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간 / 권리

새로운 인간 ― 중미 여행기(멕시코, 쿠바) 권리 우리 집은 다방이 많은 찻길 가에 있었다. 자정이 지나면 남녀 한 패가 나와 길 건너에서 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숫자가 들어간 욕을 주거니 받거니, 머리칼을 뜯네 마네 한다. 그들 때문에 잠이 깨면 이번에는 옆집 아저씨가 말썽을 피웠다. 그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거국적으로 술을 마신다. 거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아저씨는 노래를 부른다. 어제는 남행열차, 오늘은 만남. 아저씨의 입을 거치지 않는 유행가는 없다. 또 거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아저씨는 자기 집에 대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그는 20년이 넘도록 끈질기게 이사를 가지 않고 있다. 싸움은 누구나 멍들게 한다. 싸움을[…]

새로운 인간
권리 / 2008-07-31
시원(詩源) / 정재학

  정재학  시원(詩源) Temple of The King 微分 ― 낭객 微分 ― 편지   시원(詩源)  태양이 지나다니지 않는 막다른 어둠에서 빛을 들을 때가 있다 어느 쪽 귀가 먼저였는지 알 수도 없이 순식간에 칼이 꽂히듯 내 두 귀를 관통한다 직선적이지만 첫 담배처럼 몽롱하다 그것은 그 순간은 몸 전체가 두 귀 사이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꽂힌 빛이 뒤틀린다 내 귀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연두색 피를 흘린다 시작점을 알 수 없는 빛, 단지 과정일 뿐 내 귀를 주파해 낸 빛이 어디까지 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모든 소리들 멀어지고 내 목소리만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울린다[…]

시원(詩源)
정재학 / 2008-07-31
호수의 백일몽 / 김이듬

 호수의 백일몽 김이듬 지금 나는 여태껏 보아왔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늙고 커다랗고 비만한 남자와 마주앉아 있다. 그는 어두침침한 실내의 다다미 위에 입을 반쯤 벌린 채 거의 20년을 그대로 앉아있었던 사람처럼 보인다. 흰 머리 위쪽에 달린 거무스름한 선반 위에는 국수 그릇과 성경, 담배와 나이프와 마스크, 알록달록한 약병 따위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넘어진 우스타소스병에서 흘러나온 검은 액체가 죽음에 가까운 음울한 사람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고 있다. 작년 이맘때쯤 처음으로 이곳에 왔던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그가 훨씬 더 뚱뚱해졌고 말수가 적어진 것 정도다. 역겨운 냄새가 퍼지고 모차르트의 C장조 푸가 K. 394가 울려 퍼지던[…]

호수의 백일몽
김이듬 / 2008-07-31
겨울 건봉사 / 손홍규

 겨울 건봉사   손홍규 지난겨울 어느 날 아침, 얼굴에 표정이 생겼습니다. 입을 움직이는 근육이 귀 쪽으로 당겨진 채 멈췄고 눈꺼풀을 여닫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얼굴 반쪽을 누군가에게 내주고 난 뒤에야 알았습니다. 불구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잠복해 있다가 드러날 뿐이라는 사실을. 시린 겨울, 태백산맥 왼편은 고요했습니다만 바다를 끼고 있는 바람벽 아래에선 폭설이 내렸습니다. 서울에서 시작해 오십만 미터를 걸어 일주문 아래 섰습니다. 전쟁 때 유일하게 화재를 피했다는, 혹은 다른 전각들의 멸망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건봉사 일주문은 신들의 밥상처럼 네 다리로 우뚝 선 채 눈 덮인 산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을 닮은 사람을[…]

겨울 건봉사
손홍규 / 2008-07-31
오, 스컹크! / 심보선

  오, 스컹크! 심보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주로 겨울에 사랑에 빠지고 겨울에 이별하곤 했다. 엄살조로 말하자면, 겨울이란 내게 '시간의 시간성'을 고통스럽게 일깨워 주는 계절이었다. 이별이라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만남이라면 시간이 영원히 정지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겨울의 시간은 너무 느리거나 너무 빨리 내 의지를 거슬러 흘러가며 마음의 기슭에 뚜렷한 손톱자국들을 새겨 넣었다. 나는 겨울에 어설픈 운명론자가 되곤 했다. 폭설이 내릴 때, 나는 세계가 지워지고 있다는 절망감과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는 기대감에 뒤섞여 창밖을 바라보곤 하였다. 나와 무관하게 변화하는 세계의 색조와 무게와 결 앞에서 깜박깜박 점멸하며 절감하던 '어찌할 수 없음'. 그리고 가장 밝고 가볍고[…]

오, 스컹크!
심보선 / 2008-07-31
헤어드라이어 사용설명서 / 이기호

  헤어드라이어 사용설명서 이기호 등단 직전, 용인 굴암산 밑 박범신 선생의 작업실을 일 년 넘게 빌려 쓴 적이 있었다. 말이 빌려 쓴 것이지, 거의 쫓겨 들어간 셈이나 다름없었다. 위대하셔라, 이 땅에 강림한 IMF는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나뿐인 형의 사업체가 깔끔하게 공중부양, 전능하신 외국계 은행 우편에 앉게 되었고, 덩달아 내 허름한 옥탑방 보증금도 소리 소문 없이 하늘에 오르사, 부활의 기약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잘 곳도 없는 마당에 학교는 무슨 학교. 박스에 컴퓨터 한 대, 옷 세 벌을 넣은 채, 무작정 선생의 작업실로 찾아 들어갔다. 핑계는 좋았다. 글 좀 써 볼까[…]

헤어드라이어 사용설명서
이기호 / 2008-07-31
비인칭 주어의 겨울 한 컷 / 이신조

 비인칭 주어의 겨울 한 컷      이신조 ‘얼다’와 ‘녹다’라는 동사를 물이나 얼음뿐만 아니라, 마음이나 감정을 주어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다. 따뜻하다, 시원하다, 눅눅하다, 건조하다, 뜨겁다, 시리다 등도 마찬가지. 마음에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구름이 흘러가고 햇살이 내리쬔다. 기상현상은 언제나 친근하고 매력적인 메타포다. ‘비인칭 주어’를 처음으로 배웠던 중학교 영어시간을 기억한다. It is raining. – ‘It’은 누구인가, 무엇인가, 과연 비인칭. It은 딱히 규정하기 어렵고 모호한 ‘그것’. 비가 온다. – 누가 비를 내리게 하나, 무엇으로 말미암아 비가 내리나. 감히 비인칭이 아니고서야. 안개가 걷힌다, 파도가 출렁인다, 천둥이 친다, 하늘이 맑다, 이슬이 맺힌다······[…]

비인칭 주어의 겨울 한 컷
이신조 / 2008-07-31
색깔의 착란 / 이영주

 색깔의 착란 이영주 나에게 겨울은 한 장의 사진으로 촉발된다. 냉소적인 아름다움으로 점철된 눈(雪), 뼈대만 남아 오히려 바람의 두툼한 갑옷을 연상시키는 겨울나무들, 사람의 머리 위에서 이질적으로 꿈틀거리는 털모자, 그리고 겨울의 질감을 완성시키는 창백한 입술들. 그것이 나에게 일반적인 겨울의 이름이었다. 뜨거운 태양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 여름에 겨울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다른 세계의 풍경을 그려내라는 주문과도 같을 것이다. 나는 겨울이라는 다른 차원의 시간과 공간을 이 사진 한 장으로 불러낸다.   이곳은 그리스 크레타 섬이다. 서른이라는 시간에 영원히 빼낼 수 없는 못 하나를 박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었다. 그리스의 수많은 유적들을 제쳐 두고 내[…]

색깔의 착란
이영주 / 2008-07-31
누구도 꿈꾸지 못하는 겨울밤 / 조기조

  누구도 꿈꾸지 못하는 겨울밤 조기조  겨울은 예술 속에서 종종 아름답게 그려지곤 한다. 그 아름다움 속에는 온 세상을 하얗게 은백의 세계로 덮어 주면서 포근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백설의 축제가 있다. 나에게도 그런 아름다운 겨울이 있었다. 목화송이만한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려와 강물 속으로 스러지는 모습을 고향의 강둑에 서서 바라보며 울면서 술을 배우던 소년 시절이 있었다. 또 한국에서 가장 추운 경기도 북부 어느 소읍에 잠시 머물면서 무릎이 빠질 정도로 쌓인 눈길을 한 여자를 업고 귓불에 얼음이 박히는 줄도 모르고 밤새 걸었던 청년 시절이 있었다. 이제 소년은 중년이 되었고, 여자는 떠났고, 아름다움은 추억일 뿐이다.[…]

누구도 꿈꾸지 못하는 겨울밤
조기조 / 2008-07-31
외국어 낱말 / 편혜영

 외국어 낱말 편혜영 그는 계절이 두 개뿐인 나라에서 왔다. 더운 여름과 아주 더운 여름. 어떤 사람들은, 그는 덧붙였다. 계절을 셋으로 나누기도 해. 여름과 더운 여름과 아주 더운 여름. 내가 웃자 그도 슬며시 따라 웃었다. 웃음 끝에 그가 물었다. 너는 겨울을 좋아하니? 이제껏 계절에 대해 받아 온 질문들이 떠올랐다. 계절에 관해 받아 온 질문들은 대개 무슨 계절을 좋아하느냐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게 궁금하지, 라는 생각이 드는 질문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계절에 대한 선호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을 것이다. 휴가가 있는 여름이라고 근로에 지친 사무원처럼. 벚꽃 피는 봄이라고[…]

외국어 낱말
편혜영 / 2008-07-31