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나라 이야기 / 이상권

글 /이상권  1교시가 갈무리되자 오연이는 휴대폰부터 끄집어낸다. 단축키 1번에다 힘을 주자 ‘찔레댁’이라는 글자가 화면으로 꾸물거린다. 어머니의 애창곡 ‘열정’이라는 노래가 쏟아져 나온다. 오연이는 한참 그 노래를 읊조린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오연이는 어머니가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하고는 문자를 치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를 찔레댁이라고 부른다. 어머니는 그 댁호를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여기저기 아는 이들에게 찔레댁이 당신의 닉네임이라고 호들갑스럽게 알렸다. 찔레댁, 처음에는 결코 좋은 이미지로 움튼 말이 아니었다. 찔레댁, 사람들은 얼굴이 유독 하얀 새색시를 보면서 흙내만 맡아도 멀미를 할 것이라고 손가락질하고는, 찔레꽃처럼 고운 사람이 어찌 험한 농사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먼 나라 이야기
이상권 / 2008-09-30
[알림] 2008년 10월호 《문장 웹진》이 발간되었습니다 /

 요즘 읽고 있는 소설에는 노부부가 먼 길을 떠나려는 한 소녀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새들이 손바닥 위에 앉으면 손의 힘을 빼어 그들이 놀라 달아나지 않게 하는 법,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부분을 통해서 용의 전체의 모습을 알아내는 법, 숨을 고르게 내쉬는 법, 그리고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방법…… 숨을 고르게 내쉬지 않으면 균형을 잃게 되는 법이지요. 그리고 노부부는 길을 떠나기 전에 소녀의 등에 그녀 이름과 주소를 새겨줍니다. 먼 길을 돌아, 그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저는 종종 문학과 인생이 나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자문할 때가 있습니다.[…]

[알림] 2008년 10월호 《문장 웹진》이 발간되었습니다
/ 2008-09-30
숨을 고르게 내쉬는 법 / 조경란

 숨을 고르게 내쉬는 법 조경란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소설에는 노부부가 먼 길을 떠나려는 한 소녀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새들이 손바닥 위에 앉으면 손의 힘을 빼어 그들이 놀라 달아나지 않게 하는 법,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부분을 통해서 용의 전체의 모습을 알아내는 법, 숨을 고르게 내쉬는 법, 그리고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방법…… 숨을 고르게 내쉬지 않으면 균형을 잃게 되는 법이지요. 그리고 노부부는 길을 떠나기 전에 소녀의 등에 그녀 이름과 주소를 새겨줍니다. 먼 길을 돌아, 그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저는 종종 문학과 인생이 나에게 어떤[…]

숨을 고르게 내쉬는 법
조경란 / 2008-09-30
존재의 영역으로부터 죽음을 몰아내는 천야일화(千夜一話), 박상륭 소설 읽기 / 신성환

  존재의 영역으로부터 죽음을 몰아내는 천야일화(千夜一話), 박상륭 소설 읽기 신성환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를 이끄는 가장 큰 동력은 ‘죽음’이다. 그것은 수많은, 그리고 기나긴 밤에 존재의 영역으로부터 죽음을 몰아내기 위한 노력을 담고 있다. 세헤라자데는 죽음을 지연하기 위해 이야기한다. 침묵이 드리우는 순간 죽음이 닥쳐올 것이다. 그렇게 1천 1밤 동안 이야기가 쌓여 ‘천일야화(千一夜話)’이다. 박상륭 소설의 주인공들 역시 죽음에 대한 투철한 자의식에 사로잡힌 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그들의 현란한 자아도취적인 발화는 삶과 죽음이 갈아드는 지점, 바르도(Bardo)에서 들려오는 전언이다. 『죽음의 한 연구』의 후반부 유리(?里)에서의 제22일, 육조가 스스로 혀를 끊어 내고 침묵을 선택하자 곧 죽음이 들이닥친다. 샤푸리 야르[…]

존재의 영역으로부터 죽음을 몰아내는 천야일화(千夜一話), 박상륭 소설 읽기
신성환 / 2008-09-30
내 취미는 반항이다 / 김사과

 내 취미는 반항이다 김사과 나에게 반항하는 인간에 대한 최초의 이미지는 영원히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이다. 다시 굴러 떨어질 게 분명한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저주를 받은 불쌍한 시지프 말이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었고, 그게 내 사고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 책은 한동안 내 삶의 바이블이었다. 나는 ‘시지프’라는 캐릭터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는 인간이라는 한계에 대한 반항 그 자체였다. 고결하고 우아했다. 카뮈는 그런 반항 정신을 몹시 사랑했는지 나중에는 아예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하였다. 나는 순전히 그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그 책을 샀다. 그래서 그때부터인가, 내가 반항을 내 삶의[…]

내 취미는 반항이다
김사과 / 2008-09-30
늦단풍 외 3편 / 장철문

  장철문    늦단풍 소주를 먹다 무릎 위의 자작나무 참외 꼭지   늦단풍  서른두 가마니의 참숯을 들이부었다 뻥 뚫린 풍구다 대장장이의 얼굴이 서쪽으로부터 발그레하다 소주를 먹다 신생아실에서 아이를 데려다 눕혀놓고 만산의,  두 시간만의 출산이 순산도 너무 빠른 순산이어서 자궁에 혈종이 생겼다는 아내는 요도에 호스를 꽂았는데, 회복실을 빠져나와 끊은 담배를 피웠다 소주를 한 병 사서 어두운 벤치에서 혼자 마셨다 느티나무 가지 흔드는 바람자락에 형이 왔다 와서  내 어깨를 치고 아이를 들여다보고 아내에게 뭐라고 웃었다 형을 만지고 싶었다 웃음이 환하게 흩어졌다 형, 잘 가! 웃음 한 자락이 남아서 오래 펄럭였다 형, 아프진 않지? 남은 한자락이 마저 흩어졌다[…]

늦단풍 외 3편
장철문 / 2008-09-30
줄넘기 / 김종은

  줄넘기 김종은 꽤 오랫동안 아버지를 동상이라 여겼다. 거대하고 딱딱하고 무엇보다 조용한 까닭에서였다. 어쩌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너무 자주 봤기 때문인지 몰랐다. 아버지와 단둘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이었다. 동네 진성탕에서 매주 일요일 오전 한 시간 반을 거르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했다. 아버지는 수건을 바닥에 곱게 펼쳐 놓고 비눗갑을 올려놓은 다음 그것을 능숙하게 말았다. 수건 뭉치는 거짓말처럼 아버지의 손에 딱 들어맞게 변했다.   “때 밀자.” 아버지는 수건 뭉치를 단단히 움켜쥐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것이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애정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부자간의 오붓한 시간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로선 차마[…]

줄넘기
김종은 / 2008-09-30
아! 세라 (ah! sherah) / 허혜란

 아! 세라 (ah! sherah) 허혜란 1                                          이 집에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산다. 그러나,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처럼 고요하다. 창밖에서부터 흘러드는 달빛이 서늘하게 비쳐드는 거실, 크고 넓은 빈 벽들만이 서로를 비춰 주고 있다. 어슴푸레하게 드러나는 바닥이 어둠속에서도 반들반들하다. 한 발을 내디디면 스윽, 미끄러질 것만 같다. 한밤의 폐쇄된 수영장 같다. 어딘가 음험한 분위기다. 살아 있는 자의 숨소리라고는 한 번도 품어 본 적 없는 것 같은 고요함 속에 다만 간간히 ‘지이잉’ 소리만 흐른다. 광야를 휘도는 바람소리 같고 덩치 큰 짐승이 내뱉는 ‘숨’ 소리 같다.   그 소리는 벽에 착 붙은 견고한 직사각형[…]

아! 세라 (ah! sherah)
허혜란 / 2008-09-30
그늘의 깊이 / 강연호

 강연호 그늘의 깊이 사람의 그늘을 만난 지 오래다 어디 그늘이 없었을까, 눈 흐려진 탓이다 나이 들면 자꾸 멀리 보게 마련이고 멀리 건너다보는 시력으로는 사람의 그늘도 흐리게 뭉개지는 법 그늘을 헤아리는 심사는 어느 늙은 나뭇가지 사이로 한때 무성했던 세월이 구름처럼 뭉텅뭉텅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바람 가는 방향으로 귀를 연 이파리들의  여름에는 키가 크고 겨울에는 늘어졌을 한 시절의 내력을 가늠하는 일 우듬지 여윈 손가락이 바람을 쓸어 넘기듯 아, 나도 언젠가 저런 빗질을 받은 적이 있었더랬는데 덜 마른 빨래처럼 고개 수그리고 머리를 맡겨 생각에 잠기는 일 지금은 없는 누군가의 서늘했던 그늘 그[…]

그늘의 깊이
강연호 / 2008-09-30
빗속에서 / 김은경

 김은경 빗속에서 집으로 향하는 성내천(城內川) 길 우산 없이 비를 맞는다 토끼풀과 나란히 비바람에 시시때때 꽃잎과 결별 중인 찔레나무와 나란히 눈 뜨고 잠든 돌멩이와 나란히 나란히 돌아보니 빗속을 이렇게  맨몸으로 걸은 기억이 없다 어느 저녁 피치 못할 소낙비를 맞으며 눈물로 한 사내를 기다린 적 있었으나 불손하게도 인생은 어차피 장마기의 연속이라고 생각한 때 있었으나 빗방울을 생애 단벌로 껴입은 토란잎처럼은 아니었다 황사 비에도 어김없이 제 초록을 키워 가는 청미래 이파리처럼은 아니었다 (슬픔의 연주 방식에도 고수와 하수가 있다니!) 눈 뜬 채 비 맞는 모든 맨몸은 매혹적이다 오디나무의 맨손 사마귀의 맨발 눈 먼 해바라기의 맨얼굴[…]

빗속에서
김은경 / 2008-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