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2008년 12월호 《문장 웹진》이 발간되었습니다 /

 온 세상이 꽝꽝 얼어붙을 차비를 하는 12월, 웹진에서는 박설희, 박주택, 신은영, 이홍섭, 정복여, 정수자, 조동범, 천수호의 뜨겁고 차가운 시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차현, 이상섭, 김유진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소설들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2008년 한국문학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특집으로 기획된 고봉준의 평론 <내일을 위한 세 개의 기억들>과 김미정의 <도래할 혹은 가능한>은 성실하고 균형 잡힌 시선으로 올 한 해 문단의 경향과 쟁점을 짚고 있고, <작가박물지>에서는 평론가 김종훈의 김광규 작품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소설가 오현종의 피아노에 얽힌 추억도 아기자기합니다. 그에 더해 오랜만에 선보이는 <조경란이만난사람>도 준비되어 있으며, <멀티미디어 낭송시>를 통해 시인 강정의 낭송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항상 봄은[…]

[알림] 2008년 12월호 《문장 웹진》이 발간되었습니다
/ 2008-11-28
나무들의 뼈대 / 한강

 나무들의 뼈대 한강 잎이 다 떨어지고 나니, 나무들의 뼈대는 검고 고요합니다. 오래 그 뼈대를 바라봅니다. 이제 더 추워지겠지요. 나무들은 더 검고 고요해지겠지요. 우리는 따뜻한 살을 가졌으니, 체온을 잃지 않으려고 더 따뜻한 것을 향해 몸을 기울이겠지요. 털로 짠 스웨터, 방금 구운 풀빵, 절절 끓는 아랫목, 세차게 비빈 손바닥의 열기, 젖은 눈으로 묻는 안부. 그러는 동안 해가 가겠지요. 더 추워지겠지요. 온 세상이 꽝꽝 얼어붙을 차비를 하는 12월, 웹진에서는 박설희, 박주택, 신은영, 이홍섭, 정복여, 정수자, 조동범, 천수호의 뜨겁고 차가운 시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차현, 이상섭, 김유진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소설들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2008년 한국문학의 흐름을[…]

나무들의 뼈대
한강 / 2008-11-28
한때 나는 피아노를 쳤지 / 오현종

 한때 나는 피아노를 쳤지 오현종 한때 나는 피아노를 쳤다. 팔 년 동안 쉬지 않고 피아노를 배웠으니 잠깐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벌써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는 이른바 ‘절대 음감’이라 불릴 만한 천재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천재의 재능에 환호하고, 클래식의 선율에 빠져든다. 그러면 나는? 나는…… 즐겁지 않다. 나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시기하는 살리에르처럼 ‘절대 음감’의 존재 따위 믿고 싶지 않고, 저건 그저 드라마일 따름이라고 치부하고 싶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꼬박꼬박 <베토벤 바이러스>를 시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건 어쩌면 자학?   어느 책의 <작가의 말>에 적었듯이 나는 피아노를 끔찍하게 못 치는 아이였다. 여섯[…]

한때 나는 피아노를 쳤지
오현종 / 2008-11-28
키스 / 강정

  강정    키스 안녕 카메라, 키메라 한낮, 정사는 푸르러  키스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나무들이 숨은 눈을 뜨는 장면은 오래 전에 읽었던 동화가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미래는 시간의 이동에 의한 게 아니라 시간의 소멸에 의한 잠정적 결론, 너의 문안에서 나는 모든 사랑이 체험하는 종말의 예언을 저작한다 너는 내 혀에서 음악과 시의 법칙을 섭취하려든다 나는 네게서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적 근친상간의[…]

키스
강정 / 2008-11-28
약국이 어디에요 / 김유진

  약국이 어디에요 김유진 아홉 시 이십 분이 되자, 그는 거실 오른쪽 구석에 놓인 이층 침대에 모로 누워 리모컨으로 어린이 전문 채널의 번호를 입력했다. 이십 분 전, 그는 부엌 입구에서 여행객들이 아침 식사를 끝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객들이 숟가락을 내려놓자마자 재빨리 그릇을 개수대에 쌓아 놓았다. 대걸레로 거실을 두 번 밀었다. 간혹 화장실의 쓰레기통을 비우기도 했는데, 오늘은 하지 않았다. 직접 조립한 이케아 침대가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해 이층까지 휘청거렸다. 침대보가 우는 아이의 얼굴처럼 구겨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1975년에 제작된 미국산 만화 영화를 보고 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두피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목살의[…]

약국이 어디에요
김유진 / 2008-11-28
아직, 아직은 / 이상섭

  아직, 아직은 이상섭 벨 소리는 끝이 없다. 지긋지긋하게 울리는 저 낡은 벨 소리. 돈이 있다면 당장 저것부터 바꿔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딩동딩동. 벨이 다시 울린다. 간밤에 마야가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지금 심정이라면 일어나고 싶지 않다. 아니, 그냥 이대로 영원히 숨이라도 멎었으면 좋겠다. 그 와중에도 벨은 끈질기게 운다. 끈질긴 게 보나마나 103호 여자인 모양이다. 105호는 이사를 갔으므로 비어 있는 상태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다. 103호 여자는 마야처럼 집에만 처박혀 지내는지 틈만 나면 초인종을 눌렀다. 누를 때마다 방문 이유는 다양했다. 냄새[…]

아직, 아직은
이상섭 / 2008-11-28
장호는 맛있다 / 한차현

  장호는 맛있다 한차현                                                    1차 2008년 9월 5일 금요일. 오늘은 술 먹는 날이다. 시인 박장호가 첫 시집을 냈다. 홍대 69호프에서 6시 반에 모이기로 했고 시간 많은 한따가 홍대역 4번 출구에 도착한 것은 5시 56분. 69에 먼저 가 있을까, 가서 맥주 한 잔 할까, 고민하다가 근처 출판사의 소설가 김도언에게 전화했다. 일찍 나올 수 있냐? 그랬더니 10분까지 나간다고 조금만 기다리란다. 그 편이 낫겠다. 필경은 밤새 마실 술 먼저 시작해서 나쁠 게 없었지만 그러다가 별로 안 친한 시인 소설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건 좀 껄끄럽다. 한따야 상관없지만 그들이 한따를 얼마나 시간 많은 놈으로[…]

장호는 맛있다
한차현 / 2008-11-28
먼지들 / 박설희

 박설희 먼지들                                                공중부양의 경지에 이른 먼지들 이랑처럼 물결처럼 부스러지다가 바람에 불려가다가 나는 좌석에 가만히 내려앉는다 문상 가는 길, 누군가에 들러붙어 어디든 살짝 묻어가려는 것 차창에 머리카락 한 올이 끼여 있다 파르르 떨다가 끄덕끄덕 그림자까지 거느리고 차의 일부분이 된 양 천연덕스럽다 저 머리카락처럼 이 생에 나, 시치미 떼고 아무 데나 흘러 들어가 가벼운 척 아무것도 아닌 척 재채기로 풀풀 날리거나 피부에 오돌토돌 반점으로 돋아나 알레르기라고  과민반응 보이지 말라고…… 장례식장 한 켠 무게 없이 앉아 있다가 눈에 띄지 않게 다시 묻어가려는데 툭툭 나를 떨어 버리는 손길 공중에 떠버린 발걸음 휘청, 약수(弱水)*[…]

먼지들
박설희 / 2008-11-28
저토록 저무는 풍경 / 박주택

 박주택  저토록 저무는 풍경                           잎사귀 떨어지는 거리를 걷다 중국집 계단을 오르며 저무는 문에 볶음밥 냄새 훅 끼쳐 오면 어서 빨리 시간이나 지나가라고 어서 빨리 이 계절을 지나 저 계절로 가라고 낮고 젖은 가슴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울음들에게 가는 노래를 듣는다, 자장면 그릇에 모이는 나부끼는 저 창밖의 잎사귀들은 검은 공기에 뜯겨 조서 없이 바람 속으로 들어갈 것이지만 세상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도 사람의 발자국에 남은 김 서린 목을 맬 수는 없겠지 오늘 밤은 또 무엇이 되려나 예기치 않은 것들이 얽혀 운명이 되는 밤 저 여미는 것들 슬픔이라도 만지는 듯 바람은 가는 노래에서 흘러나오는[…]

저토록 저무는 풍경
박주택 / 2008-11-28
잠자리 왕국 / 신은영

 신은영 잠자리 왕국 초여름 아침, 하늘의 쪽빛도 첫물일 때, 검지 손가락만한 잠자리들이 눈높이 가까이 날며 짝짓기를 한다 온몸으로 윙윙거리며 바짝 날아오르는 잠자리를 피하느라 오히려 고개를 숙인다 둘이라는 것, 잠자리 눈동자의 회오리에 휩쓸리듯 네 영혼에 몰두하는 것 그러나 너의 육체를 받친 채 허공 위를 뚫고 오르는 외로움은 파란 하늘에 부시다 잠자리 왕국으로 떠난 당신 하늘의 공백 저편에 열린 문을 열고 잠자리 고개 돌아가듯 딸각딸각 멀어지며 돌아보지도 않고, 말랑거리는 그대 앞가슴을 밟고 낯선 걸음으로 따라가 보아도 애써 손사래 치며 밀어내는 오솔길, 자꾸만 멀어지는 한 줄기 햇빛 따라 잠들다 깨면 불길하게도 새까만 물잠자리[…]

잠자리 왕국
신은영 / 2008-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