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 속을 거닐다 / 이수미

  몽유 속을 거닐다 이수미 문을 밀고 들어서니간이침대 하나 덜렁 놓여있었다 겁에 질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나를 침대에 눕게한 사내는 온몸의 감각을 손끝으로 끌어 모아 차근차근 내 몸을 읽어 내려갔다 블라우스 앞섶이 헤쳐지고 치마가 엉치까지 벗겨졌지만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손길이었다 사내의 손끝은 정확히 내 몸에 숨은 나를 찾아냈다 사내가 그곳으로 조심스럽게 뜨거운 기운을 밀어 넣었다뻐근한 통증이 몰려왔다 막혔던 문이 열릴 때마다 정신이 아득했다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입술 사이로 가는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오래도록 불길 들지 않은 냉구들 같던 심장의 피돌기가 빨라지고 있었다 괜찮다며, 가볍게 등을 토닥이는 사내의 손길에 팽팽하게 지탱하고[…]

몽유 속을 거닐다
이수미 / 2010-06-27
신검(身檢)에 대하여 / 이상국

  신검(身檢)에 대하여 이상국 신검을 했다고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안경 때문에 2급을 받았단다다 컸구나  그런데 왜 나는 그 2급이 별로 기쁘지 않으냐아들이 나라를 지키러 가게 됐는데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그러나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때가 되면 제에-미는 소포로 부쳐온 아들의 옷 꾸러미를 안고 울고누나는 통닭을 싸들고 남진과 여행 겸 어느 산골짜기로 면회를 갈 것이다내가 좀 뜸을 들이다가출퇴근하는 군대를 살면 어쩠냐니까아들은 그거 평생 따라 다닌단다 애비는 몸이 부실해 징집면제를 받았는데이제 우리 집안도 떳떳하게 됐구나.  그리고 내가 저를 낳았을 때 징집 같은 건 생각도 못했던 것처럼저 아이도 언젠가 제 아들의 신검 소식을[…]

신검(身檢)에 대하여
이상국 / 2010-06-27
뒷산 / 이대의

  뒷산 이대의 늘 뒤에 있었다있는 듯 없는 듯간섭이 없었다언제나 나를 받아주어서아버지가 혼 내키려고 하면도망치던 곳풀꽃으로 치장한 낮은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울 아버지 힘들 때찾아가는 곳할머니 산소는내 뒷산이었다  《문장웹진 7월호》    

뒷산
이대의 / 2010-06-27
터널들 / 오정국

  터널들 오정국 누구도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 무작정 흘러내리는 산사태처럼 터널이 밀려온다예고도 없이 귀가 먹먹하다 언젠가 소낙비를 피했던 곳 쏴아 쏴아 나뭇잎 소리인가 했더니검게 그을린 목구멍을 보여주는 터널 시커먼 비닐봉지 같았는데, 목줄을 푸니길바닥에 늘어지는 짐승처럼 퀭한 눈을 껌벅거리는 터널 거기서도 고래와 어부, 돛대가 펄럭거렸다는데,바람의 아득한 망루를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저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소낙비를 맞고 싶은 터널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터널공중화장실에서 옆 사람의 오줌발을 힐끔거리듯 일광(日光)의 폭포*를 내다보는 터널 터널은 어떻게든 터널을 빠져나가려 했지만골다공증 때문에 쇠지팡이를 짚게 됐다 복면을 쓴 누군가가 나를 끌고 갔던 곳, 그때는 어딜 내놔도 손색없는 흙이었는데, 꽃이[…]

터널들
오정국 / 2010-06-27
세탁소 김씨 / 오승근

  세탁소 김씨 오승근 우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수북이 쌓이기 시작한 세탁물들 평소보다 일찍 눈을 뜬 김씨 새벽바람 등지고 산동네를 나선다 예전엔, 이 산동네도 울창한 숲속이었으리라 골목길 빠져나와 세탁소 문을 열고 허공마저 빽빽이 메운 밀림 속으로 이리저리 헤집고 들어간다 팔 다리가 비틀린 세탁물을 곱게 펴 다리미판에 올려놓은 뒤 가열된 다리미를 밀고 나가자 우지직 찍 우지직 찍 섬유나무 넘어지는 소리 나무들은 톱날 앞에 무참히 쓰러지던 그때의 비명소리를 더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안주머니에 둥지 틀고 살던 이름 모를 새들을 부르고 있는 것일까 우지직 찍 우지직 찍 얼마나 많이 소리치고 싶었던가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저 아우성![…]

세탁소 김씨
오승근 / 2010-06-27
맨발의 피 / 성태현

  맨발의 피 성태현 혹한의 강변에서 카메라 줌을 당긴다순백의 카펫 위에 등장한 작은 물떼새 한 마리스포트라이트의 발광은 없어도 천만화소로 분해된 반사광이 박빙에서 작열한다사뿐히 찍어내는 고혹적인 걸음걸이카메라의 눈이 사르르 실눈을 뜬다 S모드로 바꾸자 새는,  스르르 앙가슴을 열어 최적의 노출값으로 파인다에 잡힌다깃털에 바람이 오르자 언뜻언뜻 드러나는 쇄골가늘고 긴 새의 다리, 맨발을 보여준다 발가락 사이사이 더 여리고 더 가는 골을 따라 힘차게 뻗어나가는 피얼지 않을 만큼 차가운 새발의 피를 생각한다앙상한 다리, 젖은 발로 살판을 배회하며오직 먹이를 찾아야 하는 허기진 하오날개에 바람을 품고 있으면서도 날지 않는 저 새에게서 강추위 따위는, 한 점 피일 뿐인가과다노출된[…]

맨발의 피
성태현 / 2010-06-27
사원에 들어갈 때는 머리 위의 종을 쳐라 / 김태형

  사원에 들어갈 때는 머리 위의 종을 쳐라 김태형 베다의 오래된 주문과 시구가 돌계단에 새겨져 있다신발을 벗고 보니 신발보다 내 발이 더 더럽다비가 내려 젖은 바닥에어느 겁 많은 짐승이 먼저 발자국을 찍고 갔다힌두사원 입구에 걸려 있는 구리종 하나눈치껏 나도 남들처럼머리 위의 작고 맑은 종을 친다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뭔가 흰 대리석 계단 속으로 빠져나간 걸까내 몸을 따라 그 울림이작은 소용돌이처럼 바닥 밑으로 스며든다그 뜨거운 걸 가져가려고 가두어두려고오래된 길은 그렇게 차갑다맨발로 밟고 올라간 그 자리에이제 막 한 문장이 새겨지는 걸 나는 뒤돌아보았다  《문장웹진 7월호》 Ring the bell above upon entering a temple  […]

사원에 들어갈 때는 머리 위의 종을 쳐라
김태형 / 2010-06-27
소신공양 / 김종경

  소신공양燒身供養*   김종경 술자리가 끝날 무렵, 저 혼자 구석에 앉아 떠들던마감뉴스 한토막이 덜컥 내 목에 걸렸다이름 모를 수도승이 제 삶의 등불을 스스로 꺼버렸다는 정말, 맛없는 안주였다 누군가, 너는 생生의 등불하나 켜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다비식이 끝난 후 몇 십 개의 사리가 수습되었다는 뉴스만 강물처럼 고요히 자막으로 흘러갔다. 《문장웹진 7월호》 * 소신공양(燒身供養) : 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 

소신공양
김종경 / 2010-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