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벚나무의 시간 / 김명리

산벚나무의 시간 김명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벚나무의 꽃잎 중에는 미묘하게 물소리를 내는 꽃잎들이 있다 낙담한 사람의 애간장을 쓸어 담으려고 들릴 듯 말 듯 적요한 물소리로 범피중류의 꽃잔치를 열어 주는 산벚나무 꽃잎들 겨우내 해거름 물소리로 빚은 범종을 나뭇잎 사이마다 걸어 두었으니 사월 산벚나무 아찔한 높이에 용케도 녹지 않은 마른 눈발들이 있다 짓무르고 움푹 팬 상처들도 눈발 인 나뭇결 속으로 고요히 잠겨 가는 걸까 산그늘 오부 능선에선 부르르 떨며 꽃이 꽃그림자의 봉합선 속으로 들어가는 소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슬픔에도 저마다의 생로병사가 있다는 듯물소리 붐비는 저녁의 문간엔제 꽃잎 지우고서도 잎 틔우는[…]

산벚나무의 시간
김명리 / 2010-11-30
C. 매컬러스 : 슬픈 카페의 노래 혹은 혹 속의 노래 / 김진영

[음악의 순간과 언어의 떨림] C. 매컬러스 : 슬픈 카페의 노래 혹은 혹 속의 노래 김진영(철학자) Carson McCullers 수요일 저녁마다 소설 읽기를 한다. 이번 학기 수업의 테마는 사랑이다. 오늘은 C.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The Ballad of the Sad Cafe')>를 읽는다. 물론 이 소설은 ‘매컬러스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형적 사랑의 논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사랑의 논리와 더불어 내가 주목하는 건 소설 속에 배치된 공간들, 더 정확히, 그 공간들의 이동이다. <슬픈 카페의 노래> 안에는 세 개의 공간이 존재한다. 카페의 공간, 밀실의 공간, 혹의 공간. 이 공간들은 매컬러스적인 기이한 사랑의[…]

C. 매컬러스 : 슬픈 카페의 노래 혹은 혹 속의 노래
김진영 / 2010-11-30
독한 눈 / 문성해

독한 눈 문성해 젊은 여자와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수련 앞에 앉아 있다 맹인안내견은 세상에서 가장 순한 개여자에게 수련의 자태를 수련의 언어로 짖어 주고 싶지만그저 등줄기가 구릉처럼 순하게 굽어 있다 올해도 때맞춰 하양 노랑 연분홍 같은 순한 빛이 못물 위로 번지는데 여자여, 무슨 독을 보았는가지천에 널린 꽃빛과 초록들이흘러 들어가지 못하게 독한 눈을 가졌구나 개가 여자의 푹 꺼진 눈두덩을 분홍빛 혀로 척척 핥는 소리여름이 또 한 꺼풀 얇아지고 있다 《문장웹진 12월호》

독한 눈
문성해 / 2010-11-29
세 사람 / 하재연

세 사람 하재연 처음 들어 보는 노래를 하기 위해침묵이 필요하고너를 만나기 위해서는늘 또 한 사람이 필요하다. 잘 알 수 없는 일들을대신하고 있는 한 사람은조금쯤 불쌍하겠지.소보로빵처럼 부서지는 몸으로꿈속에서라도 자꾸 태어나겠지. 피와 젖과눈물 따위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나는어디 다른 곳에 있을 텐데. 잠을 자면 키가 쑥쑥자라고자라서근사한 손과 발이 내 것이 될 거라믿었다. 땀냄새가 진짜인지 겨드랑에 대고킁킁거리기도 했었는데 옆모습이 반 접힌 채로사람이저기 지나간다. 《문장웹진 12월호》

세 사람
하재연 / 2010-11-29
서너 해 주먹다짐 끝에 치르다 만 성인식과 창백한 반점의 축제 같은 / 주하림

서너 해 주먹다짐 끝에치르다 만 성인식과 창백한 반점의 축제 같은 ―악에 대한 보답을 악으로부터 얻으며, 칼의 교의(敎義)*를 실현하는 임경섭 시인에게 주하림 오늘의 천국 너는 담배 피는 여자들로만 밤의 마지막을 보냈다 낯설게 설명한다 한들 적의(敵意)로 피어나던 저번 생에도 안개꽃과 담배연기를 동시에 끌어안고 살았던가 네게 몰락이란 전부를 안아보았기에 돌아서야 했음의 긍정이었다 너는 답을 해도 혼났고 답을 하지 않아 혼났다 사랑하는 여자 표정을 곧잘 따라짓기 시작할 때 가끔 갓 구운 빵 취급을 당했다 어떤 여자에게만큼은. 아프단 말이 네 옆모습을 딱딱한 목판화로 닮아갔다 바람 부는 날 그녀들이 빨아놓고 간 그림자 내가 그 그림자의 주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서너 해 주먹다짐 끝에 치르다 만 성인식과 창백한 반점의 축제 같은
주하림 / 2010-11-25
평형의 세계 / 이혜리

평형의 세계 이혜리 우리가 만나면 모든 게 줄어들어요 손 세 개가 흔들리고 발 두 개는 걸어가지요    나는 명랑해져서 온종일 부풀어 올라요 멀미약을 가루 내서 먹어 볼까요?   얼굴의 윤곽이 시차를 두고 아래로 아래로 느슨해집니다 입까지 턱 밑으로 흘러내려요 그렇게 숨 오래 참기 연습을 하다가   얼굴이 반쯤 녹아내리고 말았어요   나는 발목까지 바닥날까 봐 잘라 둡니다 현관을 얼씬거려서가 아니에요 툭, 툭 건드리느라 눈만 피곤했겠죠?   내 발목이 예뻐요? 당신과 걷고 있는 게 아닌데도   당신, 걷다가 우산처럼 갑자기 뒤집어지는 당신 들숨날숨의 순서를 아무렇게나 바꾸는 순간을 사랑해 나는 노래를 부르면서[…]

평형의 세계
이혜리 / 2010-11-25
작은 사슴 / 박기순

작은 사슴 박기순     두 자루의 검은 상대를 베어낼 듯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떨어진 꽃이 강물 위로 흘러 세상의 기쁨을 안다. [落花流水認天台]’ 당나라 시인 고변의 시구에 나온 것처럼, 둘의 검무는 강물을 따라 흐르는 꽃잎과 같았다.“예 대협의 제자 중 첫째가 제일이라더니 이제 보니 넷째가 예 대협을 잇겠군.”   1 이슬 구르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은 고요한 새벽, 검술 수련을 끝낸 모두연은 평소처럼 뒷산에 올랐다. 다른 날보다 그의 발걸음은 빨랐다. 혼자 끙끙거리며 만든 가마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꺼내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산 너머 마을에 있는 가마를 곁눈질로 보고 만든 것이라 제대로 구워져 나왔을지[…]

작은 사슴
박기순 / 2010-11-23
21세기적 블랙 펑크, 저자의 죽음, 늙어 가는 문학의 찰나적 young함 / 배수아

[작가가 읽은 책] 21세기적 블랙 펑크, 저자의 죽음, 늙어 가는 문학의 찰나적 young함 헬레네 헤게만의 『아홀로틀 로드킬』 배수아    “난 범죄자가 아니에요, 단지 지금 모양새가 좀 나쁠 뿐이지.”  – 헬레네 헤게만, 2010년 8월 팝쿨투어 잡지 《스펙스》와의 인터뷰에서    2010년초 독일 문단에 커다란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헬레네 헤게만의 소설 『아홀로틀 로드킬』은 – 지금껏 문학사에서 아마도 우리에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빈번하게 일어났었을 것이 틀림없는 – ‘훔친 깃털’로 치장된 소위 ‘표절 작품’이라는 것과, 10대 문학에 대한 기존 평단의 변함없이 상투적인 태도,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 매번 얘기되어 오고 항상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던 모랄 해저드의 의미와 더불어[…]

21세기적 블랙 펑크, 저자의 죽음, 늙어 가는 문학의 찰나적 young함
배수아 / 2010-11-22
날마다 우리는 이웃 / 조민

날마다 우리는 이웃 조민 툭, 하면첫사랑에 우는 손수건입니다훅훅 입김을 불면서마주앉아 숯불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서까매지는 나무젓가락입니다반쯤 익은 맛과검게 탄 맛만 골라 먹는 식성이지요 집이란 집은 다 떼어 먹어요유리란 유리는 다 깨부수고의자란 의자는 다 부숴 놓고아이만 사느냐 누가 담배를 피냐 무슨 색소폰을 밤마다 부냐매일매일 방문하고 매일매일 인사합니다 온몸에 비누칠을 하고 나 잡아 봐라 나 잡아 봐라 뛰어다니면서놀아 줘 놀아 줘 놀아 줘가죽소파를 긁으며 가르릉거리는고양이 어때요, 우리 이웃 신청할까요? 《문장웹진 12월호》

날마다 우리는 이웃
조민 / 2010-11-22
머리카락 / 유종인

머리카락 – 立冬 무렵 유종인 창틀 모진 골에도 방을 들이는지 몰라도머리카락은 기일게참 덤덤하게 臥病을 구부려 뉘어 놓고누워도병색이 없다 추워질까, 뼈도 살도 한 무리니 또 사무치게 추워질까  창을 닫아도 바람은 끼는 법,살이 에이면 뼈를 내고뼈에 사무치면살을 찌워 덮으라, 헛말은 요령처럼 흔들었으나 옷보다 긴 양말을 신겨 줘야지 먼지는창틀 골진 방에 깊이 들어서새벽별이창틈에 끼는 것도 몰라라  《문장웹진 12월호》

머리카락
유종인 / 2010-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