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배웠다 / 조경란

[조경란이 만난 사람⑬]- ‘유진 목공소’, 윤대오 목수      많이 배웠다      손  얼굴보다 손에 더 신경을  쓰는 편이다. 밤새 원고를 쓰고 난 후에는 내 손으로 내 손을 쓰다듬으며 수고했다, 말하기도 하고 핸드로션 같은 것도 자주 바르고 손톱 소제도 열심히 한다. 이런 말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내 육체 중에서 눈과 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읽을 수 없게 되거나 쓸 수 없게 된다는 상상은, 그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하고 가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면 맨 먼저 보게 되는 것도 눈,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손이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 턱을 괸 손, 술잔을 잡는[…]

많이 배웠다
조경란 / 2009-04-29
꽃과 잎의 연대 / 이선우

 꽃과 잎의 연대      이선우      각종 기념일이 유독 많이 몰려 있는 5월입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5일과 8일에 떡 하니 버티고 있어 흔히들 ‘가정의 달’이라고 부르지만, 5월에는 노동절도 있고 석가탄신일도 있고 성년의 날과 스승의 날도 있습니다. 찾아보니 부부의 날, 바다의 날, 발명의 날도 5월에 다 있군요. 우리나라 4대 명절의 하나인 단오도 5월 28일이랍니다. 창포물에 머리를 감아본 적도, 수리취떡을 먹어본 적도 없지만 단오라니 괜히 마음이 들뜨는군요.국가나 민족, 종교나 각종 단체의 기념일이 아니라도 저마다의 잊을 수 없는 어느 하루가 이 싱그러운 5월에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계신 분들도 있을[…]

꽃과 잎의 연대
이선우 / 2009-04-28
을지로 순환선을 타고 / 김해원

    뚜라 눈에 그것은 마치 거대한 생물체처럼 보인다. 그것은 철로를 따라 머리를 깊숙이 들이밀며 소리 없이 미끄러져 온다. 요란한 것은 사람들이다. 그것의 이마에 불뚝 튀어나온 눈알에서 뿜는 빛이 발아래 미치기도 전에 사람들은 호들갑을 떤다.“지금 신도림, 신도림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한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긴 시간 쉬지 않고 반복한 여자 목소리에는 감정이 배어 있지 않다. 때가 되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 열차를 피해 물러나든, 누구 하나 뛰어들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투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춤 뒤로 한 걸음 물러서거나 둘레거리며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안전한지 확인한다. 뚜라는 신도림행 열차가[…]

을지로 순환선을 타고
김해원 / 2009-04-28
말머리 성운 / 허만하

  허만하 말머리 성운 1 말은 가슴 안에서 다져진 뜨거운 언어가 폭발적으로 뛰쳐나온 순결한 질주다. 어둠의 극한에서 세계의 기원을 생각해 내려 수직으로 목을 치켜들고 멀리를 살피고 있는 한 마리 말. 목덜미 이하는 처음으로 별빛을 만들어 낸 캄캄한 어둠이다. 2 허무와 허무가 서로를 비추는 1억 광년 하늘을 말굽 소리도 없이 달리는 말. 영하의 온도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말. 시여, 교만하지 마라! 중심도 없이 터지는 자욱한 불의 물보라 사이를 달리는 말의 영원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태어나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별빛이다. 바늘의 예감 찔린다는 공포가 첨단에 몰려 바늘 끝 반짝임이 되는 것처럼, 죽는다는[…]

말머리 성운
허만하 / 2009-04-27
할미꽃 / 김영남

  김영남 할미꽃   봄 잔디가 생각났으리라, 고양이 한 마리 할머니도 그리워하다가  고운 입술 내려놓고 저렇게 졸고 있으리라 미워하면 안 되느니라 해코지 하느니라, 하는 말씀 흰 수염들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으리라    깰까, 놀랄까, 야옹하며 발톱 치켜들까 살금살금 다가가 입술 살며시 포개 보는데 좋은 듯 싫은 듯 움찔움찔하여라 세끼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마을에 분양하고 또 한 마리는 산 너머에 분양했는데, 마을 고양이 어미 몰라보고 앙칼지게 대들어 집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그 어미 고양이 아닌가 싶어라 바람 부니 고개 떨구고 흐느끼는 듯싶어라 노루귀도 분홍 눈으로 바라보고 있고, 어머니 어머니[…]

할미꽃
김영남 / 2009-04-27
방귀를 읽다 / 강희안

  강희안 방귀를 읽다 사우나탕에다 방귀 뀌고 그 거품 깨무는 자가 마조히스트라면 소심한 성직자는 제 방귀 소리에 놀라 펄쩍 뛰다가 말씀의 뚜껑 열어젖히리라 방귀 뀌려다가 지린 자가 비평가라면 불행한 혁명가는 몇 시간이나 참다 새 버린 자신의 방귀가 남의 방귀와 섞이는 미궁에 봉착하리라 여자가 방귀 뀐다고 투덜대는 자가 시대 파악을 못한 사회부 기자라면 실망스러운 정치가는 무색의 방귀를 뀌다가 남의 방귀 냄새로는 점심 메뉴까지 알아맞히리라 요란한 방귀를 뀌고도 자지러지게 웃는 자가 독재자라면 정직한 학자는 방귀의 의학적 소신을 운운하다가 마침내는 타인에게서 냄새의 출처를 구하리라 남의 허락을 얻고 은밀한 장소에서 방귀 뀌는 자가 신학도라면[…]

방귀를 읽다
강희안 / 2009-04-27
용동 큰 우물 / 박미산

  박미산 용동 큰 우물                  아이들이 물에 잠겨 있다 두레박을 내린다 손수건을 가슴에 단 애자, 동순이가 올라온다 또 한 두레박을 퍼 올린다 광일이, 성우, 재섭이가 두레박에서 쏟아진다 술 한 잔 마실 때마다 물안개 같은 아이들이 큰 우물을 돌아 배다리로 어릿하게 간다 헌책방을 지나 창영국민학교 운동장햇살이 머물던 자리에 우르르 몰려드는 아이들 좌충우돌 파문을 일으키며 쾅쾅쾅 심장을 두드린다 조개탄이 이글이글 타고 산더미 같은 도시락이 쓰러지며 사십삼 년이 왁자하게 부서진다 빛보다 빠르게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던 희섭달리기 잘하던 종재는 저세상을 급하게 달려갔다 하는데우물 한 귀퉁이에서낯을 가리던 물결과 물결이돌고 돌아 뒤섞인다 우리는 두레박줄을 밤새 당겼다 해맞이 횟집[…]

용동 큰 우물
박미산 / 2009-04-27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 유형진

  유형진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어지러운 몇 개의 안부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당신의 안부를 묻기 전에 나의 안부를 전합니다. 나는 안녕하지 않습니다. 달력은 4월이고 여기는 겨울입니다. 만개한 벚꽃들은 사력을 다해 죽어 가고 있고 지쳐 있는 사람들의 뻣뻣한 어깨, 생각 없이 열어 놓은 아홉 개의 지붕, 무책임한 눈이 흩날리고 있습니다. 떨어진 눈이 녹는 지붕 아래 쥐새끼들이 달아나는 모양이 보입니다. 자로 잰 듯, 다니는 길만 다니는 저 쥐새끼들, 꼭 벚꽃이 지듯 우수수수. 고뇌는 사라지고 고통만이 남았습니다. 거리거리에 치즈 덩이는 넘쳐나고 그와 함께 고린내도 넘쳐납니다. 그래도 쥐새끼들은 살길이 막막해서 점점 지하로 숨어들죠.[…]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유형진 / 2009-04-27
버려진 말의 입 / 김안

  김안 버려진 말의 입 할 말은 많지만, 나는 입이 없습니다. 잠이 들 때마다 나는 내 입속으로 들어가 고인 말을 지우고 재갈을 물립니다. 내가 입을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아침마다 머리맡에 쌓여 있는 활자들은 모조리 당신을 향한 위장일 따름입니다. 출퇴근 버스처럼 터질 것 같은 옷을 입고 당신은 거울 앞에 앉아 점점 하얘져 갑니다. 나는 벌거벗고 붉어서 밥 한 술 뜰 수 없는데, 나날이 건강해져 갑니다. 아버지가 덜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눈코입이 없어지고 나서야 만족한 듯 당신은 뒤돌아봅니다. 민둥민둥하여 입 맞출 입 찾을 수 없는데도 나는 당신과 용케도 입 맞출 수 있습니다. 웃기는, 유일한,[…]

버려진 말의 입
김안 / 2009-04-27
죽는다 적는다 짖는다 / 주원익

  주원익 죽는다 적는다 짖는다 나는 적는다 너는 떠나가고 나는 죽는다 너는 나를 적어 내려가고 나는 젖는다 눈물이 나를 떠나가고 너는 나를 찢는다 너는 달아나고 나는 짖는다 나는 너를 떠나가고 떠나가지 못해 적는다 너는 울부짖는다 나는 눈물 흘린다 떠내려가는 너를 지켜보며 나는 울부짖는다 눈물이 너를 떠나가고 너는 적는다 죽지 못해 짖는다 나는 너를 적어 내려가고 너는 죽는다 나는 백지를 찢는다 찢어지지 않는 죽음을 짖는다 너는 나를 떠나가고 떠나가지 못해 나는 죽는다 너는 눈물을 흘리고 나는 젓는다 눈물의 바다 위에 적는다 나는 짓는다 눈물 속에 집을 짓는다 나는 적는다, 너를 적지[…]

죽는다 적는다 짖는다
주원익 / 2009-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