈사람이 문 앞에 떨어져 있다. 자끄는 문을 걸어 잠그고 쥘 르나르의 일기(journal)를 노트에 베껴 쓰고 있다. 4월 8일 그 다음엔 11월 1일 그리고 다시 4월 8일. 그러니까 날짜만 쓰고 있는 것이다. 간혹 벼락 맞은 오리나무, 또는 벼락 맞은 오리와 나무, 라고 썼다가 지운다. 쥘[…]

여름 눈사람 - 자끄 혹은 잔느에게
김태용 / 2010-12-29
꼬리총 / 임수현

꼬리총 임수현    1 아들이 늦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는 덧문을 열고 유리창에 이마를 댔다. 콧등이 먼저 유리에 닿아 흠, 콧숨이 서렸다. 아버지는 코가 크다. 돈키호테라는 별명이 있었다. 아버지는 시린 코를 떼, 흐릿한 창에 입김을 불고 주먹으로 훔쳤다. 사과처럼 둥글고 반드러워진 유리에 빗발이 뚝뚝 그어졌다. 비는, 삶은 고사리처럼, 가늘고 회갈색이다. 우산을 챙겼나. 아버지는 아침 날씨가 가물가물했다. 비에 낙담한 아들이 책가방을 정수리에 얹고 걸어오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들은 중학생이 됐는데도 책가방이 등허리까지 내려왔다. 아들은 붉은 손으로 개울가의 너테와 나뭇가지에 달린 고드름을 뚝뚝 따 먹었다. 살얼음 낀 진창이 웨이퍼과자처럼 주저앉는 바람에 신코가[…]

꼬리총
임수현 / 2010-12-27
악어 / 최진영

악어 최진영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달력을 쳐다보았다. 생리 날짜가 보름이나 지났다. 생리주기를 통해서나마 짐작할 수 있었던 한 달이 대책 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아랫배 한 가득 송곳이 들어찬 것처럼 끔찍한 진통이 지친 내장을 파고들었다. 두통 역시 만만치 않았다. 똥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몸이 통째로 무거웠다. 나와야 할 것들이 나오지 않고 이 안에 들어앉아 시간까지 입 안으로 끌어들였다. 난폭한 허기와 갈증은 깊은 잠을 방해했고 뱃속의 텅 빈 공간은 밤새 꺽꺽 고함을 질러댔다. 한밤에 일어나 냉장고 앞에 주저앉아 뱃가죽이 터질 만큼 마른 빵을 씹어 먹은 뒤 나머지 밤은 변기 위에서 보냈다.[…]

악어
최진영 / 2010-12-25
바람자루 속에서 4 / 김도연

바람자루 속에서 4 – 삼월의 눈 김도연    “……꽃이 피었겠네.”집으로 돌아와 일주일 내내 거의 잠만 자던 그녀가 잠꼬대를 하듯 처음으로 뱉어낸 말이었다. 간단한 요기를 하고 화장실을 드나든 것만 빼면 옹관묘 같은 솜이불 속에서 겨울잠을 청하는 작은 곰이나 다름없던 그녀였다. 이불을 둘러쓰고 앉아 상반신만 내놓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거실의 유리창 밖에는 자잘한 햇살과 푸석푸석한 눈발이 공평하게 뒤섞여 내려오고 있었다. 근데 꽃이라니? 그는 잘 읽혀지지 않는 책을 덮고 다시 그녀의 핼쑥한 얼굴로 눈을 돌렸다. 길고 깊었던 겨울잠에서 그녀가 막 깨어나려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꽃이[…]

바람자루 속에서 4
김도연 / 2010-12-25
인디언 썸머 / 강영숙

[기획/특집] 겨울에 쓰는 여름 이야기 인디언 썸머 강영숙 희고 검은 옷을 입은 신랑과 신부가 들러리들과 함께 줄지어 지나갔다. 행렬이 지나간 보도블록 위로 꽃 냄새, 향수 냄새, 달디 단 비스킷 냄새, 신맛이 풍부한 커피 냄새가 와락 몰려왔다. 길고 긴 바디에 앞뒤로 조명이 툭 튀어나와 개구리처럼 우스꽝스럽게 생긴 구식 캐딜락 앨도라도가 천천히 행렬을 따라갔다. 빨간색 단화를 신은 내가 행렬이 지나가고 다시 비어 버린 공원 앞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위에서 내려다봤다면 캐딜락의 뒤꽁무니가 왼쪽 창끝에, 오른쪽 창끝에 내가 걸려 있었을 것이다. 늦은 오후가 되면 커피를 들고 강가를 산책했다.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인디언 썸머
강영숙 / 2010-12-25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 / 이준규

[작가가 읽은 책]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 이준규 문학사를 돌이켜보면, 아니 문학사라고 하면 지나치게 거창해 보이니 그저 나의 독서 경험을 되돌아보면, 장르라는 것은 하나의 편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가 시라고 칭하는 것은 옛날의 시와 다르며 또 앞으로 올 시들은 어떤 모습을 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다. 사람이란 자신의 취향과 습관과 앎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쉽게 수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특이한 문학적 행위조차 기존의 불확실한 잣대를 가지고 재단하려고들 한다. ‘시의 본질’, ‘정통’, ‘전통’ 따위를 운운하면서 말이다. 내가 볼 때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개인적인 선호가 있을 뿐이다. 많은[…]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
이준규 / 2010-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