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聽診)의 효능 / 이은규

청진(聽診)의 효능  이은규 누가, 두 귀를 잘라 걸어 놓았을까 유리창 너머 금속성의 귀노을을 흘리며 허공을 듣고 있는 것은 청진기였다의료에 쓰이기보다 헤드셋에 가까운, 혹은 서랍 당신을 듣기 위해 항상 열어두었던 내 귀 채집된 음을 기억의 서랍 속에 숨겨놓은 날이 길다 귀는 깊어 가장 슬픈 기관일거라는 문장 말더듬이였던 당신마음을 따라가지 못한 말들이 몸을 떠도는 거라는 소견이 있었다오래 기다린 처방은구름의 운율에 따라 문장 읽기를 연습해보라는 것, 혹은 가슴에 귀를 대고 기다려주는 것 청진, 듣는 것으로 보다모든 병은 마음이 몸에게 보내는 안부말더듬이를 앓는 건 그가 아니라 마음이었으므로, 말에 지칠 때마다당신은 구름이 잘 들리는 내 방 창문을 두드렸다문장 읽기를[…]

청진(聽診)의 효능
이은규 / 2010-08-27
트럭 / 임성용

트럭 임성용 밤 깊은 고속도로휴게소,나는 5톤 트럭을 몰고 네 시간 반을 달려왔다아마 2톤 이상은 과적이었을 게다과적보다 무거운 것은 갑자기, 눈발처럼 쏟아지는 잠의 중량  잠은 얼마나 위험하게 적재된 낙하물인가달랑 내 몸 하나 들어가 누울 운전석 뒷자리에밧줄에서 풀린 잠을 잠시 편안하게 눕혀놓았다베개를 깔고 동잠바를 덮어 주고포근하고 행복한 잠의 살결이 스펀지처럼 가벼워질 때까지나는 그녀의 보드라운 젖을 만져 보았다     그녀는, 내가 지칠 만하면지방질이 물컹 빠진 젖의 꼭지를 내 메마른 입술에 꼭 한 번씩 물려 주었다  밤 깊은 고속도로휴게소, 배식대를 빠져나온 나를 닮은 사내들이그녀의 젖에서 흘러나온 구수하고 따끈한 숭늉을 마셨다숭늉을 마시고도 이쑤시개를 물고 있는고장난 후미등에[…]

트럭
임성용 / 2010-08-24
사랑은 백년 / 최명란

사랑은 백년 최명란 당신을 만나본지 백년가끔 간격 없는 숲 속에서 만나 까무러친 적이 있고나무의 젖을 빨며 고분고분 했다 그리웠어요 당신은 어차피 숲 속에 있는 사람 풍경이 빠른 속도로 지워지고 있다 어느 구멍으로 들왔다 어느 구멍으로 나가나그리운 쪽으로 팔을 뻗는 나무의 숨구멍으로 번개같이 다녀가시나 남자와 여자는 어디를 포개도 꼭 맞는 체위그러므로 사이좋은 미친 짓을 하고이별의 경고에도 사랑을 하고 한다 나무의 젖을 물고 가슴만 할딱거리는 당신 사랑은 나무로부터 나왔기에 이토록 푸른 그림자  당신은 세상의 저쪽, 과도한 사랑, 또는 숲 속 백년,  《문장웹진 9월호》  

사랑은 백년
최명란 / 2010-08-21
엑스트라 / 최호일

엑스트라 최호일 이 한 여름에 두꺼운 옷을 껴입고 우리는 웃는다여름 날 당신의 입술과 내 손가락 사이로 내리는 눈송이들혀가 혀를 빨아 먹으며바위 사이에서 커다란 뱀과 여자와 허벅지가 튀어나올 때주인공은 홀로 용감하다 대기 속에는 진짜 총알이 들어있고 여섯시에 총을 맞아야하므로우리는 그녀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내일은 지퍼가 열린 줄 모르고 들고 다니는 트렁크 속에서가면과 시체가 쏟아질 것이다도무지 믿을 수 없는 영화처럼저녁이 오고 화면엔 보이지 않지만 쓰러진 술잔이 있다 그것이 어두운 소리로 굴러 떨어져 강가에 닿을 무렵 겨울이 와야 한다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내 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문장웹진 9월호》

엑스트라
최호일 / 2010-08-20
선인장 연구소 / 이문숙

선인장 연구소 이문숙  세상의 끝에는 어김없이 연성각이 서 있다백미인이라는 가루로 만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면을 사해파라는 검은 소스에 비벼 먹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소문이 악어아가배의 세상에도 전해진다뜨거운 태양이 서향의 연성각을 단련하는데도창문에 거취옥으로 지은 주렴이 꼼짝하지 않는데도그곳에는 대통령, 장군, 보초들이 반야의 나무를 쪼개 만든 젓가락으로세설금이라는 차디찬 눈 속에 냉장시킨 면을 악기의 현처럼 쭈루륵 빨아올린다 북두각금의 탄주라고나 할까그 순간 석화기린의 등에선 세상을 배경으로대능주관의 세계가 펼쳐진다금사자, 투쟁용의 뇌부각에도 무슨 변화가 왔는지커다란 사자왕환의 방석과홍학환의 등받이 속에 묻혀 왕비단설의 공연을 본다은파금의 곡조는 폭발한 화산의 재가 지연시킨세상의 이주로에 묶여 있는 여행자의 지친 뇌신을 달래주기도 한다는데기적의 거리에서[…]

선인장 연구소
이문숙 / 2010-08-20
배꽃나루의 달빛 / 장주식

배꽃나루의 달빛 장주식 “강이 그곳에 사는 주민들만의 강이냐?”나는 장승공원 상황실 사람들과 매화시인이 강조하던 말이 떠올라 그렇게 말하였다. ‘외지인들은 나가라’는 펼침막을 보고 너무 답답하다면서 한숨을 쉬던 매화시인. 어떻게 온 나라를 휘돌아 흐르는 강물이 한 지역만의 강이냐고, 사람들이 너무 자기 눈앞만 본다고 탄식을 하던 매화시인.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세 통의 전화가 별 시차도 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려왔다.  대학동창인 중래는 먼저 너털웃음부터 터뜨렸다. 목소리를 듣는 건 삼년 만이었다. “걸걸걸, 임마. 꼭 형님이 먼저 전화를 해야 되나?”책망부터 하고선 잘 지내냐, 뭐하고 사느냐 같은 별 뜻 없는 인사말을 늘어놓더니 좀 점잖은 목소리로 진규 아버지의 부음을[…]

배꽃나루의 달빛
장주식 / 2010-08-20
진주가 있는 잠 / 곽은영

진주가 있는 잠 곽은영 당신들이 나를 보며 돈을 벌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구분했듯이나는 당신들을 딱 두 개로 구분했다죽은 자와 죽을 자 당신과 마음 편하게 누울 수 있는 자리를 찾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나는 줄곧 찾아왔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내 팔 안쪽그래서 조금 시시했다하지만 그곳의 당신은 내가 처음 보는 당신당신을 감싸고 있었던 것은 당신의 죽음 그 품은 거대해서당신의 숨결만큼만 보이고당신의 덩어리만큼만 만져지지만그것은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고요했다 나는 동의했다 겨드랑이 사이에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던 숱한 이야기들을 떠올렸다하늘의 지도를 몸에 새긴 채 계절을 이동해온 새들처럼 당신을 품에 안고 데려갈 검은 비단의 길을꿈꾸었다[…]

진주가 있는 잠
곽은영 / 2010-08-20
어떤 자장가 / 구병모

  어떤 자장가 구병모    극심한 저온에 뒤틀려 네 귀가 잘 맞지 않는 철제 현관문 사이로, 투우사가 나부끼는 붉은 천에다 머리를 들이대고 달려드는 커다란 소처럼 외풍이 밀고 들어온다. 회색 페인트가 갈라져 벗겨진 자리에 다갈색 녹이 드러나 문이 흔들릴 때마다 가루가 되어 떨어진다. 얇게 들떠 수선이 덜 된 옷자락처럼 보이는 페인트 조각은 외풍이 문을 두드릴 때마다 가늘게 팔랑거려서 팽팽하게 펼친 날개를 떠는 벌레와도 같은 소리가 난다. 현관 안쪽으로는 와인색 구식 신발장이 놓여 있는데 삼분의 일쯤 열린 여닫이문 틈으로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붉은색 아기 신발 한 짝의 뒤축이 보인다. 현관 왼쪽으로[…]

어떤 자장가
구병모 / 2010-08-20
바다를 / 최원준

바다를 최원준 다만 네가 출렁이는 내 삶의단 하나의 부표이기를지쳐 멍하니 수면만 바라보고 있을 때잔물결 일으키며그 곳에 네가 있어 주기를이렇듯 끊임없이 흔들리는 게살아가는 일 아니겠느냐며내 삶의 맞은편에서너 또한 흔들리고 있어 주기를그래 어느 날낡고 부서져 헐거워진 몸으로라도그대를 찾는다면균형을 잡지 못하는 기우뚱한 어깨 위이제 흔들리지 않아도 된다는 위안처럼소금기 짙은 편지 한 통띄워 줄 수 있기를  《문장웹진 9월호》

바다를
최원준 / 2010-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