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멜 마끼아또 / 김설아

카라멜 마끼아또 김설아    그는 서른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애 같은 면이 있었다. 생김새도 소년 같고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기 때문인지 누구나 그를 보면 귀여움이나 보호본능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이 나이만 먹은 모조어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그에게는 그 나이의 남자에게서 보기 드문 반짝이는 감각이 있었고 자신만의 취향이 확고했다. 이것이 그를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같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옷을 너무나 좋아했고, 자라서 하고 싶은 것도 옷 만드는 일밖에 없었다. 때문에 다른 일상적인 일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기는 했다. 그는 한 번도 소위 말하는 정규직을 가져[…]

카라멜 마끼아또
김설아 / 2010-04-30
분실신고 / 이미욱

분실신고 이미욱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남자 화장실 팻말에 여자 팬티가 걸려 있다. 입들이 쉴 새 없이 파닥거렸다. 소문은 순식간에 파다하게 퍼졌다. 5층 남자 화장실 복도 앞에는 수군거리는 눈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한 발 늦은 뒤였다. 사건을 접수한 삿갓씨가 현장 검증을 마치고 증거물도 확보해 갔다고 했다. 몇몇 소식통이 팬티는 핑크색이고 심플한 디자인으로 품위와 섹시미를 강조하는 외국의 C브랜드라고 전했다. 국내 브랜드만 고집하는 여자가 아니라면 하나쯤 소장하고 있을 제품이다. 여기저기서 후줄근한 팬티가 아닌 게 다행이라며 수군거렸다. 새삼 깨달았다. 수치심보다 자존심이 본능적으로 발동한다는 것을. 팬티가 언제부터 팻말에 걸려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분명한[…]

분실신고
이미욱 / 2010-04-30
야식 / 박진규

야식 박진규    나는 아파트 단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공원의 남자 화장실에서 아내를 찾아냈다. 남자 화장실의 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지켜보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고수머리의 남자가 때 낀 세면대를 붙잡고 거울을 보았다. 수도꼭지를 잠그지도 세게 틀지도 않아 물줄기는 작은 소리를 내며 배수구로 흘러들었다. 운동을 나왔다 들렀는지 반바지 차림에 셔츠의 목둘레와 겨드랑이는 땀으로 펑 젖어 있었다. 남자는 노랗게 질린 얼굴이었는데 눈물은 흘리지 않았으나 눈이 붉었다. 남자는 몸을 돌려 내 쪽으로 한두 걸음 걸어오다 멈추었다. 강파르게 훌쭉한 볼은 볼품없었고 턱 끝의 염소수염이 지저분했다. 다만[…]

야식
박진규 / 2010-04-30
이질성, 안에 있는 바깥에 대하여 / 고봉준

이질성, 안에 있는 바깥에 대하여 고봉준 1.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작가 김연수의 이 말은 ‘타자’에 대한 우리 시대의 윤리처럼 들린다. 이 경우 ‘타자’를 외국인, 난민, 이주민, 탈북자, 혼혈인 등으로 불러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이해의 불가능성에 절망하기보다는 이해하려는 노력 그 자체에서 희망을 감지하려 한다. 그런데 불현듯 이런 궁금증이 떠오른다. ‘노력’이라는 윤리적 개념이 국경선 너머에서 찾아온 이방인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될 수 있을까? 이 의문은 자본의 지구적 확장과 노동력의 국제적 이동이 일상적 풍경이 되어버린, 국민국가의 경계가 느슨해지고[…]

이질성, 안에 있는 바깥에 대하여
고봉준 / 2010-04-30
뚜껑 & 마개 / 권혁웅

[권혁웅의 상상이야기_5] 뚜껑 & 마개 권혁웅 @ 커플지옥 바늘 가는 데 실이 있고 수나사 있는 곳에 암나사가 있듯, 마개 닫은 곳에는 따개가 있습니다. 커플에도 종류가 있는 걸까요? 실과 바늘이야 본래 천생연분이고 암나사와 수나사가 오래 산 부부와 같다면, 마개와 따개는 토라지고 달래는 애인들 같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그예 열어젖히는 솜씨 좋은 애인이 마개지요. 하긴 망치와 못도 있으니 다른 건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머리끄덩이를 잡고 두들겨도 찍소리 못하는 애인이라니, 솔로천국이 차라리 낫겠습니다. @ 사지선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왜 놀랐을까? 자라가 너무 커서일까, 아니면 너무 무거워서일까?[…]

뚜껑 & 마개
권혁웅 / 2010-04-30
하늘 벤치에는 外 1편 / 조정권

하늘 벤치에는 조정권 거북이연립주택 옥상에는 안 쓰는 찬장, 내다버린 장롱, 스티로폼조각, 부서진 싱크대들이 두엄처럼 쌓여져 있다. 오리집도 올라가 있다. 호박밭과 화단도 올라가 있다. 벤치도 올라가 있다. 그 벤치에는 트럼펫 부는 남자가 런닝차림으로 산다. 빈 소주병주위로 흙을 수없이 물어다 나른 빗방울들. 민들레 꽃씨가  날아와 커가다가, 삭아버렸다.  가끔 옥상에 빨래를 내다 거는 남자가 구석에 틀어놓은 수돗물도 보였다. 그 남자는 얼마 전 늦은 밤길에 누런 연탄재의 골을 쏟고  반듯하게 누운 채 실려 나갔다.  채마밭과  새들과 나무들과 지상철(地上鐵)이 먼저 철거를 당했다. 갈 곳 잃은 오리들은 어디론가 날아볼 시간을 두리번거리다   도로 주저앉았다. 오리들은 쭈그러진 나팔을[…]

하늘 벤치에는 外 1편
조정권 / 2010-04-30
刑 外 1편 / 조동범

刑 조동범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환하게 타오르는 석양 아래의 교수(絞首)를 천천히 어루만진다. 산은 깊고, 봄은 무심했다. 선명한 직선에 매달린 한 줌 삶이, 허공이 되어버린 바닥을 내려 보며 바람을 맞는다. 바람이 불고, 허방을 디딘 다리가 가만히 흔들린다. 적막한 바람을 따라, 다리는 비로소 몸통의 무게로부터 놓인다. 모든 것은 고요했고, 다만 한 모금 갈증이 아쉬웠다. 죽음은 그저, 오래도록 지루했다. 팽팽하게 매달린 죽음을 위해 세상의 모든 하늘과, 바람과, 별의 이야기가 섬뜩했다. 신발은 단정하고, 석양을 향해 모든 절망은 평화로웠다. 바람이 불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성스럽게 울려 퍼졌다. 바람을 따라 햇살이 잠시, 아름다웠다. 허방을[…]

刑 外 1편
조동범 / 2010-04-30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1 外 1편 / 정재학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1 정재학 기타 소리에 취해 잘못 든 길에서 쓰다만 시를 찾고 있었다 수명이 끝나가는 형광등처럼 낮과 밤이 깜박거렸다 지중해의 포도알 같은 로드리고의 음들이 소나기처럼 내렸다 가보지도 못한 아랑훼즈의 거리에 구름 멎은 눈동자로 누워있는 나에게눈 먼 작곡가의 무거운 이마가 떨어진다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2 나는 하나뿐인 바퀴가 되어 아무것도 싣지 못하고 종일 바람에 취해 굴러다녔다 안달루시아의 소녀가 죽은 개를 안고 나와 같이 뛰었다 눈동자 없는 말들이 우리를 추격했다 새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봤더니벚꽃이 피어 있었다  《문장웹진 5월호》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1 外 1편
정재학 / 2010-04-30
덮어쓰기 할까요 外 1편 / 이규리

덮어쓰기 할까요 이규리 생리 전날, 누가 불러도 대답하기 싫어먹기도 싫어종일 나무 밑동에 대못 박는 소리  통증에 옥말려 있을 때 그 전화가 왔다 반짝, 몸이 지워지면서생리통을 덮어쓰기 하였다   그러니까 중심이라 여긴 건 똥막대기혼자 보낸 일요일, 헐거운 맨홀 뚜껑    아버지를 덮어쓰기 하였고좀 잘난 애인을, 열등을, 오래된 집착을덮어쓰기 하면서 – 삶은 정공법이 아냐 돌려 차기로 오는 거야– 한곳에 매여 있다 좋은 날 다 보내지 마라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인생이 확 달라졌을까달라졌다고 다 근사했을까다시 아랫배를 묵지근한 현실에 치대며 이 작업, 덮어쓰기 할까요? 폭설 당신이 보내고 있구나다 할 수 없는 말미안하단 말이렇게 보내고 있구나[…]

덮어쓰기 할까요 外 1편
이규리 / 2010-04-30
저녁의 공복 外 1편 / 고영

저녁의 공복 고영 혼자 사는 집의 공기가 왜 이리 가볍고 虛한가. 밥을 먹어도 공복책을 읽어도 공복그리운 사람도 공복 누가 있거나 말거나오직 적막을 즐기고 가꾸는 먼지만이공복의 꽃을 피우고 있다. 아무 거나 닥치는 대로 물어뜯어보는 혼자 사는 집에서의 저녁은아직 오지 않은 슬픔에 닿아 있다. 내가 들어가 살고 있지만언제나 비어 있는 집 마중물 붓듯 소리 내어 시집을 읽다가후두둑 빗소리에 놀라 창밖을 쳐다보다가펭귄처럼 우두커니 서서 공복의 머리를 긁적이다가 애꿎은 내 그림자나 붙잡고씨름이나 한 판 하는 공복의 빈집 그림엽서 8 – 찔레꽃   밤낮없이 떠돌던 마음이 찔레꽃 향기에 찔려 화들짝, 눈을 떴는데요 소똥무더기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스한 훈김을 마시고 우시장 나서는 아버지 헛기침소리에 뜨끔, 또 한 번 마음을 찔렸는데요 어미 잃은 송아지 눈망울에 똬리를 틀고 앉은 무서리 무서리 새벽 달빛이   찔레찔레, 또 마음을 찔렀습니다 은근슬쩍 봉창 밖을 염탐하던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황톳길에 타박거리며[…]

저녁의 공복 外 1편
고영 / 2010-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