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윤회를 말하는 밤 外 1편 / 박현수

아내가 윤회를 말하는 밤  박현수    아내는 이 생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한다 생이 시시해진 사람처럼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다 우리가 다시 태어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윤회의 마지막 계단에 서있었으면 좋겠다 한다 윤회가 사다리타기처럼 지그재그로 이루어지는지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생기는지도 알 수 없지만 지금쯤 도미노의 마지막 조각이었음 좋겠다 한다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도미노 조각처럼 아내는 그렇게 앉아 사과를 깎았다  아내가 그렇게 아득해 보인 적은 없었다     흉기   내 마음아 넌 얼마나 자주 흉기를 휘둘렀더냐  종이불처럼 타오르던 분노도 사그러지니 한 줌 재도 아닌 걸  시퍼렇게 벼린 칼날을 몇 번이나[…]

아내가 윤회를 말하는 밤 外 1편
박현수 / 2009-11-27
밥상 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 外 1편 / 백상웅

밥상 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  백상웅   우리 가족의 밥상은 반찬이 적을 때도 첩첩산중. 낫을 휘두르고 괭이질을 해야 건널 수 있었지.  밥상의 가운데는 모닥불을 피워 냄비를 걸었던 흔적. 우리가 둘러앉아 가죽을 벗기고 뼈를 골라내던, 짐승 울음소리를 듣고 벌벌 떨며 오줌을 지리던 자리.  젓가락으로 바위를 골라내고. 산의 능선도 한 숟갈 퍼내고.  밥상이 가벼워진 것은 우리가 벌목을 했기 때문이야. 짐승의 다리를 베면 꽃잎은 폭발하고. 꽃이 한 날에 죽으면 뿌리는 밥상 모서리를 깎아내고. 우리가 노동을 하는 것은 밥상에서 겨울을 나기 위한 것이라서.  정강이뼈를 다듬어 수렵을 떠난 아빠. 직장에서 만난 동료와 눈이 맞은 동생. 아빠와 동생[…]

밥상 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 外 1편
백상웅 / 2009-11-27
님 계신 전선 外 1편 / 김진완

님 계신 전선 *  김진완   껌 하나를 훔쳤다고 초경 무렵 가시나 뺨을 모질게 후려친 구멍가게 털보 털보가 키워 팔던 콩나물시루 위에 덫에 치어 얼어 죽은 쥐를 올려놓았던 계집애 털보 마누라 춤선생 따라 밤 봇짐을 싸 털보 소주 먹고 쥐약 먹고 죽었는데 나 그거 다 봤는데  곁을 스치면 아찔한 과일껌 향기 그 아이 숨 담긴 풍선 훔쳐 아껴 마셨는데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달이 차면 붉은 뺨 어루만질지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모진 인연들과 싸우실지 생리통과 치욕통을 함께 앓으며 콩나물국 후후 불어 마실지 몰라 몰라도 나 따위야 안 궁금 터라도[…]

님 계신 전선 外 1편
김진완 / 2009-11-27
검은 나무들 外 3편 / 김두안

김두안 검은 나무들 그 집 마당에 핀 꽃 명함 달의 아가미       검은 나무들   달린다 검은 강둑 위, 검은 버드나무들  말이다 곰이다 낙타다 꿈틀거리는 거대한 애벌레다 휘어졌다 휘어 오른다  앞발을 들었다 온몸을 던진다  바람보다 빨리 달려가는 나무들 발목이 보인다 어둠이 뿌리째 뽑힌다  몸을 뿌리치고 미칠 듯 달려가는 나무들 나무속에 갇힌 짐승이다 (밤마다 나무들 뿌리박힌 동물로 변한다)  봄부터 봄까지 달려가 더 무성히 자라 있는 나무들 나 아닌 나로부터의 침입자다  무늬 옷을 입고 나무처럼 서서 강둑 철책 선 지키는 경계병들 눈빛 틈타 고요히 울부짖고 달려가는 나무들 나로부터 끝없이 도망치는 탈영자다 (자동차 불빛에 들켜,[…]

검은 나무들 外 3편
김두안 / 2009-11-27
01001한 로봇 친구들 / 김이환

  01001한 로봇 친구들                            "처음 로봇들은 인간을 위해서 일했지만 어느 날부터 로봇은 인간에게 흥미를 잃고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잖아요. 그래서 로봇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고 이 로보니아 행성에서 자치구를 만들어서 사는 거고요. 그것도 오래 전의 일이고 이제는 인간에게 흥미를 느끼는 로봇은 로보니아에 없어요. 로봇은 오직 로봇에게만 관심이 있고 그게 로봇이 존재하는 이유고요… …"     글/김이환  “칼럼 좀 재밌게 써보라니까.”  모니터 화면 속의 편집장은 말했다.  “첫 번째 칼럼은 정말 재밌었어. 로봇 가구시장에서 침대 구하느라 고생한 이야기 말이야. 그런데 갈수록 재미가 없어져. 이번의 로보니아 경찰서에서 범죄자 로봇을 취재한 칼럼도 그래,[…]

01001한 로봇 친구들
김이환 / 2009-11-26
두껍아, 두껍아 / 김지현

두껍아, 두껍아  김지현    어느 가을 녘 오후 4시경, 두꺼비 누나와 청년이 초록슈퍼 앞을 서성거리고 있을 때, 초록유치원 원장은 슈퍼 여자가 끓여준 라면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낡은 양은 냄비에 끓인 라면은 슈퍼 여자가 ‘별미’라며 들이댄 것으로, 설탕 반 스푼 탈지분유 한 스푼을 넣어 끓여서인지, 혓바닥에 착착 감기는 달콤함과 고소함이 새삼스러웠다. 원장은 라면 국물이 묻은 입술을 빨면서, 시종 생글거리며 김치까지 꺼내놓는 슈퍼 여자의 과도한 친절을 곁눈질로 관찰했다. ‘설탕과 탈지분유 넣기’는 슈퍼 여자만의 노하우였다.유치원 원장은 슈퍼 여자의 대출금을 갚아 준 적이 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땅 값이 치솟기 시작한 것은 주변에 전철역이 들어서고 대형 쇼핑몰이 세워진[…]

두껍아, 두껍아
김지현 / 2009-11-26
엄지손톱 위에 꽃길 / 문형렬

엄지손톱 위에 꽃길   문형렬    염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넘어져 오른 쪽 다리 고관절 뼈가 부러졌어요. 병원에서는 티타늄으로 만든 인공관절을 넣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담당 의사는 여든이 넘으면 뼈가 잘 붙지 않고, 부러진 고관절 뼈가 조각이 많이 나서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통증이 심해지고 다리가 썩어 들어갈 수 있다는 군요. 오른쪽 다리는 오래전에 중풍으로 마비되어 있어서 수술해도 이전보다 못할 수 있고 전신마취 후유증으로 일시적인 정신장애가 올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수술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의사는 수술을 하고 나서도 3개월 동안 재활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회복 정도에 따라서 입원 기간이 더[…]

엄지손톱 위에 꽃길
문형렬 / 2009-11-26
보랏빛 소묘 / 윤후명

보랏빛 소묘(素描)   윤후명    그녀로부터 우리 땅의 꽃에 대해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뜻밖에 담배를 선물로 받았다. 언젠가 그녀와 함께 얼결에 샹그리라 운운하며 짧은 여행을 떠났던 기억이 새로웠다. 아직도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아가는 신세라 반갑지만, 한편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뒤에 남는 것을 어쩌는 수 없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긴 했다. 더욱이 담배 문화가 눈총을 받게 된 요즘에 그걸 받으며 옛일을 되새긴다는 사실도 여간 껄끄럽지 않았다. 한때 창궐했던 담배는 ‘흡연은 건강의 적’이라고 몰려 올 데 갈 데 없이 두들겨 맞고 있었다. ‘아직도 담배를 피우느냐’고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도 은근함에[…]

보랏빛 소묘
윤후명 / 2009-11-26
(12)타자와 언어: 언어는 번역될 수 있는가? / 고봉준

타자와 언어: 언어는 번역될 수 있는가?    –김연수의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고종석의 「이모」   –허혜란의 「아냐」   –김애란의 「그곳에 밤 여기의 노래」    "가령 love라는 영어 단어를 사랑이라는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영어권에서 love라는 단어가 지닌 내밀한 의미들은 사실 사랑이라는 한국어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 게임이 다르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들을 마치 동일한 것처럼 … …"   언어법칙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가능한 언어의 번역    가라타니 고진이 ‘타자(他者)’를 외국인과 아이에 비유한 걸 기억하시는지요? 그는 ‘대화’가 동일한 규칙(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타당한 규칙을 타자에까지[…]

(12)타자와 언어: 언어는 번역될 수 있는가?
고봉준 / 2009-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