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골 판타지아 / 신장현

오르골 판타지아    신장현       눈시울이 저리게 아름답고 휘황한 불길이다. 어둠을 사르는 등걸숯 같은 불기둥을 중심으로 주변 또한 벌불과 꽃불의 일렁임이 교교하다. 저것이야말로 신의 솜씨가 아닌가. 신은 아주 자유롭고도 완전한 손놀림으로 지상 한 칸의 캔버스에 당신의 그림을 완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타닥타닥, 드당드당, 드으앙 드으앙 당…….’ 기름질처럼 건물에 가득 스미고 배여 있던 곡조였으니 불길에 또 얼마나 잘 타오를까. 태엽에 감겨 있던 오르골의 소리까지 타는 것이다. 신은 바야흐로 그림과 음악이 조합된 새로운 예술을 보여주려는 양 더욱 현란한 솜씨로 몽마르트르 위쪽 언덕배기에 홀로 앉아 있는 관람객의 혼을 빼놓고 있다. 핸드폰[…]

오르골 판타지아
신장현 / 2010-02-03
윤을 기다림 / 구경미

윤을 기다림 구경미   1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가 봉희동으로 옮겨 앉은 것은 이십여 일 전이었다. 그때는 봉희동이 어떤 곳인지, 현재 봉희동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전혀 몰랐다. 부모님이 반대한 것도 봉희동은 아니었다. 봉희동에 사는 윤이라는 남자였고, 윤이라는 남자의 집이었다. 윤은 자신이 사는 동네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는 게 없었으므로 물을 수 없었고 물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가는 곳도 봉희동은 아니었다. 봉희동에 있는 윤의 집이었다. 윤이 미리 말했어도 그녀가 봉희동으로 옮겼을지는 글쎄, 장담할 수 없었다. 윤이 옆에 있었다면 한결 견디기가 쉬웠을 것이다.[…]

윤을 기다림
구경미 / 2010-02-03
4차선 / 조윤

4차선 조윤   해가 지고 도로엔 비명이 덮인다. 자동차들은 굶주린 들짐승 같은 눈을 번뜩이며 달려간다. 어둠을 입은 대기는 소리들을 실어 나른다. 그 전령들은 도로에서 떨어진 가옥들 사이로 깊숙이 들어간다. 벽 아래 웅크리고 있다가 창문이 열리면 창을 타고 집 안으로 넘어 들어간다. 대부분 TV소리, 도마 위 칼질하는 소리에 스러져 침투에 실패하지만, 창문 밖을 오래 내다보는 노인의 귀에는 대롱대롱 매달린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들은 자극에 무뎌지는 인간의 성질에 용해되어 힘을 잃지만 노인의 멍한 눈동자는 놓치지 않고 그리로 타고 들어가 내면의 골짜기를 찾아낸다. 노인은 미닫이창을 닫는다. 자동차 소음이 뚝 끊긴다. 노인은 벽시계를 본다. 손자가[…]

4차선
조윤 / 2010-02-03
달 속의 도시 外 1편 / 이영주

달 속의 도시   이영주       흰 개는 불타오르는 검은 속살을 본다. 피부 안쪽을 보고 싶어. 몇 개의 또아리가 뱃속의 길을 만들고 있는지, 개는 머리를 내놓고 그림자 속으로 타들어간다.   화덕 옆에 앉아 흰 개의 눈동자가 사라질 때까지 아이가 동그라미를 그린다. 구부러진 다리 하나를 끊어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시간에는 웅크리고 몸을 보려구요. 아이는 난생 처음 찾아든 추위를 잊는다. 내가 나를 껴안을 때 눈물은 가장 뜨거운 안쪽이 될까. 앞발을 들어 눈곱을 떼어내며 짖는 밤.   구름은 피뢰침에 걸린 채 사방을 돌아본다. 아이의 옆구리에서 여자가 긴[…]

달 속의 도시 外 1편
이영주 / 2010-02-03
독실한 경우 外 1편 / 이문재

독실한 경우 – 식탁이 지구다ㆍ2   이문재       음식을 들기 전에 올리는 기도는 아름답다.   음식을 다 들고 나서 올리는 기도는 진실하다.   아니다.   음식을 드는 동안 내내 기도해야 한다. 음식을 몸 안에 들일 때마다 올리는 기도는 거룩하고 신성하다.       우리가 잃어버린 연금술     배추는 굵은 소금으로 숨을 죽인다 미나리는 뜨거운 국물에 데치고 이월 냉이는 잘 씻어 고추장에 무친다 기장멸치는 달달 볶고 도토리묵은 푹 쑤고 갈빗살은 살짝 구워내고 아가미 젓갈은 굴 속에서 곰삭힌다 세발낙지는 한손으로 주욱 훑고   안치고, 뜸들이고, 묵히고, 한소끔 끓이고 익히고,[…]

독실한 경우 外 1편
이문재 / 2010-02-03
파열하는 호두알 外 1편 / 이기인

파열하는 호두알   이기인       금붕어 두 마리의 삶이 호두알 속에 들어있다고 호두알을 가끔 흔들어주는 이가 있다 금붕어 두 마리의 사랑이 잠시 지나쳐서 책상 밑으로 굴러 떨어져서 나오질 않다가 보름 후에 발견되는 일이 있다 이 호두알의 일은 오래 전에 키우던 금붕어 두 마리가 우리가 사는 물 밖의 세상 말들이 궁금하여서 하룻밤 사이 거실에 놓아둔 그들의 보금자리인 어항에서 뛰쳐나와서 쿵쿵쿵 지느러미를 파닥거려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여서 비늘이 박혀 있는 배의 반동으로 파다닥 그이가 잠든 방을 찾아오면서 자정을 알리는 뻐꾸기 울음소리 열두 개를 가슴에 담아서 되돌아가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에 발견된 일과 비슷하였다[…]

파열하는 호두알 外 1편
이기인 / 2010-02-03
結界地 外 1편 / 윤의섭

結界地   윤의섭     호수에 물안개 피어오른다 물의 불, 차가운 숨 앙상한 나무는 빙벽의 갈라진 금이다 산사에서 울린 풍경 소리조차 얼어붙어 곧바로 추락한다 비늘 같은 눈 풍경에 꽂히는 눈 며칠째 이어진 혹한으로 이 오지는 불멸이다 나는 도착할 때부터 이미 절대영도였다 발을 들여놓은 순간 때 이른 겨울을 불러온 것이다 나는 뜨거운 심장을 떼어놓고 여기에 왔다 눈물은 가장 단단한 별이 되고 상처의 핏방울은 깨지지 않는 보석이 되어 갔다 수직으로 세워진 폭포와 내려오다 멈춰버린 햇빛과 한번 간신히 떠올랐지만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그대 기억 나는 빙하기다 산 너머에선 꽃이 피고 바람조차 불[…]

結界地 外 1편
윤의섭 / 2010-02-03
변신, 사내 外 1편 / 방수진

변신, 사내   방수진     1. 사내는 조금씩 얼굴을 지우기 시작했다 귀는 하품처럼 물렁해지고 짙은 눈썹은 사정없이 뭉개졌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매 끝으로 껍질이 비늘처럼 벗겨졌다, 우수수 떨어졌다 윤곽은 서서히 옅어졌다 순식간에 무너지는 배경 뭉뚝한 코,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한다   2. 변신은 철저히 자신의 테두리를 지우면서부터 시작되지 주파수를 낮추고 묵묵히 그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제 몸 돌던 달큰한 혈액에서 가까스로 팔딱이는 장기까지, 아낌없이 비워 내야한다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의 사이가 좁아지고 모든 경계가 사라질 때까지 버리고 잘라내야만 하지 입 가를 맴돌던 울음마저 먼 곳으로[…]

변신, 사내 外 1편
방수진 / 2010-02-03
이게 다예요 外 1편 / 박연준

이게 다예요 * 뒤라스의 책 「이게 다예요」에서 제목을 빌려옴.   박연준     까불고 싶어 지금 노란 하늘이야 관자놀이에 맺힌 너의 활을 좋아해 아슬아슬 떠다니는 네 질투를 좋아해 ‘실패’라는 긴 칼을 가진 사랑아 내 가장 예쁜 구멍으로 들어오렴 시간에 무성한 털이 자라고 있어 곧 우리는 따뜻해질 거야 몸을 둥글게 말았더니, 그만 뱀이 되고 말았네 뱀, 기다란 시간! 미끄러운 음악이 아침부터 밤까지 꿈,틀,꿈,틀 발목 근처를 핥고 열 갈래의 꼬리로 흐느끼지 너를 먹고 싶다 후추를 뿌려서 오후 3시에, 접시에서 만나자 겨울처럼 딱딱한 두상을 가졌으면 내 머릿속에다 알을 까줄래? 오전이 채 시들기 전에[…]

이게 다예요 外 1편
박연준 / 2010-02-03
어항 속의 금붕어 外 1편 / 김상미

어항 속의 금붕어   김상미       모든 게 너무나 빨리 변해/덩달아 나까지 변하고 싶지 않아/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보니/이젠 숨을 곳이 없다/도망갈 데가 없다/내 안에조차도   고향도 개발되고/부모님도 돌아가시고/형제들은 제각기 삶에 억눌려/오히려 숨은 곳이 없나 두리번거린다/절친했던 친구들도 개발 붐을 타고 올라/전혀 낯선 얼굴들로 변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지만/놀라운 가속도로 변해가는 21세기 세계관이야말로/하늘 아래 새것 아니고 무엇인가   상처 입고 허리 굽고 구멍 숭숭 뚫린/긴긴 세월/그 자리 그 땅 변함없이 잘 지켜온/몇 백 년 된 나무 아래 앉아/젊은 시인들의 시집을 읽는다   영원히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소년소녀들이/사람[…]

어항 속의 금붕어 外 1편
김상미 / 2010-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