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광 한 알 외 1편 / 고인숙

  고인숙     국광 한 알       내가 깨무는 너의 볼 어릴 적 내 새끼들 볼 오지게 영근 국광 한 알 손 타지 않은 그 자주색 탱글한 볼을 후회 없이 와삭 깨물어 보네   싱그럽고 새틋하고 달콤하고 그리웁고   볼이 사과 닮은 과수원집 할매 꿀이 들었다며 못난이 마구 섞어 덤까지 주었다네   육즙이 그대 주름진 옆얼굴에 튀어 핀잔 들으면서도 나는 와락와락 깨물며 옛날로 돌아가네   늘 할 말 조금은 남겨 두는 나 그러나 씹을 때는 힘주어 씹지   잠에서 막 깬 아가 볼 같은 사과 문질러 씻기며[…]

국광 한 알 외 1편
고인숙 / 2009-05-26
나비와 바위 외 1편 / 최동호

  최동호     나비와 바위       바위와 입을 맞춘다. 송곳처럼 쩌릿한 물이 등판을 친다.   놀란 나비가 날아오른다. 등 꺼풀 벗겨진 바위는 가볍다.   훅 하는 입김에 붉은 나뭇잎이 떨어진다. 산이 옷 벗는 가을   바위도 사람이 그립다.       아름다운 미소       히말라야에 가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보았다   나마스테라고 원주민과 인사말을 나누고   잠시 마당에서 바람이 머물다 가는 곳에서   먼 산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을 때   아름다운 미소가 내 옆에서 스쳐 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때 아름다운 미소를[…]

나비와 바위 외 1편
최동호 / 2009-05-26
빙하기 외 1편 / 도종환

  도종환     빙하기       벌목을 하다 잠시 쉴 때면 자작나무에 등을 기댄 채 떨어진 자작나무 껍질 주워 편지를 쓰곤 했다 자작나무 껍질은 희고 얇아서 마음의 몇 조각을 옮겨 적기에 알맞았다 백 년에 이 백여 리씩 녹으며 후진하는 빙하가 남긴 영토를 따라 우리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야크와 순록과 여우가 먼저 올라갔고 늑대의 발자국을 따라 우리가 그 뒤를 따랐다   빙하기로부터 시작한 내 어린 날의 결빙이 언제 풀어질지 그때는 짐작할 수 없었다 월세 이천 원짜리 쪽방에 기거하는 동안 연탄불이 자주 꺼졌다 손도끼로 침엽수 도막을 잘게 부수어 십구공탄에 불을 붙이는[…]

빙하기 외 1편
도종환 / 2009-05-26
모텔 제인 오스틴 / 김선재

 모텔 제인 오스틴  김선재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이 내가 잠든 사이에 일어난 일이 분명하다는 사실뿐이다. 막 잠에서 깨어난 나는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유치를 들여다보던 옛날의 그날처럼 어리둥절해진다. 누군가 우편함에 고지서를 꽂아 놓듯 내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 놓았다. 분명히 느슨하게 말아 쥔 내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것은 흰 바탕에 검은 줄이 쳐진 메모지다. 곰곰이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지만 떠올릴 만한 것이 있을 리 없다. 나는 단지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일을 끝낸 다음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첫차 시간을 기다렸고,[…]

모텔 제인 오스틴
김선재 / 2009-05-26
/ 김신우

 밤  김신우   밤이 되었군요. 밖에서 돌아온 남편은 버릇처럼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자기 방으로 들어가요. 아침이면 빈 깡통들은 재활용 상자에 분류되어 버려져 있고 책상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어요. 남편의 깔끔한 성격을 잘 알기에 밤늦게 방에서 술을 마신다고 잔소리를 할 필요는 없죠. 남편이 왔다 간 건지 종종 착각이 들 정도로 남편은 자기 주변에 존재감을 표시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조용히 들어와 자기만의 공간 속에 머물다 다시 일하러 나가죠. 안주라도 챙겨 줄까 싶어 안방 문을 열고 나가려다 나는 이내 그만두어요. 간신히 잠든 아기가 깨서 울 것만 같아 불안하거든요. 아기는 아주 조그만 기척에도 예민하게 굴어요. 낯가림이 심해 엄마 품으로만[…]

김신우 / 2009-05-26
사람 뜯어보는 재미로 사는 작가 / 강기희

  사람 뜯어보는 재미로 사는 작가       강기희       소설가를 직업으로 살아가는 나. 본업과 부업이 따로 없는 전업 작가로 살아간다. 문학이 위기라는 말이 벌써 몇 해 전부터 전설처럼 떠돌고 있지만 아직 문학은 죽지 않았고, 나 또한 굶어 죽지 않고 소설 쓰는 일에 매달려 있다. 역시 전업으로 살아가는 어느 시인이나 소설가도 쌀이 없어 굶어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없다. 지금도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강의실로 향하고 작가와 시인이 1년에도 몇 백 명씩 탄생하고 있는 상황을 본다면 문학은 위기가 아니라 여전히 청춘인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작가로 살아간다는 일은 여간[…]

사람 뜯어보는 재미로 사는 작가
강기희 / 2009-05-26
<중편 분재> 문지기 / 이재일

글/ 이재일  1.내 아버지는 문지기였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문지기가 된 것으로 아는데, 그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딱히 들은 적이 없어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평범한 문지기였고, 세상의 모든 평범한 문지기들이 그렇듯 살다 보니 어쩌다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리라 추측할 따름이다.나도 얼마 전 문지기가 되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일하던 시절도 그랬지만 지금도 문지기는 그리 좋은 직업이 아니다.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날 세가의 총관인 유 노대(劉老大)는 숙소에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나를 불러다 놓고 말했다.“네 아비는 좋은 문지기였지. 그렇다고 네게 그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원한다면 다른[…]

<중편 분재> 문지기
이재일 / 2009-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