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는다는 것 / 이선우

나이를 먹는다는 것    이선우      달을 보았습니다. 신정도 구정도 다 지났고, 살아남았으니 또 한 살 나이를 먹었습니다. 응당 그런 것이려니 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새삼 그 의미를 새기게 되는 건 나이가 들어간다는 의미일까요. 삶이란 죽음의 연속이고 죽음 역시 삶의 하나라는 말이 잔망스레 느껴질 정도로 잔혹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난무했던 세밑이었습니다. 한 오라기 얼굴 내민 달을 보니 지구도 참 서정적인 곳임에 분명한데, 이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의 낭만적인 상상력을 한순간에 박살냅니다. 비현실적인 것이 잘 벼린 뼈처럼 아름다운 저 달이냐, 공권력의 불길에 휩싸인 우리의 오늘이냐 자꾸만 물어보게 되는 음력 초사흘입니다. 하여[…]

나이를 먹는다는 것
이선우 / 2009-01-30
고통을 달래는 순서 / 김경미

김경미  고통을 달래는 순서 이러고 있는, 고요에 바치네 생화      고통을 달래는 순서     토란잎과 연잎은 종이 한장 차이다 토련(土蓮)이라고도 한다  큰 도화지에 갈매기와 기러기를 그린다 역시 거기서 거기다  누워서 구름의 면전에 유리창을 대고 침을 뱉어도 보고 침으로 닦아도 본다  약국과 제과점 가서 포도잼과 붉은 요오드딩크를 사다가 반씩 섞어 목이나 겨드랑이에 바른다  저녁 해 회색삭발 시작할 때 함께 머리카락에 가위를 대거나 한송이 꽃을 꽂는다 미친 쑥부쟁이나 엉겅퀴  가로등 스위치를 찾아 죄다 한줌씩 불빛 낮춰버린다  바다에게 가서 강 얘기 하고 강에 가서 기차 얘기 한다  뒤져보면 모래 끼얹은 날 더 많았다 순서란 없다  견딘다[…]

고통을 달래는 순서
김경미 / 2009-01-29
필경 54년, 큰 문학―이호철의 문학 세계 / 정호웅

필경 54년, 큰 문학―이호철의 문학 세계      정호웅      1. 큰 산맥과도 같은 문학  1955년에 등단했으니 어언 54년, 작가 이호철의 붓으로 밭 갈기(필경 筆耕)는 반세기를 넘은 지금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장편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의 연재가 얼마 전에 끝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여든이 가까워 옴에도 줄지 않는 작가의 문학일로(文學一路), 뜨거운 열정과 붓힘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같은 열정과 붓힘이 저처럼 큰 문학을 일구었으리라. 작가 ‘이호철’을 생각하면 등단작인 단편 ?탈향?(1955)에서 시작하여 최근작인 장편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2008)에 이르는 이호철 문학이 큰 산맥과도[…]

필경 54년, 큰 문학―이호철의 문학 세계
정호웅 / 2009-01-29
취미, 시간에 대한 예의 / 박해람

취미, 시간에 대한 예의    박해람       시간에 대한 예의 카페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그야말로 무엇에 집중하는 방법을 배웠다. 배웠다기보다는 집중이 자연스레 나를 찾아왔다. 마치 놀러 오기라도 하듯. 나는 그 놀러 온 집중을 잡고 보내지 않는 데 꽤 여러 날을 바쳤다. 이전의 내가 찾아다녔던 거리와 역들과 지명들은 그때서야 하나 둘 나를 떠나기 시작했고 그 무렵, 나는 새로운 것들의 숙주가 되는 것에 기꺼이 찬성했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에 온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틈’이었다. 집중과 집중 사이에 버릇없이 끼어들어 딱딱하게 굳어가는 틈! 난 나무와 함께 자랐다. 나무에서 아이가 떨어지는 것도, 나무에[…]

취미, 시간에 대한 예의
박해람 / 2009-01-29
크리스마스에는 훌라를-장편연재 2회 / 강영숙

장편 연재 2회크리스마스에는 훌라를      강영숙      3. 마마, 내가 부숴 버릴게  겨울이 되면서 제 머릿속은 차가운 얼음장이 들어찬 것처럼 꽝꽝 얼어 버렸어요. 길가의 나무들, 백 살이 된 동네 할머니가 어떻게 생로병사를 겪는지 살펴볼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동네 여자애들이 문턱이 부서져라 하루 종일 드나드는 피아노 학원의 담벼락 아래밖에는 제가 갈 곳이 없었어요. 따뜻한 햇볕 아래 서서 어지러운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답니다.  자이언트가 없어도 가게 바닥의 쇳물은 여전히 고여 있었습니다. 검게 빛나는 쇳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긴 쇠막대기를 담가 보았습니다. 채 십 센티도 되지 않는 얕은 깊이였어요. 모든 일이[…]

크리스마스에는 훌라를-장편연재 2회
강영숙 / 2009-01-29
국수 / 박진규

국수      박진규    1  그 국숫집으로 말하자면 눈발이 하얗게 날리던 겨울에 찾아 들어간 곳이었다. 성탄절은 지났지만 새해가 밝기 전이었으니까 쓸쓸함과 설레는 마음이 휘휘 섞이는 그런 때였다. 날씨는 제법 쌀쌀해서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들이마시면 차가운 바람이 목구멍으로 잘도 넘어갔다.나와 어머니가 들어간 국숫집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포장마차는 아니었다. 그 시절의 여성치고는 키가 컸던 어머니가 고개를 숙인 채 들어가야 하는 작은 구멍가게였다. 가게의 출입문은 미닫이문이었고 작은 유리창에는 ‘국수’라는 글자가 붉은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이제는 사라진 동네 목욕탕 출입문에 쓰여 있던 ‘남탕’ ‘여탕’이라는 글씨체와 비스무리한 붓글씨체였다. 국수를 먹으러[…]

국수
박진규 / 2009-01-29
나는 달리다 / 원종국

나는 달리다Mix-and-Match1)5      원종국      택시를 타기 위해 걸음을 내딛다가 달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 놔두고 온 게 있는 것 같았다. 백화점에 왔을 때부터 짐은 없었다. 물론 백화점에서 뭔가를 구입하지도 않았다. 놔두고 올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뭔가, 조금 허전했다. 시간이라도 도둑맞은 것처럼. 택시 문을 닫을 때 백화점 귀퉁이의 커피 전문점이 눈에 들어왔다. 커피콩 모양의 벽돌들로 외관을 장식한. 혀끝에 군침이 살짝 감돌았지만 이미 택시 문을 닫은 뒤였다. 알 수 없게도 코끝으로 커피 향이 스쳤다. 선팅을 짙게 해 그런지 택시 안은 어둑했다. 슬쩍 곁눈질해 바라본 기사는 말처럼 긴 두상의[…]

나는 달리다
원종국 / 2009-01-29
거인 / 임곤택

임곤택    거인  거인이 일어선다지에스 25와 주유소가 마주보는 사차선 도로버스 창으로 거인의 옆얼굴이 비친다오래전 가을, 상투를 튼 화전민들의 쓸쓸한 추수를 떠올린다운동회의 나른한 흙먼지를 마시고쿨룩쿨룩 기침이 난다꺾인 무릎을 짚고 거인이 일어선다그는 무엇이든 꿰뚫고 어디든 닿았으며, 나비처럼 가볍다구형 스포티지 한 대가 경찰차를 추월하는 중이다가로등에 불이 켜진다, 아직 어둡지 않은데 왜, 그런 오후 있잖아일요일 오후, 밀리는 차들에 시달리다 느지막이 도착한 오후, 맞은편 아파트의 벽이 카메라의 플래시처럼 눈부시고, 서쪽으로 치우친 해가 전속력을 내기 시작하는 오후그때면 꼭 반지를 끼워 줄게 그리고 약속은 몇 번이나 반복되고지팡이를 쥔 노부부가 서로 부축하며 횡단보도를 건넌다열 대의 자동차에 펑크가 나고[…]

거인
임곤택 / 2009-01-29
Facade / 박미영

박미영     Facade      흰 벽 갈라진 틈으로 네 얼굴 얽힌다, 철커덩 열쇠 뭉치 소리, 목제(木製) 문 열리는 소리, 확실한 것은 언제나 불확실을 밀어내듯 고장 난 문쩌귀 틈으로 차갑게 스며드는 생활이 네 얼굴을 지운다, 하지만 나는 항상 나를 믿지 않는다, 얽힘과 지움, 틈과 빈틈, 문과 얼굴, 확실과 불확실처럼 의심한다, 가난한 계단으로 누가 올라온다, 누구요, 새벽꿈에 울다 깬 목소리처럼 햇살이 천장으로 스민다, 죄수와 같은 햇살의 걸음걸이, 천천히 문이 열리며 네가 들어선다, 나요, 바로 당신이오,       거꾸로 누운 햇살      깨진 화분 밑동 드러난 꽃부리에 딱정벌레 두[…]

Facade
박미영 / 2009-01-29
물의 나라 / 문정희

문정희    물의 나라   물의 나라 주민들은 숨만 쉬기로 한 것 같다 살아 있는 것들이면서도 움켜쥐고 쌓아 올리는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물의 나라 주민에게 손과 발은 사라진 전설 입 하나가 욕망의 전부이다 가득히 바다를 채우고 바다를 내뿜는 입이 오직 날렵한 생애이다 유혹하는 낚싯바늘이나 유리 궁전 밖에서 기다리는 숙련된 칼잡이들쯤 비린내 나는 바다의 살점을 씹으려고 입맛을 다시는 날카로운 이빨들쯤은 끝내 루머처럼 몰라도 좋다물의 나라 주민들은 수궁 깊은 사찰에서 오래 도를 닦은 바다의 미륵들이다 흐르며 흐르며 희희낙락에 당도하는 파도 속의 노래들이다       폭설 도시      […]

물의 나라
문정희 / 2009-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