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숙의 편집위원 노트 / 김인숙

  하!    김인숙      지난주부터 원주 토지문화관에 와있습니다. 박경리 선생님 살아계실 때는 와본 적이 없어서, 짐 싸들고 문 들어서는데, 그 마음이 좀 송구하고 또 부끄럽고 그랬습니다. 짐을 풀면서 내가 여기에 무엇을 풀려고 왔는가, 쌓으려고 왔는가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 영락없는 여행자의 마음인 듯 했습니다. 들어올 때는 벌써 초여름인가 할 정도로 날이 쨍쨍했는데 이튿날부터 추위가 닥쳐와서 무엇을 풀기에도 쌓기에도 참 어정쩡한 날들이었습니다. 날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제 계절을 찾아서 잎을 피운 매화는 날마다 꽃송이가 벌어지네요. 꽃샘추위를 뚫고 쑥쑥 흙 밖으로 나온 풀잎들이 어찌나 있는 힘껏 씩씩해 보이든지, 또[…]

김인숙의 편집위원 노트
김인숙 / 2009-03-27
크리스마스에는 훌라를-장편연재 4회 / 강영숙

  장편연재 4회크리스마스에는 훌라를    강영숙      6. 허스키, 나만 따라와   도시는 텅 비어 보였어요. 인구의 절반이 이사라도 간 것 같았죠. 채 이주가 시작되지 않은 완공 단계의 계획도시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 도시가 새로 만들어지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문을 닫으려고 하는 건지 잘 알 수 없었어요. 우리는 도시를 빠져나가 비좁고 가파른 외곽 도로를 끝없이 달렸어요. 회색 갈대숲 위로 동그랗게 가지치기를 한 가로수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어요. 모양이 똑같아서 인공미가 흠씬 풍겼죠. 길 위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개들도 보이지 않았어요. 오래 달리자 양쪽 눈알이 시려 왔어요. 가끔 발등을 내려다봤어요. 눈알이[…]

크리스마스에는 훌라를-장편연재 4회
강영숙 / 2009-03-26
보살의 주름진 손과 참혹한 속(俗) / 박대현

      1. 소멸의 감수성과 보살의 언어    문인수와 정지아는 시와 소설이라는 장르적 차이도 있지만 세대적 차이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들의 문학적 감수성은 소멸이라는 뚜렷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문인수와 정지아의 작품을 동일한 프레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적절한 관점을 제공한다. 문인수는 마흔의 나이로 등단하여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서정 시인이고 정지아는 ‘파르티잔’(빨치산)의 딸이자 수배자로서 80년대를 거쳐 온 소설가라는 점에서 그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이겠지만, 이들의 작품은 소멸의 한 지점을 통과하여 다시 삶의 핍진한 현장으로 되돌아옴으로써 ‘보살’의 성(聖)과 삶의 속(俗)을 동시에 체현하는 언어로 합일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8 올해의 시·소설’로 문인수의[…]

보살의 주름진 손과 참혹한 속(俗)
박대현 / 2009-03-26
나는 기마족이다 / 이원규

 나는 기마족이다      이원규   옛 사람들이 말을 타고 산천을 누비던 것과 가장 닮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모터사이클은 현대식 말이다. 108마력에 달하는 나의 ‘은마’는 풀잎 대신 휘발유를 마시고 시속 220km로 달릴 수도 있다. 시속 4km로 걷는 것보다 50배나 더 빠른 무시무시한 속도를 낼 수도 있으니 ‘폭주족’이라는 손가락질을 면하기 어렵다. 반속도를 꿈꾸면서도 질주의 마력에 수시로 휘둘리는 이중성에 대해 욕을 먹어도 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기마족이다.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은 바람의 정면에 서는 것.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몸을 기대며 눈물을 흘리며 길과 바람에게 목숨을 내맡기는 일이니, 그까짓[…]

나는 기마족이다
이원규 / 2009-03-26
밥그릇 경전 / 이덕규

이덕규  밥그릇 경전 칼과 어머니 논두렁 장아찌     밥그릇 경전      어쩌면 이렇게도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깨끗이 비워 놨을까요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내려 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칼과 어머니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칼을 제일[…]

밥그릇 경전
이덕규 / 2009-03-26
개그맨 / 김성중

 개그맨    김성중      1.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TV 안에 있다. 그는 개그맨이다. 그는 신중하게 공을 때리는 프로 당구선수처럼 말 사이의 타이밍을 노려 공기를 한곳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개그를 구사한다. 느린 말투에 느린 움직임, 한 순간 던진 말로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후 각자의 연상 끝에 터지는 폭소. 대중이 그의 개그를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무명시절의 그와 만났다. 양철 지붕에서 통통, 빗소리가 울리던 바였다. 좁고 꾀죄죄한 곳이지만 안주는 비쌌던 것으로 기억된다. 개그맨은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면서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교과서를 덮은 후 더 이상 시를 읽은 적이 없는 나는 아주 쉽게[…]

개그맨
김성중 / 2009-03-26
애린 / 김이태

 애린   김이태   아이린을 본 날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태원의 엠포리움이란 디스코텍이었다. 그는 직장 동료 두셋과 그다지 늦지 않은 저녁에 맥주를 마시러 갔다. 엠포리움은 말이 디스코텍이지 분위기는 카페 같았다. 현대적이고 쿨했다. 무대도 크지 않았고 춤을 추고 싶으면 추고 추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밝았다. 전등이 많았고 어딘가에 수조가 있어 공간 전체가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외국이어도 그에게는 일상이 있었다. 증권 회사에 펀드 매니저로 있었고 이삼 년간 외국 지사에서 경험을 쌓는 게 경력에 유리해 보였다. 오후 일곱 시, 그는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여의도의 양식집에서 간단한 샌드위치로 저녁을 먹고 데이브가 모는 진회색[…]

애린
김이태 / 2009-03-26
언덕 / 박준

 박준    언덕      저녁 찬거리는 있냐는 물음에 조금 머뭇거렸습니다 민박집 주인은 턱으로 언덕 채마밭을 가리킵니다 나는 주인에게 알부민 양철통을 재떨이로 쓰고 계시던데 혹시 간이 안 좋으시냐 물으려다 말고 언덕을 올랐습니다  근처에 분명 고추밭이 있을 것 같은데 언덕에서 헤매입니다. 그 언덕이 튼 살 같은 안개를 부여잡고 있을 때 반팔을 입고 나가기로 한 조금 전을 후회했다고, 언덕이 언덕을 모르고 있을 때 제 몸의 한기를 그 자리에 벗어 두고 떠난 그녀를 생각했다고 말하기로 합니다 오늘 변심한 애인들의 향기는 좋고 나는 살아서 나를 다 속이지 못했다라고도 말하기로 합니다 덧셈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언덕
박준 / 2009-03-26
바람의 장지 / 정영효

 정영효    바람의 장지      나는 내가 다스리지 못한 시간들은 바람이 데려간다고 믿는다  오래 배회하다 바람을 마시면 방에 와도 바깥에 있는 기분이다거스를 수 없는 체온으로 변하는 내 몸의 기후 이불로 얕은 온기를 지펴 보지만몸속을 떠도는 바람의 방향을 느낄 때마다 춥다, 나는 그러나 어쩌면 바람은 추위를 만들지 않는다다만 추운 곳으로 이동할는지도깊은 밤, 바람을 체감하며 잠에서 깰 때석양이 떠나간 물길을 짚는 등대의 불빛을 보거나무리에서 이탈한 짐승들의 잠꼬대 소리를 듣고 뒤척인 적이 있는 자는 내면에 추운 대륙을 가진 것이다건널 수 없고 기원도 알 수 없는 그 대륙은 매일 지나친 저녁과 배설하지 못한[…]

바람의 장지
정영효 / 2009-03-26
검은 밤 뒤의 흰 밤 / 조연호

 조연호    검은 밤 뒤의 흰 밤      #  자살 기도 후 아무튼 사과를 깎아 주려는 부모님의 태도와 같이인간과 밀은잠깐 지나는 비에 기대어 반성을 했다.비는 상냥함과 과분함 사이사이에 검고 희게 펼쳐져 있었다.  낮은 층에 사는 친구를 사귀는 것도 좋을 것이다.하층(下層)의 아이들에게 나는 공군기지였고 비행기였던 아이들은 팔을 벌리고 내 등 위를 달렸다.동료 같았던 기나긴 이륙뭐랄까 이제는 신발 끈을 목에 감는 기분으로 아주 천천히 어두워지는 시간에 바늘의 정각을 맞춘다.   이사철에만 꿈꾸는 완벽한 집과 멈추지 않는 걸레질은 오랫동안 도돌이표를 나눴다.세상의 모든 악몽을 그녀들로 편애하는 날유언 집행인은 또 한 번 죗값의 동화를[…]

검은 밤 뒤의 흰 밤
조연호 / 2009-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