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무덤 外 1편 / 서동욱

빛의 무덤  서동욱   청평호로 거대한 빛기둥들이 떨어진다 그 많던 핸드폰과 재난의 날들은 어디 갔을까 하늘의 신전은 다 무너지고  (네가 없어지면 수분 없는 실내에서 남은 과자가 크게 울리며 바스락)  바람은 치마를 짓는 이처럼 물을 한번 구겼다 쫙 당기고 (크게 울리며 바스락) 호수의 동공은 캄캄해진 핸드폰처럼 내내 비어있다  (네가 없어지면 시력 잃은 저 호수도 저 호수도 시선의 수분도)  조용조용 과자처럼 굳어지는 하얀 물 동공은 차곡차곡 못쓰게 된 기둥들로 가득 차 무덤처럼 꾸민 재떨이 같고 빛도 다 부스러져 바스락 네가 없이 오후는    신호등의 운율   당신은 떠나고 날은 신경 쓰는 적 없이 저문다 그럴 수는[…]

빛의 무덤 外 1편
서동욱 / 2009-11-30
최용혁 매란기 外 1편 / 고찬규

최용혁 매란기  고찬규   『허삼관 매혈기』는 평등에 관한 이야기기라고 저자 위화는 말한다 평등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허삼관은 말 그대로 피를 팔아 장가도 가고 자식 새끼들도 키운다 피 한두 대접이면 몇 달을 쉬지 않고 땅을 파도 모으지 못할 돈을 쓸어 담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피가 어디 샘솟듯 마구마구 넘쳐날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피를 살 것인가 한 번 팔면 석달은 쉬어야 함에도 그 기구한 삶이란 당신이나 나를 닮아 사나흘 만에 또 피를 팔아야 할 경우도 있다 대륙의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는 위화의 말마따나 평등을 추구하는 이 이야기에서[…]

최용혁 매란기 外 1편
고찬규 / 2009-11-30
나의 하루는 外 1편 / 이근화

나의 하루는  이근화   나의 하루는 혼자가 아니고 나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고 나의 하루는 기억되지 않는다  물고기에게 물은 어떤 맛일까 사랑과 죽음이 겹쳐서 꿈만 같은 일이 된다면 물고기의 물 없는 자유는 어디로 흘러갈까  기분이 상했지만 상한 것들은 금세 버려진다 삼십삼 년째 나의 하루는 버려졌다 새로운 것 읽을 것 정치적인 것 없이 나의 하루는  고등학생들이 계단에 걸터앉아 어둠에 부딪힌 얼굴로 껌을 씹는다 오늘의 꿈과 내일의 꿈이 달콤하게 흐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고양이들은 집으로 가지 않는다 내가 건네 준 치킨은 어제의 것이었는데 오늘은 굶어 죽는가 그렇지 않다 고양이에게는 하루가 없다  담장의 하루는 골목길의[…]

나의 하루는 外 1편
이근화 / 2009-11-30
어떤 귀소 外 1편 / 장이지

어떤 귀소(歸巢)  장이지    해삼위(海蔘威) 부근 상설시장 누비 구름 누덕누덕 걸린 하늘, 두만강 가는 길 묻고 다니던 꽃제비 한 아이 이국의 장날을 썩은 감자껍질 같은 것이나 줍느라 진종일 바장대다 길 위에 눕고 고려인 장사치가 호떡을 가져왔다 잠시 집으로 가는 후줄근한 꿈 여행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었다.  ★  밤물결 소리도 귀에 먼 해삼위 부둣가 낡은 집 전쟁 통에 가족들 뿔뿔이 흩어져 중원의 모래바람으로 아무렇게나 살다가 이제는 까라져 가죽만 남은 노인이 코리아의 호드기 소리를 난청으로나 듣는 밤, 민족이란 말도 요새는 없다는데 고국산천에 쓴 무덤의 냄새는 꿈에서 더 간절하기만……. 돌아가기는 갈 것이다. 그러나 이 몸을[…]

어떤 귀소 外 1편
장이지 / 2009-11-27
포옹 外 1편 / 김륭

포옹  김륭   돼지는 문밖에 나와 있었다. 삼겹살집을 나서는 그녀가 아휴, 냄새 잔뜩 인상을 찌푸리기 전부터 돼지는 킬킬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던 입술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기 전부터 변기 위에 앉아 서둘러 넥타이를 풀고 몸밖에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돼지는 몸을 식탁이 아니라 침대에 바쳤다. 갈고리 맞은 잠과 잠에서 발라낼 수 없는 꿈의 간곡한 체위를 위해 혈맹을 다짐하는 돼지, 몸을 연애에 바친 눈빛은 길 건너 은행나무 밑동을 흔들어놓을 만큼 집요하고 꿉꿉하다. 킁킁 코를 지우는 그녀가 마침내 살을 버리고 꽃이 될 때까지  이쑤시개 하나로 달을 피워 문다. 길가에 버려진 베고니아화분처럼 붉게 타오르지 않는 그림자가 마른 구덩이 하나로[…]

포옹 外 1편
김륭 / 2009-11-27
아내가 윤회를 말하는 밤 外 1편 / 박현수

아내가 윤회를 말하는 밤  박현수    아내는 이 생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한다 생이 시시해진 사람처럼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다 우리가 다시 태어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윤회의 마지막 계단에 서있었으면 좋겠다 한다 윤회가 사다리타기처럼 지그재그로 이루어지는지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생기는지도 알 수 없지만 지금쯤 도미노의 마지막 조각이었음 좋겠다 한다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도미노 조각처럼 아내는 그렇게 앉아 사과를 깎았다  아내가 그렇게 아득해 보인 적은 없었다     흉기   내 마음아 넌 얼마나 자주 흉기를 휘둘렀더냐  종이불처럼 타오르던 분노도 사그러지니 한 줌 재도 아닌 걸  시퍼렇게 벼린 칼날을 몇 번이나[…]

아내가 윤회를 말하는 밤 外 1편
박현수 / 2009-11-27
밥상 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 外 1편 / 백상웅

밥상 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  백상웅   우리 가족의 밥상은 반찬이 적을 때도 첩첩산중. 낫을 휘두르고 괭이질을 해야 건널 수 있었지.  밥상의 가운데는 모닥불을 피워 냄비를 걸었던 흔적. 우리가 둘러앉아 가죽을 벗기고 뼈를 골라내던, 짐승 울음소리를 듣고 벌벌 떨며 오줌을 지리던 자리.  젓가락으로 바위를 골라내고. 산의 능선도 한 숟갈 퍼내고.  밥상이 가벼워진 것은 우리가 벌목을 했기 때문이야. 짐승의 다리를 베면 꽃잎은 폭발하고. 꽃이 한 날에 죽으면 뿌리는 밥상 모서리를 깎아내고. 우리가 노동을 하는 것은 밥상에서 겨울을 나기 위한 것이라서.  정강이뼈를 다듬어 수렵을 떠난 아빠. 직장에서 만난 동료와 눈이 맞은 동생. 아빠와 동생[…]

밥상 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 外 1편
백상웅 / 2009-11-27
님 계신 전선 外 1편 / 김진완

님 계신 전선 *  김진완   껌 하나를 훔쳤다고 초경 무렵 가시나 뺨을 모질게 후려친 구멍가게 털보 털보가 키워 팔던 콩나물시루 위에 덫에 치어 얼어 죽은 쥐를 올려놓았던 계집애 털보 마누라 춤선생 따라 밤 봇짐을 싸 털보 소주 먹고 쥐약 먹고 죽었는데 나 그거 다 봤는데  곁을 스치면 아찔한 과일껌 향기 그 아이 숨 담긴 풍선 훔쳐 아껴 마셨는데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달이 차면 붉은 뺨 어루만질지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모진 인연들과 싸우실지 생리통과 치욕통을 함께 앓으며 콩나물국 후후 불어 마실지 몰라 몰라도 나 따위야 안 궁금 터라도[…]

님 계신 전선 外 1편
김진완 / 2009-11-27
검은 나무들 外 3편 / 김두안

김두안 검은 나무들 그 집 마당에 핀 꽃 명함 달의 아가미       검은 나무들   달린다 검은 강둑 위, 검은 버드나무들  말이다 곰이다 낙타다 꿈틀거리는 거대한 애벌레다 휘어졌다 휘어 오른다  앞발을 들었다 온몸을 던진다  바람보다 빨리 달려가는 나무들 발목이 보인다 어둠이 뿌리째 뽑힌다  몸을 뿌리치고 미칠 듯 달려가는 나무들 나무속에 갇힌 짐승이다 (밤마다 나무들 뿌리박힌 동물로 변한다)  봄부터 봄까지 달려가 더 무성히 자라 있는 나무들 나 아닌 나로부터의 침입자다  무늬 옷을 입고 나무처럼 서서 강둑 철책 선 지키는 경계병들 눈빛 틈타 고요히 울부짖고 달려가는 나무들 나로부터 끝없이 도망치는 탈영자다 (자동차 불빛에 들켜,[…]

검은 나무들 外 3편
김두안 / 2009-11-27
01001한 로봇 친구들 / 김이환

  01001한 로봇 친구들                            "처음 로봇들은 인간을 위해서 일했지만 어느 날부터 로봇은 인간에게 흥미를 잃고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잖아요. 그래서 로봇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고 이 로보니아 행성에서 자치구를 만들어서 사는 거고요. 그것도 오래 전의 일이고 이제는 인간에게 흥미를 느끼는 로봇은 로보니아에 없어요. 로봇은 오직 로봇에게만 관심이 있고 그게 로봇이 존재하는 이유고요… …"     글/김이환  “칼럼 좀 재밌게 써보라니까.”  모니터 화면 속의 편집장은 말했다.  “첫 번째 칼럼은 정말 재밌었어. 로봇 가구시장에서 침대 구하느라 고생한 이야기 말이야. 그런데 갈수록 재미가 없어져. 이번의 로보니아 경찰서에서 범죄자 로봇을 취재한 칼럼도 그래,[…]

01001한 로봇 친구들
김이환 / 2009-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