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구름 아래 늑대 새끼 우짖는다 / 하지은

밤 구름 아래 늑대 새끼 우짖는다 하지은 풀벌레들이 귀를 어지럽히는 자정, 아들의 무덤가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떨군다."이것이 마지막 눈물일 게다. 용서하려무나, 휴야."다시 올 것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칼을 뽑는 매순간이 마지막일 것처럼 살아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아들을 묻은 지 열하루가 지났다. 혼자 머물기에 이 산장은 너무도 춥고 삭막하다. 모아두었던 겨울 식량과 장작을 정리하고 떠날 채비를 하는데, 숲 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걸음을 내딛었을 때 나는 이미 아들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소리가 난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다 실없이 웃어버렸다. 이미 가버린 아들 녀석이 나를 찾으며 울었을 거라 생각하다니, 슬픔도 자비도 느낄 줄[…]

밤 구름 아래 늑대 새끼 우짖는다
하지은 / 2010-07-30
남쪽나라 십자성은 / 김경미

  [예술을 위하여_3] 남쪽 나라 십자성은 김경미 갑자기 십자성을 기억해낸 건 순전히 멕시코의 대표적인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의 칼라꽃 그림들 때문이었다. 칼라꽃은 시험지 한 장을 길게 말아 올린 듯한 꽃이다. 길고 가는 줄기 끝에 꽃잎만 딱 한 장 말려 올라가듯 핀, 긴 깔때기 같은 꽃이다. 정갈하면서도 순수하고 우아하고 도도해보여선지 언젠가부터 예식장 치장이며 신부부케에 1순위로 사용되고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후문 입구에도 조화칼라꽃이 잔뜩 치장되어 있다. 처음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에서 그 꽃을 봤을 때는 백합꽃인 줄 알았었다. 그림 제목 중에 Calla-Lilien이란 단어가 있었고 생긴 게 비슷해서였다. 그때는 아직 디에고 리베라라는 화가 이름도[…]

남쪽나라 십자성은
김경미 / 2010-07-30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 김지선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 2010-07-30
우아한 관계 / 박연숙

  우아한 관계 – 유령거미 박연숙 여덟 개의 손가락에서 예순여섯 개의 풍경이 펼쳐진다 다시 머나먼 너를 향한 여정  순결한 소용돌이 거짓말은, 투명한 몸짓으로 흔들린다 마지막 인사는 나의 취향 입술, 눈, 심장을 별자리로 걸어 놓는다 날개를 믿지 않는다면 입 안의 어둠을 모두 보여주겠다 몸에 대한 예의로 팽팽한 시위를 한번 울려 주렴, 입맞춤 오랫동안 허기를 길들였다고 믿었으나,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단 하나의 함정을 만들 수 있다   《문장웹진 8월호》

우아한 관계
박연숙 / 2010-07-27
인생의 주사위를 굴려보세요. / 진산(작가)

인생의 주사위를 굴려보세요. 진산(작가) 여러분은 혹시 TRPG(Table Talk Role Playing Game)를 아시나요? 처음 들어보시는 분이라도 RPG라는 말은 익숙할 겁니다. 와우(World of Warcraft)나 아이온 같은 게임들은 MMORPG라고 하지요. 플레이스테이션이나 XBOX 같은 게임기로 즐기는 RPG 게임도 있고요. Role Playing Game 이라는 것은 보통 게임 속에 자기의 분신인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의 ‘역할’을 가지고 노는 게임입니다. 전사라든가, 성기사라든가, 사제, 마법사 같은 게임 속의 ‘역할’을 Role 이라고 하죠.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이거 안 해보면 후회할’것이라고 소개하려는 것은 바로 이런 RPG 게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TRPG입니다. TRPG도 분명히 RPG입니다. 그러나 테이블에 모여서 말로 하는 RPG죠.[…]

인생의 주사위를 굴려보세요.
진산(작가) / 2010-07-25
클럽 블랙씨 / 안광

  클럽 블랙씨 안광    나는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았다. 처음엔 그리 긴 여행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한 두 달 정도면 내가 죽을 장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서너 달 정도가 지나면 이 세상에서 내 육신과 영혼은 바람같이 사라져 버리리라 생각했었다.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이국의 모래사막 한 언덕 즈음이나, 푸른 물결이 파도치는 지중해의 어느 가파른 단애(斷崖)에서나, 아니면 열대림 우거진 어느 습한 밀림 속에서 조용히 몸을 던져 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한 것이, 인천공항에서 챙이 큰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출국수속을 밟았던 때가 벌써 작년 9월,[…]

클럽 블랙씨
안광 / 2010-07-23
아직도, 에게 / 박라연

  아직도, 에게 박라연 간절함과 애벌레, 패자의 밥으로 저물다 보면 눈에서도 향기가 흐를까 누룩과 눈의 향기를 봉해 매일매일 쓸개에 걸면 건너야 할 다리를 취하게 할 수 있을까 온몸에 칼날이 돋은 사람을 꽉 껴안을 때마다 살아남은 내 피가 내 죄를 삼킬까       산 것 안에만 숙식하는 일백 마리의 애를 벼락에 지지면내일이 돋을까    상처를 모래 위에 게워내 다른 저를 세공한, 대왕나비 문양의 저 모래알 게의 혼과      몸은 가도 영혼은 뻘에 새기는 파도의 繡놓기를 문신하면 다른 피가 흐를까  《문장웹진 8월호》   

아직도, 에게
박라연 / 2010-07-22
반전(反轉)이 없는 오후 / 김정웅

  반전(反轉)이 없는 오후 김정웅 오늘, 우리 동네는먹구름 아래에서 머물 것이다, 빨랫줄에 걸린옷가지 속 바람들이몸부림을 치기 시작한다 미친 듯이개들이 짖어 대고 교미를 마친 고양이들이차도로 뛰어든다 며칠 전에는처녀 혼자 사는 옆집에도둑이 들었다고 한다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꽉, 입을 다물었던 여자는 밤마다 흐느꼈다빨랫줄에 걸린 속옷 하나가 툭, 떨어진다밤새 속옷의 얼룩을 지우던 기억,들키지 않기 위해서는앞으로 더욱 지독한 짓을 당하더라도입을 다물어야만 한다그러나 개들은 더욱더 짖어 대고차도를 건넌 고양이들은 이제돌아오지 않을 것이다튼튼한 자물쇠와 방범창으로도도둑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울음이 새어 나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 우리는며칠째 비우지 못한 재떨이처럼더럽혀졌고잡아 뜯긴 화장실 창문처럼부서졌다, 속옷을 털어 다시 빨랫줄에[…]

반전(反轉)이 없는 오후
김정웅 / 2010-07-22
1952년 하동, 오영희가 열세 살이었을 때 / 공광규

  1952년 하동, 오영희가 열세 살이었을 때 공광규 강바람이 얼굴에 모래를 흩뿌리던 이른봄군경과 기관장과 주민과 초중고생의 대열을 맨 앞에서 끌고 가는 사내를 보았어요.누더기를 걸친 퀭한 눈의 사내는 손이 뒤로 묶인 채 송림으로 향하고 있었지요.흐트러진 머리칼을 한 예수의 형상이었어요. 사내는 모래언덕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총을 든 군경 백 수십 명이 그를 둘러쌌지요.군경 한 명이 그의 입에 건빵을 넣어주자그는 얼른 씹다가 목이 마른지 혀를 내밀더군요.태양처럼 빨간 혀를 빼고 있는 그에게 군경들은물 대신에 빵! 하고 총알을 먹였어요.푹 고꾸라졌던 그가 벌떡 일어서자 군중들은무서워! 하며 앞사람 등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지요.조용히 해! 군경들이 군중을 향해 소리쳤죠.그러는 사이[…]

1952년 하동, 오영희가 열세 살이었을 때
공광규 / 2010-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