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서정, 뼈의 기록 / 김영희

골목 서정, 뼈의 기록 – 윤석정, 『오페라 미용실』 (민음사, 2009)   김영희         19세기 파리의 거리에는 자본주의의 모나드로서의 ‘만보객’과 ‘창녀’가 있었다. 이를 윤석정 식으로 말해보면, 21세기 서울의 ‘골목에는’ 쪽방 두어 평에서 탈출해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사내(「골목들」)와 골목 벽에 기대어 헛웃음을 파는 여자(「파리」)가 있다. 골목 벽에 지린내를 흘리는 사내, “줄무늬 팬티를 즐겨 입는 여자”는 ‘골목의’ 만보객이고 창녀이다. 윤석정의 시에서 만보객과 창녀가 도시의 거리가 아닌 동네의 골목에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시인의 시선은 거대한 상품 전시장으로서의 도시와 인간관계가 상품관계로 치환되는 거리가 아닌, 저녁밥을 안친 엄마가 아이들을 부르고 일당과 맞바꾼 돼지고기로 삼겹살을[…]

골목 서정, 뼈의 기록
김영희 / 2010-02-26
열망에 관한 기록 / 윤석정

열망에 관한 기록   윤석정         드디어 시집이 나왔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첫 시집을 두 손으로 건네받고 가장 먼저 생각났던 습작시절은 등단하기 전 즈음이었다. 오페라 미용실 옆 반지하방에서 지내며 흑석동이라는 이름처럼 시커멓게 그을렸던 시절. 대체 시가 무엇인지, 어찌 써야하는지, 되물으며 잘 써지지 않는 시를 열렬히 썼다. 시는 내 마음을 매일 밤마다 태워버렸다. 나는 왜 시를 쓰지 않으면 불안해 못 배겼던 것일까.   일기장 나는 가끔 서랍 속에 감춰둔 옛날 일기장을 꺼내 읽었다. 그때마다 나는 일기장 속 시공간으로 빨려들어 갔다가 서둘러 나와야 했다. 내 마음으로 옮겨온 글자들이 눈을 따끔거리게[…]

열망에 관한 기록
윤석정 / 2010-02-26
달의 사전 外 1편 / 김제욱

달의 사전   김제욱         여행은 제목 없는 책들을 데리고 혼자 떠났다.   높다란 첨탑까지 책을 쌓으면 수평선 너머를 굽어볼 수 있을까. 궤도에서 이탈한 시간이 바람의 탯줄을 따라 증발하는 것을 보며 더듬더듬 중얼거린다. 너는 책 한 페이지보다 더 가벼워질 거야.   굽이치는 길에 쓰러진 책을 일으켜 세우면 사라진 문장 사이 평온한 모래가 아삭거리지. 쓴다는 것은 백지 위에 이빨자국 내는 것이라 생각해. 바람에 물린 살점이 아득하다.   상심한 별이 불안을 연주하는 시간, 책장을 덮고 잠이 들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려. 잠결 허리춤에서 자란 나무들이 초록 비명을 터트리지. 내[…]

달의 사전 外 1편
김제욱 / 2010-02-24
귀 外 1편 / 천양희

귀   천양희         바람 소리 물소리 들으니 오늘처럼 내 귀를 자연이 뚫은 적 없네   새소리 꽃소리 들으니 오늘처럼 내 귀가 자연의 약발 받은 적 없네   사람 소리 세상 소리 들으니 오늘처럼 귀울음 소리 크게 들린 적 없네   귀 기울이며 살아라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저 귀밖에 없다         숫자를 세다     숫자를 세는 것은 내 오래된 버릇 노선을 세고 계단을 세고 술잔을 센다 숫자를 세는 것은 숫자놀음이 아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면서 술잔을 내려놓듯 계단을 내려가듯 지독한[…]

귀 外 1편
천양희 / 2010-02-24
구성동 外 1편 / 이진명

구성동九城洞   이진명         구성동은 정지용 시인의 시이다 구성동 시를 좋아하여 책상 위에 수년 붙여 놓고 지낸 적 있다 골짝에는 유성이 묻히고 황혼에 누리가 소란히 싸이기고 하고 꽃도 귀양 살고 절터였더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는다는 구성동 산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는 구성동을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금강산 골짜기에 있는 동네라는 것   금강산 못 가보고, 가볼 수 없고 그래서 사슴이 일어나는 구성동 더욱 모르고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구성동이 폐허라는 것 길 끊어진 곳이라는 것 사람 그림자라곤 비치지 않는 유계 같은 곳이라는 것 그러니까 캄캄한 곳 절해고도[…]

구성동 外 1편
이진명 / 2010-02-24
산수유라는 책 外 1편 / 이기철

산수유라는 책   이기철         산수유에게도 말하고 싶은 입이 있는지 그 노란 언저리에 이야기가 두 권이다 읽어도 읽어도 끝나지 않는 봄나물 같은 이야기가 페이지마다 한 가득이다 햇살 올 때까지만 그늘을 빌려줘도 귓속에는 이야기가 한 밭뙈기다   저고리 고름 떨어질라 너무 당기지는 말아라 그 샛노란 저고리 반나절만 빌려 입었으면 닷새장에라도 남보란 듯 다녀오겠다 나보다 먼저 온 병아리도 제 먼저 빌려 입겠다고 종종이는 대낮 오늘은 작파하고 한 솥 가득 속이 노란   고구마나 삶고 싶은 봄날이다       식탁은 불후의 명작 한 편이다     식탁 가에는 숨소리[…]

산수유라는 책 外 1편
이기철 / 2010-02-24
안개 外 1편 / 안시아

안개        안시아         가시거리는 촉각을 세운다 길이 부정하는 사물들 사이 속도는 숨을 고른다 느릿느릿 급커브는 뒷모습을 들킨다   순식간에 환승구가 되어버린 이곳, 극단은 증발하기 좋은 무게로 도시를 지운다 웅성대는 그림자의 취향과는 관계없다   공간을 흐트러뜨리는 계단 긴 적막의 균열에서 시작되는 함정 구름의 유목은 포화상태에 이르고 저 묵음은, 포용의 방식으로 일순간을 와해시킨다   주어가 두 번 등장하는 문장처럼 누구나 공범으로 몰릴 수 있겠다는 생각 천천히 가속 페달을 밟는다 궁지에 몰린 헤드라이트의 경직은 앞차의 비상등만 쫓고 있다   목격은 왜곡을 제외한 모든 해석을 버리고 잠시 사라진 것처럼[…]

안개 外 1편
안시아 / 2010-02-24
극장 의자 外 1편 / 박서영

극장 의자   박서영       나는 순정한 눈빛을 가진 짐승을 만나러 간다 영화가 끝난 뒤 맨 뒷자리에 구겨져 앉아 있을 때   음악은 초조하게 스크린 밖으로 흘러나가고 불은 성급하게 켜졌고 청소부는 너무 빨리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의자가 짐승처럼 나를 안아 줄 때 외로움은 잔혹하구나, 연인들이 하나 둘 극장을 빠져나간 뒤 맨 뒷자리 누군가에게 손목 잡힌 채 문득 생각한다   외로움은 극장 의자에서 시작되어 극장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극장 의자를 떠나는 것이라고   텅 빈 극장 의자들은 맹수가 아니라 착한 짐승이구나 어두컴컴한 방에서 무리지어 참 착하게 순하게 살고[…]

극장 의자 外 1편
박서영 / 2010-02-24
대화 外 1편 / 남진우

대화   남진우       자정.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아버진 죽었는데 왜 아직도 살아서 바스락거리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아들아, 나는 죽어가고 있을 뿐 아직 죽은 것은 아니란다. 살아있는 한 나는 계속 바스락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구나. 아들이 다시 물었다. 아버지, 그렇게 바스락거리는 한 아버진 영원히 죽지 못할 거예요. 죽기 위해서라도 그 바스락거림을 그만두어야 해요. 아버지가 다시 대답했다. 이 바스락거림은 내가 죽어간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란다. 이렇게 바스락거리다 보면 언젠가 나는 완전히 죽게 될 거다. 아들이 항변했다. 아버진 이미 죽었다니까요. 그런데도 계속해서 바스락거리는 것은 죽은 자신에 대한 모독이에요. 아버지가 시무룩한[…]

대화 外 1편
남진우 / 2010-02-24
오송 / 서성란

오송 五松 서성란   1   나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만나러 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남자의 나이와 이름뿐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나이와 이름마저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 신문에서 나는 김순천 씨가 해직된 지 23년 만에 복직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명예회복이 된 지 3년 만에 이루어진 복직이었고 그의 나이가 고령이어서 재직 기간은 2년 동안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신문에 실린 김순천 씨 사진 위로 ‘벤치 맨’으로 불린다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취재수첩 한 귀퉁이에 김순천 씨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 인사를 하는 것을 미루고[…]

오송
서성란 / 2010-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