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편 / 김경미

[예술을 위하여_2 ] 여행가방 편 김경미   1. 여행가방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를 보면 특이한 여행가방 축제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매년 1월초, 독일의 한 항공사가 프랑크푸르트 근처 노이-이젠부르크의 한 중학교 체육관에서 여는, 승객들이 분실하거나 잊고 간 후 보관기간이 지나도록 찾아가지 않은 여행가방들을 경매에 붙이는 가방축제다. 그런데 경매에 나온 가방들은 안이 텅 빈 여행가방들이 아니다. 마약 포함 여부만을 검색한 뒤 가방 안의 모든 내용물을 원래 그대로 둔 채 밀봉한, 누군가의 여행물품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들어 있는 여행가방들이다. 밀봉했으니 사려는 사람 누구도 내용물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방을 경매받은 새주인들은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즉석에서[…]

여행가방편
김경미 / 2010-06-30
고목들 / 이준희

  고목들 이준희      1 어서 오세요. 출입문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고개를 까닥였을 뿐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반면 K형은 예에, 라고 큰 소리로 대꾸하며 제일 구석진 곳의 테이블로 걸어갔다.홀과 바, 그리고 카운터가 훤히 보이는 자리에 내가 앉았고, 맞은편 자리에 K형이 앉았다. 직원이 메뉴판과 재떨이를 들고 다가오자, K형은 양해를 구하듯 말했다.“일행이 더 있는데, 오면 주문할게요.”“네, 그러세요.”직원이 웃음 지으며 물러갔다.   내가 눈짓하자 K형이 메뉴판을 펼치고 점퍼 안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소형 녹음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메뉴판에 적힌 양주 이름과 가격을 조용히, 그러나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며[…]

고목들
이준희 / 2010-06-28
너의 등뼈 / 진연주

  너의 등뼈 진연주    오늘은 죽기에 좋은 날이다. 오토바이의 무례한 엔진 소리까지 다정하게 느껴지니까. 어린 여자는 남자의 허리를 잔뜩 움켜쥐고 있다. 남자는 핸들을 몇 번 돌린 뒤 속력을 높인다. 어린 여자의 머리가 잠깐 뒤로 젖혀졌다가 제 자리로 돌아온다. 오토바이의 기울기를 가늠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수컷의 과시욕은 오토바이의 기울기와 반비례한다. 오토바이가 쓰러질 듯 기울수록 과시는 의기양양해진다. 남자는 오토바이의 왼쪽 몸통이 땅에 닿기 직전 방향을 틀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 어린 여자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피곤이 몰려온다. 어둠은 익숙하고 DJ의 목소리 또한 그러하다. 눈을 감으면 청각이 예민해진다. DJ의 목소리가 두개골을 파고들어 변연계를 자극한다.[…]

너의 등뼈
진연주 / 2010-06-28
거미의 집 / 권영임

  거미의 집 권영임    1. 탈피 내 몸속에는 독거미인 로즈헤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아메리카 중남부나 아프리카 등지에 서식하는 독거미가 언제부터 내 몸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S를 만나고부터인지, S와 몸을 섞은 다음부터인지. S는 타란툴라 종류인 칠레산 로즈헤어 암수 한 쌍을 선물로 주었다. 거미줄에 대롱거리는 시커먼 거미밖에 모르던 내게 코발트, 블루, 금빛 털의 타란툴라를 사랑하게 만든 건 S다. 플라스틱 원통에 담긴 로즈헤어는 거의 움직임이 없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거미를 온종일 바라보고 있다. 대형거미에 속하는 로즈헤어는 수명이 다할 때까지 탈피를 통해 성장한다. 알로 태어나 탈피를 해서 유충이 되고, 유충이[…]

거미의 집
권영임 / 2010-06-28
‘스미다’라는 말 / 장석주

  ‘스미다’라는 말 장석주 스며라 작약꽃들아, 입맞춤 속으로!스며라, 모란꽃들아, 여름으로!늑대에게 곗돈과 밥이 스미면 개가 되고고라니에게 눈 먼 새끼가 스미면 안개가 되리. 기차가 눈썹 같은 환등(幻燈)을 달고 달릴 때첫 번째 저녁은 두 번째 저녁으로 스미고, 당신과 내가 스밀 수 있다면우리는 호젓한 호밀밭이 되리. 3월에 때 늦은 폭설이 내리는데,여름 성경학교가 스며 진눈깨비로 변하네.당신에게 스미는 것은오직 나의 할 일, 나는 물옥잠화 같이 웃으리, 봄에서 여름까지. 시궁쥐는 망루를 갖지 못하고 사랑은 뒤집히는 우산보다 견고하지 못하지만  ‘스미다’라는 말은빨래 마르는 일보다 숭고하네. 어깨 잇자국 때문에 당신은 웃을까, 안 웃을까? 당신이 웃지 않는다면 차마 가여운 당신에게로 내가 먼저[…]

‘스미다’라는 말
장석주 / 2010-06-28
하, 눈부신 초록 잎 두고 / 허형만

  하, 눈부신 초록 잎 두고   허형만 하, 저 눈부신 초록 잎 두고 하, 이 눈부신 초록 잎 두고 가지마라 나의 시여 아직은 우리가 이별할 때가 아니다 누군들 한번쯤 인연의 벼랑에 서서 눈물 젖은 손 흔들어보지 않았으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눈부신 사랑의 불꽃아직도 예리한 칼끝처럼 가슴 저미느니 가지마라 나의 시여 아직은 우리가 그리워할 때가 아니다 하, 저 눈부신 초록 잎 두고 하, 이 눈부신 초록 잎 두고  《문장웹진 7월호》

하, 눈부신 초록 잎 두고
허형만 / 2010-06-27
사바사나(Shavasana) / 조유리

  사바사나(Shavasana) 조유리 죽음을 개었다 다시 펼 수 있나깔았다 다시 개어 윗목에 쌓아두고 목숨을 되새김질해 보는 체위숨골이 열리고 닫히는 허구렁에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나로부터 나 조금 한가해지네 감은 눈꺼풀을 딛으며천장이 없는 사다리가 공중을 빗어 올리고 목덜미로 받아 낸 악장의 형식으로죽음을 게송 해도 되는 건가백 개의 현을 건너 걸어나간 먼 저녁이 되어 이 세상 계절을 다 물리고 나면어느 사지에 맺혀 돌아오나 다시누구의 숨을 떠돌다 바라나시 강가(Ganga)에 뛰어드는 바람이 되나뜬 듯 감은 듯 어룽어룽 펄럭이는눈꺼풀이 산투르 가락을 연주하는 동안 어제 아침 갠 이부자리가 내 숨자락을 깔고기웃기웃 순환하는 동안  《문장웹진 7월호》

사바사나(Shavasana)
조유리 / 2010-06-27
현대, 미술관 / 정채원

  현대, 미술관 정채원 연인이 바뀔 때마다화풍이 바뀌곤 했다 가시덤불에서 새가 날아오르던 붉은 사막을 지나덜 마른 물감처럼 푸른 달빛 고여 있는 습지를 지나지금, 여기웃을 때만 살짝 보이는 너의 잇몸과밤마다 욱신거리는 왼쪽 무릎까지동시에 품고 싶어거울에도 보이지 않는어제와 내일, 그리고 사후까지한달음에 다 읽어내고 싶어뒤통수에 박힌 한쪽 눈과 비틀린 입술옆구리에선 세 번째 유방까지부풀고 있다 연인의 시선에 따라목덜미를 지나 허벅지 위로전갈이 기어 다니고 있다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배꼽과 심장의 위치가 바뀐 건몇 번이던가  《문장웹진 7월호》

현대, 미술관
정채원 / 2010-06-27
석류 / 정진규

  석류 정진규 태어나기 전에도 세상에 태어나라 하시는 그런 귀띔을 받았을 터이다 다만 듣지를 못했을 터이다 귀가 열리기 시작한 이후에는 시인이 된 이후로는 오늘은 무슨 내용일까 무슨 색깔일까 기다림의 나날이었다 황홀한 예감의 나날이었다 오늘은 그런 귀띔대로 석류 두 그루를 심었다 석류는 꽃도 좋고 맛도 좋다 쩍 벌어지면 보석 바구니다 말씀도 함께 심었다 석류, 이름도 함께 심어야 석류의 몸이 된다 그렇게 자라 오르는 몸을 베끼고 싶었다 오늘은 그런 귀띔이 있었다 《문장웹진 7월호》        

석류
정진규 / 2010-06-27
슬픈 기도 / 이원규

  슬픈 기도 이원규 공중화장실 벽에 몰래 쓰고암실 같은 다방 커피 잔 속의 각설탕을 녹이며티스푼으로 그 이름을 썼다 최루의 거리에선 온몸 혈서의 깃발로 허공에 쓰고 만리포 백사장과 지리산 실상사 허허 눈밭에선 발자국 발자국들을 이어서 쓰고지리산 둘레길 850 리를 걷고 걸어겨우 한 글자 거대한 동그라미를 그리며바람이 불 때마다 팽팽한 활이었다 화살이었다 비로소 내 이름을 쓴다남원 곡성 구례 하동 섬진강변을 달리며오프로드 모터사이클을 타고전국 오지의 잊혀진 비포장 길 위에 내 이름을 쓴다산길 둑방길에 처박고 나자빠지며자음 ㄱ자에 발목을, 모음 ㅠ자에 어깨를 다치며 산마을 강마을 2만 리를 걸어도지구 일곱 바퀴 거리를 질주해도 대체 무슨 불립문자인지[…]

슬픈 기도
이원규 / 2010-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