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의 생애 外 1편 / 신영배

늪의 생애  신영배     줄 위에서 나는 몸을 웅크린다 물방울의 잠 아래로 흘린 적 그녀를 줄 위에 눕혀 본다 말리지 않는 혀를 계속 말아 본다 무덤 속에서 꺼냈던 손을 다시 무덤 속에 집어넣는다 그대로 쓴다 직선은 무거워진다 줄은 언젠가 곳에 닿아 있다 시간을 긋다 어딘가 줄은 곳에 닿아 있다 공을 쥐고 직선을 긋다 끝없이  나는 직선으로 원을 그린다  하나의 점에서 무수한 점을 말하기 위해  발화를 위해 뼈를 만지는 종족이 되다 닿는 순간 흰 가루로 날리는 말의 생애  나는 직선으로 원을 그린다 시간이 휘어지게 빛의 고리를 손가락에 걸고 눈물방울을 눈꺼풀 위에 얹고[…]

늪의 생애 外 1편
신영배 / 2009-12-29
피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外 1편 / 고현정

피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고현정    지하철 스크린 도어 이름 지하철 역 이름은 No Love Lost  365일 성실한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모두 나쁜 평을 받고 있다 스크린 도어의 무늬는 시리즈로 제작해 왔던 점 페인팅과 스핀 페인팅 나비 페인팅을 모두 멈추었고 다른 방식을 구상 중이다  로그인을 한다 로그는 통나무를 말한다 스크린 도어가 열리면 사람들은 통나무가 되고 싶어진다  도어의 무늬에 고야의 블랙 페인팅. 수틴의 그림들. 존 커린의 그림을 넣을 계획이다 피할 수 없는 진실이 그림들을 찢으며 열리고 닫힌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를 반복하던 사람들도 No Love Lost 역에서 도어에 부딪치면 무디고 짧은 통나무의 신음을 내뱉는다[…]

피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外 1편
고현정 / 2009-12-29
1659년, 고라니와 사슴 外 1편 / 천서봉

1659년, 고라니와 사슴  천서봉    상평통보 무배자전을 위조한 기억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나는 시인이었는데, 시인이래봐야 장에 들러 선인의 시나 읊고 가사나 불러 소인묵객의 흉내나 내는 일이었다 떠돌이가 어찌 엽전을 위조하였는가 하면 삭방도, 그러니까 지금의 함경도에 살던 먼 친척, 야장이었던 그의 대장간을 쉬 빌려 쓸 수 있던 까닭이다  조립과 제작을 즐기는 것이 천성이어서 현생 역시 그런 천한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데 한 가지 아무리 추억하려해도 떠오르지 않는 것은 참형을 당한 기억이다 참형을 당한 기억이 없으니 나는 죽는 날까지 이곳저곳을 들짐승처럼 떠돌다 낙막하고도 다복한 삶을 마쳤는지 모른다  대신 탁주를 품에 안고 꺽꺽 울던 기억이 있다[…]

1659년, 고라니와 사슴 外 1편
천서봉 / 2009-12-29
만화가 최규석님과의 만남 / 이기인

  100℃ 열정의 아웃사이더                                                                                   – 만화가 최규석님과의 만남 –     "어린 시절 만화책에서 본 지식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요. 이것은 만화 자체가 재밌어서라기보다는 그림과 글이 같이 있을 때, 그림이 앞서 직관적으로 빨리빨리 흡수돼서 그런 것 같아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면서요. 만화라는 형식은 다른 매체들의 장점을 융합해 놓은 부분이 크다고 봐요. 글이 갖고 있는 장점과 영상 매체가 갖고 있는 장점이 잘 어우러져 있어요… …"     "시집과 시집 사이에 만화책을 넣어서 다닌 적이 있다. 그때는 만화의 세계로 빠져들고 싶어서 서슴지 않고 샀던 만화책이다.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중 그 첫[…]

만화가 최규석님과의 만남
이기인 / 2009-12-18
대입 검정고시 홀로서기 총정리 / 남상순

글/남상순      1  큰 사거리 세 개를 지나 통일 주유소에서 좌회전하자 과연 여수장어샤브샤브라는 팻말이 나타났다. 딸의 설명과 맞아떨어지기는 했으나 이전에 와본 기억은 까마득했다. 오륙 년 전쯤이라니 그럴 만하다. 딸애가 이곳에서 뭔가를 환기시키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생뚱맞은 일인 것이다.     좌회전 길은 도로가 아니라 논둑 같았다. 저만치 서성거리던 딸애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길이라 생각지 않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이삭이 패기 시작한 벼논 위를 두루미 한 마리가 느리게 날아갔다. 주차를 끝내기도 전에 딸애가 다가왔다.   “잘 찾았어?”   “그러니까 왔지.”   퉁명스러움이야말로 아비에 대한 익숙한 모습이라도 되는 듯 딸애의 표정이 싱글벙글 피어났다. 오른쪽[…]

대입 검정고시 홀로서기 총정리
남상순 / 2009-12-18
빛의 무덤 外 1편 / 서동욱

빛의 무덤  서동욱   청평호로 거대한 빛기둥들이 떨어진다 그 많던 핸드폰과 재난의 날들은 어디 갔을까 하늘의 신전은 다 무너지고  (네가 없어지면 수분 없는 실내에서 남은 과자가 크게 울리며 바스락)  바람은 치마를 짓는 이처럼 물을 한번 구겼다 쫙 당기고 (크게 울리며 바스락) 호수의 동공은 캄캄해진 핸드폰처럼 내내 비어있다  (네가 없어지면 시력 잃은 저 호수도 저 호수도 시선의 수분도)  조용조용 과자처럼 굳어지는 하얀 물 동공은 차곡차곡 못쓰게 된 기둥들로 가득 차 무덤처럼 꾸민 재떨이 같고 빛도 다 부스러져 바스락 네가 없이 오후는    신호등의 운율   당신은 떠나고 날은 신경 쓰는 적 없이 저문다 그럴 수는[…]

빛의 무덤 外 1편
서동욱 / 2009-11-30
최용혁 매란기 外 1편 / 고찬규

최용혁 매란기  고찬규   『허삼관 매혈기』는 평등에 관한 이야기기라고 저자 위화는 말한다 평등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허삼관은 말 그대로 피를 팔아 장가도 가고 자식 새끼들도 키운다 피 한두 대접이면 몇 달을 쉬지 않고 땅을 파도 모으지 못할 돈을 쓸어 담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피가 어디 샘솟듯 마구마구 넘쳐날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피를 살 것인가 한 번 팔면 석달은 쉬어야 함에도 그 기구한 삶이란 당신이나 나를 닮아 사나흘 만에 또 피를 팔아야 할 경우도 있다 대륙의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는 위화의 말마따나 평등을 추구하는 이 이야기에서[…]

최용혁 매란기 外 1편
고찬규 / 2009-11-30
나의 하루는 外 1편 / 이근화

나의 하루는  이근화   나의 하루는 혼자가 아니고 나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고 나의 하루는 기억되지 않는다  물고기에게 물은 어떤 맛일까 사랑과 죽음이 겹쳐서 꿈만 같은 일이 된다면 물고기의 물 없는 자유는 어디로 흘러갈까  기분이 상했지만 상한 것들은 금세 버려진다 삼십삼 년째 나의 하루는 버려졌다 새로운 것 읽을 것 정치적인 것 없이 나의 하루는  고등학생들이 계단에 걸터앉아 어둠에 부딪힌 얼굴로 껌을 씹는다 오늘의 꿈과 내일의 꿈이 달콤하게 흐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고양이들은 집으로 가지 않는다 내가 건네 준 치킨은 어제의 것이었는데 오늘은 굶어 죽는가 그렇지 않다 고양이에게는 하루가 없다  담장의 하루는 골목길의[…]

나의 하루는 外 1편
이근화 / 2009-11-30
어떤 귀소 外 1편 / 장이지

어떤 귀소(歸巢)  장이지    해삼위(海蔘威) 부근 상설시장 누비 구름 누덕누덕 걸린 하늘, 두만강 가는 길 묻고 다니던 꽃제비 한 아이 이국의 장날을 썩은 감자껍질 같은 것이나 줍느라 진종일 바장대다 길 위에 눕고 고려인 장사치가 호떡을 가져왔다 잠시 집으로 가는 후줄근한 꿈 여행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었다.  ★  밤물결 소리도 귀에 먼 해삼위 부둣가 낡은 집 전쟁 통에 가족들 뿔뿔이 흩어져 중원의 모래바람으로 아무렇게나 살다가 이제는 까라져 가죽만 남은 노인이 코리아의 호드기 소리를 난청으로나 듣는 밤, 민족이란 말도 요새는 없다는데 고국산천에 쓴 무덤의 냄새는 꿈에서 더 간절하기만……. 돌아가기는 갈 것이다. 그러나 이 몸을[…]

어떤 귀소 外 1편
장이지 / 2009-11-27
포옹 外 1편 / 김륭

포옹  김륭   돼지는 문밖에 나와 있었다. 삼겹살집을 나서는 그녀가 아휴, 냄새 잔뜩 인상을 찌푸리기 전부터 돼지는 킬킬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던 입술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기 전부터 변기 위에 앉아 서둘러 넥타이를 풀고 몸밖에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돼지는 몸을 식탁이 아니라 침대에 바쳤다. 갈고리 맞은 잠과 잠에서 발라낼 수 없는 꿈의 간곡한 체위를 위해 혈맹을 다짐하는 돼지, 몸을 연애에 바친 눈빛은 길 건너 은행나무 밑동을 흔들어놓을 만큼 집요하고 꿉꿉하다. 킁킁 코를 지우는 그녀가 마침내 살을 버리고 꽃이 될 때까지  이쑤시개 하나로 달을 피워 문다. 길가에 버려진 베고니아화분처럼 붉게 타오르지 않는 그림자가 마른 구덩이 하나로[…]

포옹 外 1편
김륭 / 2009-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